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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공공건물
          
       
        첫째. 도시건설


         가. 도시의 제도


        
        우리가 지금 도시라 부르는 고장은 서구식으로 정리된 지역인 수가 태반이

        지만 19세기 이전까지는 성벽에 둘려 싸여진 큰 고을을 도시라고 불렀다.

        그 중에 규모가 제일 큰 곳을 경성(京城) 혹은 도성(都城)이라 하고 서울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지방의 작은 고을에는 읍성(邑城)이 쌓였다. 이런 읍성은 전투용의 설비라

        기 보다는 도시를 경계 삼는 한 울타리의 개념이 강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읍성도 전투에 가담하였고 이웃의 산성(山城)이나 군사적 요새지

        인 진(鎭)이나 보성(堡城)과 더불어 효과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읍성의 경우는 처음부터 성을 쌓고 성내의 도로망을 구획하고 주요건물을

        배치하는 계획도시로 건설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연 취락 둘레

        에 성을 쌓고 성내를 정돈하는 방법이 택해지기도 하였다.



        취락은 집이 생기는 대로 골목이 열리고 그 골목에 따라 새로 짓는 집이 자

        리 잡는 것이 순서이나 일단 성이 쌓이고 정돈이 시작되면 중심부의 구성을

        재정비하는 기능적인 건설 태세로 바뀌어간다.  중심부에는 넓은 큰길이 열

        리고 그 길가에는 공공건물이 들어선다. 자연히 그 자리에 있던 살림집들은

        뒤로 물러서거나 지정된 장소로 옮겨야하는 사태를 당한다.



        오늘의 도시보다 예전의 도시건설은 마음만 먹으면 그 조건이 아주 좋았다.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개인의 사유지를 인정하지 않는 제도여서 옮겨 짓

        는 경비의 일부만 보상해주면 살림집은 옮기라는 명령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성계 태조가 한양에 도성을 정하면서 고심한 건설이 성벽 쌓는 일이었다.


        한양은 고려의 남경(南京)이라는 작은 서울에 해당하는 도시였지만  아직

        둘레에 성벽이 없었다. 태조는 무장(武將) 출신이고 왜구의 발호에 대항하

        는 군대를 인솔하였으며 그의 승전이 중앙정부가 있는 곳으로 진출하고 명

        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이하 계속--



    


        둘째. 궁실건축




            --- 미완성--



    


        셋째. 사원건축


      
       우리나라의 절간은 지금 대부분 산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이름 난 절을 찾아

       가려면 명산(名山)으로 들어가야 대찰(大刹)과 만난다.

       그만큼 산이 무대인 셈이다.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도성에 원각사(圓覺寺)를 비롯한 도심의 평지가람들

       이 창건되고 있었다.이는 삼국시대 이래의 흐름이 계속되는 추세였는데 평

       지가람이 차츰 산곡간의 명기(明基)를 찾아 산 속으로 찾아들게 된다.



       산으로 찾아드는 동기가 신라통일기의 선풍(禪風)이 대작하게 됨에 따라

       구산(九山)에 선문(禪門)이 설립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론종(三論宗)이나, 화엄종(華嚴宗), 법화종(法華宗)등 대승불교가 왕실

       의 비호를 받던 시대엔 도심에 대규모로 사원을 조성하였다.



       서라벌의 이름난 국찰인 황룡사(黃龍寺)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현존하는

       절의 터전만 보아도 엄청난 넓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도심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이런 추세는 비단 서라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고구려나 백제의 수도

       에서도 도심에 경영된 절터의 위용을 볼 수 있다.



       도심에 경영되는 사원은 종파의 소의경전(所衣經典)에 따라 가람의 조성을

       특색 있게 하여서 탑을 금당 전면에 위치하게 하기도 하고, 금당과 탑이 나

       란히 동서로 자리잡게도 하였다.


