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으로의 초대 - 5. 한옥의 역사

by 운영자 posted Dec 2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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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옥의 역사



건축의 역사는 시대성에서 구분이 생긴다. 190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집의 역사
는 크게 달라진다. 1890년대까지를 전형의 시대라 한다면 1900년대로부터는 규모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확연히 구분된다. 또 1890년대 이전을 살림집 자급자족시
대라 한다면 1900년대부터는 집을 지어 파는 제도가 등장한 시장주택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1890년대까지의 살림집을 주가(住家)라 하고 1900년대로
부터의 살림집을 외래의 용어에 따라 주택이라 부른다. 그만큼 1900년대 이후는 외
국으로부터의 자극이 강하게 작용하여 온다. 한옥의 특성으로 지녔던 내용들이 이 시
기에 이르러서는 하나씩 무시되기 시작한다.

역사시대로 접어든 이후 1890년대까지를 나는 크게 4기로 나누어 연구하고 있
다. 전형의 한옥이 1900년대로부터는 단절되었다고 보고 그 이후의 시기는 따로 구
획하고 있다.

4기의 시대구분은 살림집 이외의 여러 건축환경(시대의 사회상)도 고려하였다.
집, 특히 살림집은 다른 문물에 비하여 더 보수적이어서 어떤 것은 태고적의 내용을
아직 그냥 지니고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왕조가 바뀐다고 해서 집이 하루아침에 달
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계기로 집의 성격들이 바뀌게 된다. 그런 결정적인 계
기가 네 번 있었다고 본 것이다.

1기는 역사 이래로부터 삼국시대 말기까지이다. 이 시기의 역사기록은
주로 중국사람이 보고 듣고 썼다고 알려진 역사책의 기사에서 발견된다. 고구려, 백
제, 신라의 풍물을 기록한 중에 살림집에 관하여서는 조금씩 언급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의 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왕족, 귀족,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이 짓
고 사는 집과 움집을 짓고 살던 백성들의 집으로 나뉜다. 하나는 지상의 건물이고 백
성의 집은 지표하(地表下)의 구조이다. 지상의 집은 발달한 도구를 써서 훈련된 기술
자들이 완성시키는 건축물이고 움집은 이웃들이 협동하여 짓는 옛부터의 집이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움집에 구들을 설비하였는데 비하여 고급 집은 수입한 모
포나 비단으로 장막을 여러 겹 늘여 외기를 차단하고 살았다. 백제에서는 오두막집
짓고 살았고, 신라에서는 귀틀 집 짓고 사는 백성들이 태반이었다. 이런 흐름은 후대
에도 계속되었겠지만 신라 통일기에 이르면 차츰 양상 이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삼
국시대 말까지를 1기로 보았다.


2기는 신라통일기로부터 고려왕조의 元宗대까지로 설정한다.
신라 통일기에 이르면 움집 ,오두막집, 귀틀집 류가 차츰 고급 집으로 바뀌어서
憲康王대의 서라벌의 경우는 초가가 한 채도 없는 기와집으로 17만여 호가
즐비하였다. 그만큼 양상이 달라졌다. 신라의 문물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에서도 이런
양상이 계속되다가 몽고군의 습격을 받으면서 고려의 경제상태가 위축되고 집의 규
모가 왜소해진다. 정치의 불안, 외국인의 약탈, 전쟁의 계속은 지독한 공황으로 몰고
가서 고려의 수도라 할지라도 기와집 보기가 드문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이 시
기까지는 순수한 옛 맛을 남기고 있었다.

3기는 고려 충렬왕 대로부터 임진왜란까지의 기간이다. 몽고군에 시달
리던 고려왕조는 원나라의 사위, 임금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드는 나라로 전락한
다. 원나라의 문물이 들어온다. 북방 유목민족의 유형이 잠입한다. 의복도 머리 모양
도 달라진다. 집도 크게 변환의 계기를 맞는다.

이씨가 혁명한다. 신흥국가의 발흥에서 신도(新都)의 경영 등으로 살림집들도 크
게 고무된다. 문물의 진작도 활력소가 되었다. 다시 옛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단계에
들어선다. 도읍이 윤기가 흐르고 고을이 풍요해지면서 넉넉한 집들이 등장하고 이제
까지 북방에만 있던 구들이 남하하여 중부 지방까지 보급되고 남방의 마루가 북상하
여 중부지방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이런 건축물들은 병란
에 불타거나 없어지고 말았다.

