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壽의 이야기사랑방 제 97화

by 신영훈 posted Feb 0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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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吉龍 建築家의 生涯

박길용선생은 1898년에 탄생하였다. 이 해는 고종高宗께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수립하고 황제에 올라 광무光武로 연호年號를 정한지 2년차에 해당하는 해로 한 참 사회는 소용돌이 치고 있던 시절이다.
1919년, 한참 3.1만세운동으로 복잡하던 그 해 3월에 경성공업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學校 建築科를 졸업하고는 당시로서는 건축과 졸업생들이 유능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 건축담당 부서에 발탁된다. 그러나 탐탁하지 않았던지 1932년에 고만 두고 나와 7월에 서울에서 건축사무소를 열고 자기 작품을 만드는 일에 매진한다. 그러나 세상이 유능한 인재를 그냥 두지 않아서 다시 1935년에는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에 들어가야 하였다. 또 그는 조선농지영단朝鮮農地營團에도 참여하여 시골집들의 질을 향상하는 일에도 기여하였고 朝鮮建築技士協會  理事長직을 맡아 진력한다.
박길용 건축가는 많은 건물을 신축한다. 그의 작품의 일부가 <朝鮮と建築> 제22집 5호의 특집호에 사진으로 게재되었는데 개성정화여학교開城貞和女學校 校舍, 1929년도 박람회의 환영문(기와지붕의 거대한 一柱門 식의 구조), 3층 건물인 이문당以文堂 사옥社屋, 종로 태서관太西館, 대신상업학교大新商業學校 校舍, 경성여자상업학교 강당, 개인 살림집 5점, 大同工業專門學校 校舍이다. 흐릿한 흑백사진으로 그 형상을 보이고 있어서 더 구체적인 세부는 알 수 없어 딱하다. 그리고는 그 특집호에는 박선생의 생애를 추모하는 글이 실려 있다.
총독부에 근무하던 시절의 박선생의 제도製圖하는 실력이 단연 발군拔群의 경지였다는 사실과 무슨 일을 하던 장고長考하는 버릇이 있어 일에 차질이 없었다던가 설계사무소 운영시에도 많은 사람들과의 격의 없는 교유交遊, 공손한 태도, 또 그의 식견과 신용, 그리고 경영의 능력으로 해서 서울의 큰일을 그만큼 많이 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화신백화점을 비롯한 종로통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대부분 박선생의 참여로 이루어졌고, 한옥의 개량을 주장하면서 새로 짓는 한옥에 참신한 기풍을 부여한 성과나 노력도 크게 칭찬을 하였다. 그의 공평무사公平無私한 품성은 공무工務협회, 朝鮮技士협회, 建築士支部, 建築代書士協會등의 운영에도 반영되어 각 단체의 발전이 있었다는 점도 찬탄을 하였다.
그런 분이 46세의 젊은 나이로 저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아까운 일이냐는 한탄이 글 마무리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그 글을 쓴 이는 선생의 일찍 떠남을 몹시 아쉬워하였나 보다. 11년간 서울 생활을 하는 중에 박선생과의 交遊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는 일본인 건축가의 애도사哀悼辭도 그렇고 박선생이 남기고 떠난 유풍遺風을 익히는 일이 즐겁다는 또 한 분의 술회도 들어둘 만 하고 한국인으로 추모사를 피력한 劉相夏선생은 짧은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피력하였다.