      
       절이 산으로 들어 서면서는 규격을 꼭 지킨다기 보다는 지형의 형세에 따라

       규모 있게 짓기를 위주로 하였고, 여러 종파가 부침을 거듭하게 되고, 선종

       (禪宗)이 주류를 이루게 되자 선풍에 따라 사교입선(捨敎入禪)한다는 긍지

       를 수호하지만 억불정책으로 경제적인 난국을 당하게 되자 신도들이 영입

       하려는 불상과 전각을 수용하는 흐름이 되면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용화전, 약사전, 비로전, 지장전(명부전), 천불전, 오백나한전, 응진당과 같

       은 잡다한 세계가 도입되었다.       다른나라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인데 이는

       승려들의 살아남기 위한 방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절은 그런 판도가 창건시에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

       나면서 시대에 따른 사상의 추이와 주석하는 주지 등의 선호에 따라 하나씩

       추가되어 오늘에 이른 경로를 지니고 있다.



       토속적인 신앙의 일부가 절에 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산신각과 같은 예를 지적할 수 있는데 인도를 비롯하여 다른 불교국에서는

       찾을 수 없는 신앙의 대상이다.



       산의 형국에 어울리는 절을 마련하면서 필요에 따라 사역을 넓혀가면서 새

       로운 시설을 도입하여서 우리가 보는 오늘의 명산대찰들은 가람 형성에 질

       서가 엄격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런 점이 현존하는 사찰의 시대적인 특성을 지녔다고 할 수있다. 조선왕조

       시기에 나타난 현상인데 임진왜란이라는 지독한 전쟁의 결과이다.



       임진왜란으로 사원경제는 완전히 파탄의 지경을 맞는다.그런중에 전후복구

       형식으로 임시방편으로나마 법당을 중건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서 정말

       어렵게 복구해야 하였다.



       그런 수준의 건축물이 주류가 되면서 사찰의 격식은 전대(前代)에 비하여

       많이 격하되었다. 장대하고 권위 있는 건축이기보다는 오히려 주변 환경에

       아우러지는 소박한 건물이 선호되었다. 그로 인하여 법당이나 불상보다는

       법당 뒤로 보이는 뛰어난 산형에 매료되어, 그에 접근하는 석불전(石佛殿)

       같은 건축이 방편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마애불 역시 그 이전시대의 뛰어난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석불사 석실금당

       과 같은 특출한 작품의 출현이 이루지지 못하였다.



       대신에 자연물의 도입으로 해서 신기함을 가미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런 사찰 중의 한 예가 고창에 있는 선운사(禪雲寺)이다. 특히 이 선운사

       의 만세루(萬歲樓)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목재를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는 재주를 보였다.



       조선조 후기, 임란 이후에 들어선 법당 등에서 더러 기둥 중에 다 다듬지 않

       고 적당한 수준에서 손을 빼어 천연스러운 형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예를

       보면서 즐기고 있다. 다른 나라 법당에서 볼 수 없는 일탈의 경지를 그 건물

       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세루는 그런 취향을 대표하는 극치라고 하여도 좋을 정도이다.



      

                               봉정사 만세루 전경
 

    이런 경향이 조선조 전기나 고려, 혹은 그 이전 시대에도 존재하였던 지의

    여부는 잘 알지 못하고 있어 그 흐름이 전대에서 시작되었다고 잘라 말할

    자료는 아직 없다.



    임진왜란 이후에 대두된 경향일 수도 있다. 사교입선은 선승(禪僧)들에게

    사고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비단 교리에서 만의 일탈이 존중되기보다는 생

    활 전반에서 그런 기미가 대두되었고 그런 바탕에서 저런 건물이 배태될 수

    있었을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게 된다.



    이는 불교 신봉자로서의 승려이기 이전에 산을 존숭하는 한국인으로서의

    기질이 발로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석되면 한국인의 조형사상

    이라는 측면에서 그 고찰이 가능해 진다.



    전대에 없었던 사원이 지닌 새로운 진작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

    실이 지적되는 것이므로 한옥을 탐구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유익한 자료를

    대상으로 삼게되었다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불교가 도입된 이래로 이 땅에 수많은 절들이 세워졌다.

    역사상 이름을 전하는 유명한 절도 있었는가 하면 전혀 그 이름조차도 남기

    지 않은 절도 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건축되고 있는 절이 있을 것이므로 과연 얼마나 많은 절

    이 경영되었는지의 통계를 내기는 매우 어렵다.