4기는 임진왜란 이후 1890년대까지이다. 대한제국의 말엽까지로 보아
도 좋다. 7년 전쟁은 가혹하였다. 거기다 병자호란까지 겪는다. 경제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어 복구작업이 지지부진의 상태였다. 궁실과 관아마저도 난후복구(亂後復舊)
가 여의치 않은 실정이었다. 영조·정조 때 이르러서야 겨우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여
복구의 역사가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백성들은 아직 외척들 발호에 따른 목민관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어 넉넉한 집을 짓지 못하였다. 권력 있거나, 재계에 진출한
중인들만이 큼직한 집을 지었다 그러나 그 규모나 수량은 옛일을 회복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제4기로 한옥의 역사는 끝이 난다. 제5기라고 할 190O년대 이후는 단계로 보아
몇 시기로 구분 할 수 있다.
일정기의 지독한 식민지 착취로 살림집은 거의 몰락하여 큰집은 자취를 감추다시피
되었다. 6·25를 만난다. 그나마 남은 옛집들이 전화에 사라진다. 휴전이 되고 부흥의
노력이 경주된다. 후생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전대에 없었던 규격화된 가건물
형 주택이 등장한다. 여기까지를 한 단계로 볼 수 있다.

그 이후 집단고층주택이 등장한다. 시골집들이 집중적으로 개조된다. 이런 경향
에서 새로운 단계로 구분 할 수 있다.

제4기 이후의 급격한 변화에서 우리의 집들은 뾰족하고 날카롭게 되기 시작하였
다. 각이 서고 날이 세워지는 집이 강산 도처에 자리잡았다. 백성들 심성이 급하고 촉
박하고 서두르는 단기한 기질로 바뀌어 가고 있다. 흉측한 범죄가 증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집이 인간을 함양한 실상인 것이다. 날카로운 집에서 그것만 보고자란 아이들의
감수성이 그렇게 노출되고 있다. 불행한 일이다.

이제 우리가 한옥을 살피고 공부하는 일의 목적은 뚜렷해진다. 옛날의 집을 짓고
살자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옛 시대의 집이다. 그것을 다시 짓
는 다는 일은 어렵다.

그것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짓고 살아야할 집이 과연 어떠해야 이상형이겠느냐
의 탐구에서 이 땅에 수 천년을 적응해온 자료를 능숙하게 이용하려는데 목표가 있
다. 그들 집에는 슬기도 있고 식견도 있으며 개성도 있고 인정도 숨쉬고 있어서 우리
가 찾아 써야 할 재료들이 너무나 풍부하다.


첫째. 제1기(隆盛期)

가. 일곱모 난 주춧돌

부여 주춧돌의 7각은 상당히 발전된 조영의식과 발달된 기술에 의하여 완성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강암을 7각으로 다듬으려면 다듬는 도구가 완벽하지 않으면 어
렵다.

우선 큰돌에서 주춧돌 다듬을만한 알맞은 크기로 잘라내야 한다. 돌을 자른다는
기술은 쉽지 않다. 화강암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압록강 연안 국내성이 있는 도성에 태왕릉(太王陵)
으로 불려지는 거대한 방단묘탑(方壇墓塔,--將軍塚처럼 생김)이 있다. 대부분 무너
진 상태여서 원래 모습을 다 볼 수 없으나 무수한 석재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 중에 큰
돌에서 작게 잘라낸 자취를 남긴 석재가 있다.

보통은 직선으로 갈라내고 다시 직선으로 갈라내서 작게 뜨는 법인데 이 석재의
자취는 둥글게 갈라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기술은 지금도 하기 어려운 매우
까다로운 것인데 고구려 그 시기에 그렇게 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어떤 연모를 사용하면 이런 기술이 발휘되나? 알기 어렵다. 언제부터 이
런 기술이 응용되었던 것일까? 더구나 알기 어렵다.

2000년 2월에 이집트에 갔다가 화강암을 떠서 오벨리스크(obelisk) 만들던 석산
을 찾아갔다. 다른 한 쪽 바위에서 삼각형으로 돌을 떠낸 흔적을 남긴 부분을 보게되
었다. 적어도 지금부터 3000년 이전의 자취라고 한다.