「박형은 반도건축계에서의 대선배이며, 사회에서는 그 방면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개척자이었다. 이제 박형께서 작고하시니 과연 누가 그 뒤를 이을 수 있단 말인가. 형은 朝鮮住宅의 啓蒙운동에 당하여 후배들 양성에 진력하였다. 사무실에서는 職務말고도 다방면의 상담에 응하였고 그 해결에 고심하였다. 또 그 어려운 중에도 심혈을 기울여 機關紙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지극히 경복敬服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제 누가 그런 일을 맡아서 할 수 있으려는지 우리들은 얼굴을 들 면목이 없는 지경이다. 千客萬來의 來訪人士나 후배들과의 만남에 쉴 틈이 없는 그 분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현장에 나가 일의 되어가는 과정을 살피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른 분야에 비하여 빈약한 건축계에 박형이 계시므로 해서 큰 힘이 되었는데 이제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으려는지 앞이 깜깜할 뿐이다....」
金谷嘉之라는 제자의 글, ‘恩師 朴先生님을 회상하며’ 에서는 「1943년 4월 27일 9시 50분에 우리 건축계의 逸才이신 朴先生님께서 마치 古木이 쓸어 지듯이 홀연히 눈을 감으셨다. 다시는 그 온화하신 모습을 뵙기 어렵게 되니 그 슬픔은 千言萬語를 다하여도 哀悼하는 정을 다 풀기 어렵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어제 까지만 해도 明倫專門學校의 立面圖를 그리시면서 “金谷君, 이 도면이 어떤가?” 하시며 의견을 물으시며 웃던 그 어른이 하루 밤 사이에 영영 눈을 감으셨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러니 저 도면이 선생님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나는 선생님이 쓰신 <朝鮮風住宅硏究>를 읽으면서 감복하였고 2년전에 졸업을 하면서 선생님 아래로 옮겨 師事하게 되었으며 深大한 감명을 받았다.
선생님은 建築技術家이면서도 評論家이셨고 社交家이시며 社會文化의 啓蒙家로 최선을 다하시면서 才氣를 발휘하셨다. 선생님은 多年間 建築學 연구에 몰두하셨다. 그런 중에 조선건축 改善에 최선을 다하셨다. 정평 있는 이 분야의 최고의 권위자로소 一大轉向의 기틀을 마련하시면서 그 향상과 진보를 촉진하여 완벽으로 가는 길로 신명을 다 받쳐 진력하셨으며,
天與의 職分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다. 그래서 학술의 연찬과 함께 장차 그 일을 감당할 인재들 양성에 정열적으로 계몽하고 지도하시는 일에 專念하시었다. 또 一寸의 시간도 헛되게 보내지 않고 아침이 되면 우리들 보다 먼저 출근하시고 책상에서 일을 하시거나 현장에 나가시거나 하셨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침부터 밤중 까지 책을 읽으시니 우리젊은 이 들을 스스로 啓發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붓을 들고 작업을 하기 시작하면 주도면밀하게 일하면서 조금도 소홀함을 용납하지 않으시면서도 여운이 있는 음악에서처럼 靈感을 느끼게 하셨다. 우리들 제자들에게도 주도면밀하기를 바라셨고 몇 번이고 고치면서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하시면서 修正을 반복하도록 하셨다. 그런 진지하신 태도는 집요하시다고 할 정도이었다. 그러면서도 부족함이 보이면 여지없이 비평하시면서 완벽하기를 주문하셨다. 또 構造 중에 곡선으로 처리할 부분에서 그 부분이 지니는 프로포지션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시곤 하였다.
선생님은 평소에 거의 병이 없고 건강하셔서 젊은이들에게 뒤지는 법이 없으셨고 겨울에 장갑도 끼지 않은 신 채로 부지런히 다니시곤 하였다.
친구나 우리들 제자에게 하시는 선생님의 慈愛는 격별하여 눈물이 날 정도이셨다. 언제이고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맑아지면서 뿌듯해져서 나도 매일 같이 즐거움에 용솟음 치면서 출근하여 선생님을 뵈곤 하였다. 실로 따뜻하고 온화하시면서 늘 일에 열중해 계시니 가깝게 모시고 있는 것 만으로도 즐거움이었다. 선생님의 人格은 매우 高潔하시고 理義를분명히 하시는 정도가 竹을 가르듯 하셔서 성의를 다하시지만 의연한 風格이 고매하셔서 複雜多岐한 생활환경에서 오는 잡다한 일에 당하여서도 의연하게 대처하시곤 하셨다. 지금 새삼스럽게 선생님의 그 인격의 崇高德한 위대하심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敎訓을 남겨주신 우리들이 崇敬愛慕하는 恩師께서 겨우 46세의 젊으신 연세로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는 客으로 떠나셨습니다. 정말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앞을 가립니다. 지금 보다 10년만 더 사실 수 있었어도 좋은 작품을 더 많이 남기셨을 터인데 아깝고 원통한 일이다.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原稿를 집필하실 때는 바쁜 나날에 쫓기어 잠깐 틈을 내시어 조금씩 쓰시곤 해서 一編을 끝내시는데 數十日이 걸리곤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어른의 글을 읽으면 단숨에 내려쓰신 것 같은 박진감이 넘친다.