    조선조 초기의 절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아

    보았다. 책이 기록되던 시기(1530년경)에 각지역에 존재하던 사찰을 위주

    로 한 기록이다. <고적>조에 전시대 절의 이름을 수록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일단 제외하였다.



    <불우(佛宇)>조에 기록된 이름이 1.164 곳이었다. 그 중 같은 이름인 것이

    639곳에 이른다. 그들 이름은 그만큼 관심 있게 애용되었음을 알려준다.

    시험삼아 같은 이름이 얼마나 중복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뽑아보았다.

    다음이 그들 절의 이름이다.



    (기록을 다시 정리하여 가, 나, 다 순으로 정돈하였다)




      迦葉寺 2. 甘露寺 3. 江臨寺 2. 開元寺 3. 開天寺 4.


      乾川寺 2. 見佛寺 3. 景福寺 2. 高山寺 8. 高峰寺 3


     高井寺 2. 觀音窟 5. 觀音寺 16. 廣德寺 2. 廣法寺 2.


      龜石寺 2. 金剛寺 9. 金鷄寺 2. 金谷寺 2. 吉祥寺 5.


      洛山寺 2. 南山寺 6. 南菴寺 2. 大 寺 2. 大芚寺 3.  


     東林寺 4. 桐林寺 2. 桐華寺 3. 頭陀寺 2. 萬福寺 2.


     萬雲寺 2. 萬日寺 4. 望日寺 6. 望海寺 4. 望海庵 2.


     妙蓮寺 2. 無量寺 2. 墨房寺 2. 文殊寺 17. 彌勒寺 6.


     彌陀寺 4. 盤龍寺 2. 般若寺 4. 般若庵 2. 白蓮寺 5.


     白雲寺 6. 法輪寺 2. 法泉寺 4. 法華寺 4. 法興寺 3.


     普光寺 7. 菩提寺 3. 菩提庵 2. 寶林寺 2. 普門寺 2.


     報恩寺 2. 普賢寺 16. 鳳林寺 2. 鳳棲寺 2. 富貴寺 2.


     浮石寺 2. 復興寺 2. 佛巖寺 2. 舍那寺 4. 四王寺 2.


     獅子庵 4. 上 菴 2. 上菴寺 2. 上元寺 3. 上院寺 8.


     雙鳳寺 2. 西方寺 2. 西林寺 6. 瑞峯寺 3. 栖雲寺 3.


     石南寺 3. 石峯寺 3. 石水菴 2. 石泉寺 9. 禪定寺 2.


    成佛寺 11. 成佛庵 2. 聖堂寺 2. 聖主寺 3. 小林寺 3.


    松林寺 7. 松泉寺 3. 水多寺 2. 水菴寺 3. 水月寺 4.


    水淨寺 3. 水精窟 2. 水精寺 2. 水泰寺 2. 修道寺 2.


    崇巖寺 2. 新興寺 3. 神興寺 2. 深谷寺 6. 深源寺 6.


    深寂寺 2. 安國寺 4, 安心寺 6. 安養寺 6. 安長寺 2.


    安興寺 3. 蓮花寺 2. ?谷寺 2. 永興寺 2 寧國寺 2.


    靈鳳寺 2. 靈巖寺 2. 靈隱寺 3. 靈泉寺 4. 五峯寺 2.


    玉溪寺 2. 玉龍寺 3. 玉泉寺 2. 湧泉寺 2. 龍潭寺 2.


    龍頭寺 2. 龍門寺 3. 龍福寺 2. 龍鳳寺 2. 龍巖寺 2.


    龍藏寺 5. 龍泉寺 11. 龍興寺 5. 雲溪寺 2. 雲菴寺 2.


    雲巖寺 2. 雲岾寺 4. 雲際寺 2. 元明寺 2. 圓明寺 3.


    元通寺 5. 元曉寺 3. 月峯寺 2. 月影寺 2 月精寺 2.


    維摩寺 4. 隱寂寺 6. 凝石寺 3. 義湘庵 4. 長樂寺 2.


