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壽의 사랑방 이야기 제19화

by 신영훈 posted Oct 0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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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박종은 강릉에서 오죽헌을 들러 율곡선생을 추모하고 강릉을 떠나 삼척으로 가서 죽서루를 본다. 죽서루는 지금도 경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위 벼랑 위의 다락집이다.


오죽헌(烏竹軒)

율곡 이이선생이 탄생하신 곳으로 외조부 되시는 신명화(申命和)선생댁이다. 신공은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외손 되는 권처균(權處均)에게 전하였는데 권선생은 곧 율곡선생의 이형제(姨兄弟)이다. 권씨 자손이 그의 집을 지켜왔다.

1767년 겨울, 10월에 나는 친구 이민숙과 함께 영남으로 가는 도중에 오죽헌을 보기 위해 길을 영동(嶺東)으로 잡았었다. 강릉에 도착하자 그 길로 집을 찾아보기에 마음이 급급하였다.

오죽헌은 강릉에서 북으로 가 청곡리(靑谷里)에 있다. 산천이 빛나고 아름다워 어진 이를 낸 기풍이 백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역력히 어려 있는 것 같다.

오죽헌 밖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옷을 다시금 여미었다. 퇴 아래는 아직 옛날대로 검은 烏竹이 숲을 이루고 있다. 대청은 두 간, 방은 나눈 간인데 여기는 곧 사임당(師任堂) 신씨가 해산하한 곳이니 당시 선생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한 소년이 나왔기에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선생의 생전에 쓰시던 붓과 벼루와 유적으로 참고 될만한 것을 보여달라고 하였더니, 소년은 곧 작은 상자를 내어 왔다. 나는 민숙과 함께 꿇어앉아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선생의 벼루가 있어 말라붙은 먹이 아직도 번들거리고 있다. 붓은 없었다. 『격몽요역(擊蒙要譯)』 한 권은 곧 선생이 쓰신 초고본인데 지면에 보풀이 인 것으로 보아 선생이 여러 번 보신 것을 알 수 있고, 고친 흔적이 있어서 선생의 손 때가 완연하다. 만져보며 구경하노라니 선생의 풍모를 만나는 듯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시골 서생인 내가 몸소 오죽헌에 와 옛 현인의 귀중한 유적을 직접 보니 선생을 추모하던 회포가 위로될 뿐 아니라 이를 인연하여 선생의 생전 일을 회상하게    될 제 마음속에 선량한 마음이 움돋음을 느낀다. 그러니 항차 몸이 선생 문하에 나가 직접 가르침과 감화를 받은 이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선생의 道가 모두 文集에 있으니 물러가 이를 연구함은 나의 성실에 달렸으니 어찌 노력하지 않겠는가.

오죽헌에는 「근독암(謹獨菴)」, 「烏竹軒」 두 현판이 있는데 이는 다 수옹(遂翁)의 글씨이고 또 장암(丈巖)의 중수기와 삼연 김창흡(金昌翕)의 退魚詩가 있다. 소년은 권공 처균의 7대손으로 이름은 한량(漢亮)이다.


죽서루(竹西樓)

삼척군(三陟郡) 서편에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 맑은 강을 위압하는 듯 서 있는데 그 위에 자리 잡은 것이 곧 죽서루이다.

냇물이 태백산에서 흘러 50 구비를 지나오니 그 물줄기의 근원이 멀어 물이 맑고 굽이돌면서 석벽을 안고 감돌아 흐른다.

누대에 올라 난간에 의지하면 사람은 반공에 있고 강물은 그 아래 있어 물빛은 파란데 사람의 그림자가 거꾸로 잠기었음을 보게되며, 헤엄치며 노는 고기 떼는 백, 천으로 무리 지어서 위 아래로 오르고 내리는 것을 굽어보며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가까이는 촌락의 집이 있어 나직이 뜬 연기가 처마 끝에 감돌며, 멀리는 여러 산들이 오라는 듯 가물가물 어렴풋이 보이니 누대 승경이 실로 관동 제일이라 하겠다. 누대 벽에는 숙종의 어제시와 또 이율곡과 권석주(權石洲) 등의 여러 시가 걸렸다.

죽서루 남쪽 10여 보에는 연근당(燕謹堂, 주: 지금은 보이지 않음)이 있는데 그 앉은 석벽이 강에 임한 것은 죽서루와 같으나 단지 석벽이 떨어져 병풍 같이 된 것은 죽서루 보다 낫다 하겠다.


박 선비는 삼척을 떠나 경주에 당도하는데 그 중간에 울진에 들러 망양정과 월송정을 둘러본다. 이른바 '관동팔경'에 드는 명소이므로 잠시 들러 보았다. 그 행보는 다음 회에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