우리 弟子들은 많은 敎訓을 받들고 恩師님의 遺志를 떠받들고 突進하기를 다하여야 은사님에게 보답하는 길이 됨을 다짐하였사오니 英靈께옵서 안심하소서」(5月 二十日)
이어서 애끓는 朴容九 아드님의 -斷章- <父> 라는 글이 계속된다. 박용구선생은 예술가로 196,70년대 크게 활동하시던 분인데 -내가 왜 喪服을 입고 있는가? 정말로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셨단 말인가 - 절절이 哀哭하는 글을 써서 남겼다.
이어서 吳英治郞이라는 제자의 <朴吉龍先生을 추억하며>라는 글이 실렸는데 「.....恩師와는 지금으로부터 8년전에 학생으로 만나 뵙게 되었고 졸업 후에 선생님 설계사무소에 출근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사무소에는 工高 출신들과 우수한 설계자로 이름이 난 李氏들이 韓靑빌딩, 和信百貨店, 女子商業高等學校 校舍등의 귀중한 설계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住宅설계를 감당하는 일에 정진하게 되었다(中略) 朝鮮建築界에 커다란 足跡을 남기신 은사께서는 朝鮮最小住宅을 비롯하여 都市最大建築物에 이르기 까지 數多한 設計案을 남기시었다.
작년 <綠旗雜誌>에 박선생님을 소개한 글에 「氏의 설계는 每日 한 채(一棟)씩 이룩해 내었으니 즉 한 해에 365棟을 設計하는 建築家」라고 하였다. 실제로 그만큼 多忙한 분이셨다. 그런 중에도 建築會誌에 발표하는 原稿를 쓰시고 편집에 관여하시는 한편으로 住宅營團, 農地營團에도 참여 하셨다. 또 敎化를 위해 梨花女專에 出講하시면서 여인과 살림집과의 관계를 강의하시고 또 某工科학교에도 관여를 하셨다.
설계사무소에서는 일사분란하게 設計작업을 지휘하시는 한편으로 朝鮮家屋改善문제를 철저하게 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住宅 資料들을 수집하여 검토하고 그를 토대로 연구한 결과를 論集으로 만들어 單行本 2권을 출판하였다. 작년부터는 <建築朝鮮>이라는 月刊建築新聞을 발행하여 사회로부터 대단한 高評을 듣기도 하였다. 선생님은 3월호 遺稿에도 실린 것처럼 아주 질박한 생활을 하시면서도 설계자들에 대한 보수에서는 전혀 인색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작품 만들기에 더욱 苦心하도록 하셨다.
내 추억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平壤大同工專 설계 때였다. 敷地 조사를 위하여 스승을 모시고 奉天行 급행열차를 타게 되었는데 3등이어서 좌석이 만원이라 서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新幕 쯤에서 한자리가 비었다. 선생님께 앉으시도록 권하였는데 선생은 옆에 서 계신 한 부인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그 옆에 서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시며 태평이셨다. 평양에 도착해서 여관에 투숙하였다. 평소에 건강에 관심이 많은 처지라 여행에서도 조심을 하며 늦잠을 잤는데 선생님은 이튿날 벌써 새벽 6시경에 혼자서 터를 둘러보셨다 하며 조반을 드신 후에 다시 한바퀴 모시고 돌아왔는데 숙소에 도착하자 곧 지금 사무실에서 설계하고 있는 明倫專門학교 校舍의 正面을 그리시더니 만족스러우셨는지 “이봐 이것좀 보게나”하시면서 즐거워 하셨다.
그런 분이 밤중에 뇌일혈로 돌아가셨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아 아 슬프고나! 이제부터 우리는 恩師의 眞意를 계승하여 쉬지 않고 突進하는 일이 선생님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사오며 靈前에 서약하옵나이다.」

木壽로서는, 섣달 그믐날에 귀한 분의 일생을 짧으나마 돌이켜보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싶어 서둘러 정리해 보았다. 이미 다 아시려니하면서도 혹시 이만한 정보라도 요긴하게 참고하실 분이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고, 정보를 공유하는 일이 즐겁다는 생각에서 이 작업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