    資福寺 4. 慈悲寺 3. 長佛寺 2. 長壽寺 2. 長安寺 4.


    積石寺 2. 積善寺 2. 正覺寺 2. 正菴寺 2. 正陽寺 2.


    淨林寺 3. 淨水寺 4. 淨水菴 4. 淨土寺 4. 竹林寺 6.


    中 菴 2. 中臺寺 3. 中菴寺 2. 地藏寺 2. 千佛庵 2.


    千日庵 2. 天龍寺 2. 天王寺 5. 靑龍寺 6. 靑松寺 4.


    淸?寺 10. 香德寺 2. 香林寺 2. 香積寺 2. 弘福寺 2.


    華巖寺 2. 華嚴寺 2. 華藏寺 6. 回龍寺 2. 興敎寺 2.


    興德寺 2. 興龍寺 2. 興福寺 2. 興泉寺 2.




    이렇게 중복된 이름 말고 절은 더 많은 사례를 남겼다. 한 예로 서울 근방의

    양주목(楊州牧)의 예를 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절 이름만도

    22개소에 이른다. 이들은 세종이 국가에서 존속을 허가한 사찰들에 해당한

    다. 한 동안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지 않은 절을 강제로 폐쇄조

    치하기도 하였었다.




    이런 사찰의 존재 파악은 조선조에 얼마나 많은 절이 존재하고 있었는지의

    조사에도 기여하지만 도대체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건축물이 있었는지를 이

    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1. 檜巖寺 2.奉先寺 3.開慶寺 4.中臺菴 5.白雲菴 6.逍遙寺


    7. 小雲菴 8.高嶺寺 9.靑龍寺 10.望月寺 11.回龍寺 12.圓通寺


    13.寧國寺 14.銀石寺 15.梵窟寺 16.妙寂寺 17.佛谷寺 18.水落寺


    19.佛巖寺 20.石泉寺 21.弘福寺 22.淨土寺




    지금은 이들 중에 상당수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있어서 실상을 다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



    회암사는 지금 의정부 근교에 그 대단한 터전을 남기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시절엔 아직 그 절은 성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고

    다음과 같이 그 내력과 규모를 알 수 있었다.



   「천보산(天寶山)에 있다. 고려시대에 서역의 승려인 지공(指空)이 여기에

     이르러 산수의 모습이 완연히 천축의 아란타사(阿蘭陀寺)를 닮았다고 하였

     다. 후에 나옹(懶翁)스님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자 그

     의 제자 각전(覺田) 등이 건축을 전담하여 완성하니 그 건물이 무릇 262간

     에 달하였다. 전각과 불상이 굉장한 규모이며 아름답고 엄숙하여 우리 나라

     에서 으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후에 무학대사가 회암사에 머물자 이성계 태조는 각별히 회암사를 중히 여

     기며 수많은 농토를 하사하는 특전을 베풀기도 하였다.현존하는 터전에 남

     겨진 석축이나 건물 자리의 석조물들을 보면 여느 절과 다른 대단한 기백이

     느껴질 정도로 웅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간 발굴을 통하여 터전의 윤곽

     이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고 목은 이색 선생의 기록도 남아 있어 한참 시

     절의 절의 대단한 위용(威容)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역시 서울의 근교인 파주(坡州)목에도 金剛寺, 上陽寺, 虎鳴寺, 龍床寺, 靈

     隱寺 가 있었고 고양군(高陽郡)에는 大慈菴, 正因寺, 羅岩寺, 小華寺, 漁?

     寺, 興福寺 가 있었으며, 가평현(加平縣)에는 좁은 고장인데도 龍泉寺, 靈

     通寺, 懸燈寺, 靈聚菴, 永濟菴, 惠壽菴, 彌羅菴, 地藏庵 등 8개소인데 용

     천사에서 혜수암 까지는 화악산(花岳山)이라는 명산에 터전을 잡고 있다.



     조선조의 명산에는 대찰을 비롯한 많은 사암들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오늘에 볼 수 있는 경향이나 진배없는 흐름이므로 이미 구

     산선문 이래로 명산에 절이 경영되었고 그런 추세가 조선조 초엽에도 계속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고 해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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