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壽의 이야기 사랑방 제21화

by 신영훈 posted Aug 2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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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의 뒷간

지금 그 동안 절판되었던 『한국의 살림집』을 다시 간행하려 노력하고 있다. 새 자료 보완을 위한 작업도 병행중인데 『花郞世紀』에서 뜻밖의 자료를 읽게 되었다. 이종욱님이 번역한 글에 [5세 풍월주 사다함] 항에서 묘한 표현을 보게 되었다.
「5세 사다함은 구리지仇利知의 아들이다. 처음 비량공比梁公이 벽화후碧花后를 그리워 하여 늘 (后의) 뒷간으로 갔다. 법흥대왕이 비량공을 사랑하여 금하지 않았다. 과연 后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구리지라 하였다. 구리지는 아름답기가 벽화후와 같고 담력이 비량공과 같았다」

이 글에서 '后의 뒷간'이란 표현이 내겐 놀라움이다.

신라시대의 뒷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르는 우리의 처지에서 이 글은 뒷간이 별도로 구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더구나 '后의 뒷간'이라는 지정된 단어로 보아 쓰는 신분에 따른 뒷간이 따로따로 조영되었음도 알 수 있다. 놀라운 정보이다.
비량공은 碧花后가 뒷간에 가면 만나 사랑을 하고 그 방사房事의 결과로 아들을 낳는다. 비록 뒷간의 구린 냄새를 슬며시 풍기도록 '구리지'란 이름을 지어  능치긴 하였어도 뒷간 출생임을 아주 숨기려 하지 않았나 보다.

도대체 어떻게 구조된 뒷간이면 상류 신분의 남녀가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가가 나에게는 몹시 궁금한 대목이다.

木壽는 오랜동안 국내 여러 살림집과 궁실 사찰을 순방하면서 무수한 뒷간에 드나들어 보았지만 남녀가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일 만 한 분위기인 예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
상류사회의 구한 신분의 분들은 '매화틀'이라는 이동식 변기를 사용한다고만 알고 있어서 궁에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 자기가 사용하는 뒷간을 따로 소유하고 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하였었다.


왕의 총애 받는 여인의 뒷간이 따로 있었다면 왕비나 왕대비는 물론이고 왕도 자신의 뒷간을 따로 갖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왕궁에서 자란 왕자와 공주들도 성장하여 궁밖에서 살림하면서 각자 자기의 뒷간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제도는 상류사회는 물론이고 백성들 중 호사가도 그런 뒷간을 장만할 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살림집 탐구에서 소흘히 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아직 다른 문헌에서는 이런 점이 밝혀져 있지 않아 오리무중에 있었다.
불국사에 현존하는 수세식용의 돌로 만든 부춧돌(변기)이 과연 어떤 시설에 사용되던 것이었을까를 궁금하게 생각하던 처지에서 『花郞世紀』의 정보는 전용변기 시설의 윤곽을 매우 어설프게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추정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의 서양식 변기는 눈앞에서 씻어내 준다는 이점 외에 그것이 공해를 유발하지 않게 처리되는 전과정을 전부 망라하지 못하고 있다. 하수관을 통하여 집합되거나 수거하여 처리하는 종말처리라는 단계를 거처야 자연을 돌아가게 되지만 거기에서 유발되는 공해가 말끔히 사라졌다고는 아직 말하기 어려운 단계에 있다. 그런 단계의 현실에서 '구리지' 정도만 감수하면 아이 낳는 작업까지가 가능한 뒷간의 시설은 우리에게 뒷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신라의 뒷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 다 함께 이 숙제를 푸는데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여럿의 지혜가 해답을 발견하는데 상승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