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박물관 인도실 3

by 신 영훈 posted Sep 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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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박물관의 안내서를 다시 펼처들었다.


3세기와 5세기 사이에 북인도를 통일한 강력한 굽다 통치하에서도 마투라와 사르나트에 있던 예술학교들은 계속해서 돌이나 청동 혹은 테라코타를 이용해 불교, 지아나교, 힌두교, 등의 종교조각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6세기 초, 중앙아시안들의 침입으로 굽타시대는 끝이 났다. 그 이후의 시대에는 지방 엘리트들이 거액을 기증해 호화로운 사원들이 경영되었으며, 남쪽의 팔라바스와 콜라스 그리고 데칸고원의 칼루카아스 같은 왕조들의 후원 하에 그 지방 특유의 양식들이 풍성하게 발달하였다.


12세기 후반 이슬람이 도착하고 델리에서 설탄이 집권하면서, 이슬람의 규범이 도시생활 속으로 파고들었고, 또한 회교국 전통이 예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인도 북부를 지배한 중앙아시아 왕조인 무굴왕조의 지배하에서는 왕국생활이 절정에 달하였다. 이 시기에는 귀금속, 보석세공, 서적회화 등이 발전하였다.


아주 간단명료한 설명문이다. 인도의 여러 지역을 순방한 나의 경험에 비추면 이 안내문은 지나치게 골격만 추려서 개성적인 지방 특유한 성향에는 언급하지 못하고 말았다.

예컨대 남부의 석조건축물에 비견될만한 히마찰 등지의 목조건축이 지닌 문화사적인 특성이 지적되었으면 더욱 인도문화의 다양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을 것 같다.


이어서 안내서는 근세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 시기에 지방에 끼친 다른 요소는 유럽상인들과 16세기부터 도착하기 시작한 식민지 개척자들의 존재였다.


19세기 중엽, 인도는 대영제국에 합병되었지만, 대부분의 인도지방은 아주 전통적으로 남아 있었고, 금세기에서조차 고대의 신앙과 실천에 기초를 둔 예술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안내문은 끝이 났다. 하단에는 6점의 작품을 사진으로 싣고, 그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마치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맨발로 춤을 추고 있는 동작을 정지시킨 듯한 인물의 조각상이 소개되어 있다. 얼른 보아 인상이 남자 얼굴에 유사한데 노출된 젖가슴의 풍만한 맛으로 보아 여자 상을 조각한 작품으로 보인다. 상반신은 전라이나 하반신에는 주름진 하의를 입었는데 몸에 착 달라 붙어 하반신의 육체미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인도 조각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이 둔부와 젖가슴이다. 둔부는 그렇게 발달된 모습을 거리의 여성에서도 볼 수 있다. 그곳 여인들은 갖난아이를 안거나 업지 않고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 아이가 엄마를 바라다보도록 궁둥이 위에 앉혔는데, 아이가 말을 타듯 두 다리 사이에 엄마 궁둥이를 끼고 있다. 궁둥이가 발달하지 않았다면 미끄러지지 그렇게 착 달라 올라앉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인도 조각의 젖가슴은 유난히 발달하였다. 두 젖이 크게 돌출 되었는데 그 젖이 약간 처지거나 하지 않고 사발을 가슴에 붙인 듯이 아주 동그란 것이 툭 불그러져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미국의 이름난 여배우인 마리린 몬로처럼 육감적이라 하기는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동양의 불교국 불상조각에서 보살상은 여인의 몸매처럼 표현을 하지만 젖가슴은 의복에 가려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인도 조각은 대부분 상반신을 벗었고, 저 둥근 대담한 젖이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같은 불상조각이면서도 민족에 따라 표현이 다르다는 점이 주목되며, 이는 또 지역적인 특성이 허용된 불교의 자유스러움의 표현이란 점에서도 관심을 둘만하다. 기독교의 예수상이 거의 규범적인 점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여인들의 젖가슴이 정말 그렇게 생겼는지가 궁금하여 집의 가족까지 동반하여 확인하려 하였으나 한사코 완강한 거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인체가 조각에 끼치는 실상을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아주 우연한 기회, 성스러운 강에서 목욕하고 갈아입는 젊은 여인을 흘깃 보게되었는데, 정말 조각처럼 그런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다.

그간 몇 차례에 걸쳐 우리 탐구단의 일행은 인도 여러 지방을 순례하였었다. 많은 유적과 유구와 유물을 보았다. 많기도 많았다. 그 여러 박물관에 전시된 것처럼 엄청난 수에 이른다. 인도인들이 끈질기게 조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 덕분이었다고 보이는데 한편에서는 인도의 현대화의 장애가 바로 종교라고 지탄하기도 한다.


과연 어떤 관점이 적실한 것인가. 산업사회의 폐해가 아직 인도인들의 삶에는 그렇게 철투철미 침투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에서 그 원인이 종교 때문이었다면 종교가 오히려 좋은 방패가 되었던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식민지 기간 동안 그들이 점령했던 것은 도시와 지식인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싶다. 서양인의 인식과 동양인의 사색 사이의 괴리로 인하여 민중의식의 심층부까지는 지배할 수 없었다고 보인다.


그에 비하면 일본인들은 창씨개명 등으로 개념의 대요를 장악하려 하였다. 그들과 우리의  문화체계가 같았기 때문이다.

인도실에서 물러 나오면서 나는 인도인들의 처지와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를 비교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