발달된 도구로 정교하게 시공할 수 있었던 흔적이라면 고구려 태왕릉에서 보는
그 기술의 시원도 상당히 소급할 수 있고 따라서 고구려의 돌 가르는 도구와 기술은
대단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기술로 해서 고주몽의 집 일곱모 난 초석이 만들어 졌다면 지금 까지 우리
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수준 높은 고급 건축물이 고구려 초기에 이미 대단한 발달
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해야 마땅하다.

나. 7층목탑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은 고구려 북방에 방단 위에 솥을 엎은 듯한 아육왕탑
(아쇼카왕의 탑, 싼치 대탑 유형)이 있었고, 그 탑의 상부를 헐어낸 사건 이후에 거기
에 7층의 목탑을 세웠다고 하면서 그런 일이 동명성왕 시절에 있었다는 소식이라고
알려 주었다.

B.C 1세기경에 돌로 쌓은 방단(方壇) 위에 7층의 목탑을 세웠다는 설명이 된다.
방단 위에 목탑을 세운 예는 후대지만 네팔지역에서 흔하게 본다. 인도와 네팔과 고
구려에 분포되어 있는 같은 유형의 방단 위의 목탑이 어떤 연관을 가졌었는지는 지
금 당장 알기 어려우나 어떤 상관이 있었을 가능성은 주목 할만하다.

고구려 장군총에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木壽는 주장하고 있다.

발해시대에도 무덤 위에 탑을 세웠다. 돌로 축조한 석실고분에는 주초석 놓고 목
조건물 지은 예가 잇는가 하면 벽돌로 쌓은 무덤 위에는 벽돌로 조성한 전탑이 있다.
지금 대부분의 탑이 무너졌지만 압록강변에서 찾은 발해시대 5층 전탑은 의연히 발
해 공주님 무덤 위에 우뚝하게 일어 서 있다.

고구려 제도를 계승한 발해의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군총 위의
목탑 존재는 확실하며 태왕릉을 비롯한 방단 유구에서 수 많은 기와 파편과 막새가
수습되고 있음에서도 증거를 얻는다.

다. 목탑건축의 융성

백제나 신라에서도 목탑이 융성한다. 기록으로는 백제에 목탑이 극성을 이루었
다고 하였으나 그 형상이 어떠하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더구나 9층탑이 백제에 있었다는 자취는 문헌이나 터전에서 아직 밝혀내지 못하
고 있다. 그러나 황룡사 9층탑을 조성하면서 선덕여왕이 나라 체면을 불구하고 백제
에 폐백을 보내며 건축가를 초빙하였던 것은 백제에 그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
을 것이므로 백제의 목탑 조성의 실력도 뛰어났었다고 할 수 있고 그 흐름이 일본으
로 건너가 오늘의 일본이 목탑의 나라가 되게 하였다고 할 수 있게 된다.

목탑이 사원의 중심이 되고 사방불 봉안의 감실이 되었다가 사방불이 따로 나와
금당에 안치되는 사조(思潮)가 대두하면서 가람이 본격적인 발전을 하고 탑과 금당
과의 관계가 정립되는 기초를 이룬다.

라. 건축의 융성

왕실 소용의 각종 건물들이 건축되면서 불교 사원도 도성 안에 조영을 시작한다.
도시는 불교가 성행하면서 더 활발해지는데 불교건축물이 도시 발전에 이바지하였
기 때문이다.

왕실이 후원하는 불교 사원은 왕실 소용의 왕궁이나 여타 공공건물에 비하여 그
건축이 왕성하여 대단한 발전을 하였고 지식인 승려들의 국제적인 활동으로 해서 현
대건축의 흐름이 파급되고 그로 인하여 건축 내용이 다양해지면서 건설사회가 활기
를 띄우게 되었다.

삼국의 경쟁적인 포교활동과 승려들의 노력으로 해서 이 시기의 사원건축은 융
성기를 맞아 극도로 발전하는 양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국문물과의 접촉과 교류가 말을 타고 멀리 나 다니는 기마대에 의해 활발하게
되고 배를 타고 대양을 누비고 다니는 해상활동의 뛰어난 인물들로 해서 삼국시대
의 경제는 활성화되었고 그에 수반되는 소비경제로 해서 해외의 여러 문물들이 도입
되었다. 그 결과 왕궁과 백성들 살림집에 이르기까지 그 윤기가 파급되어 지나치게
사치하지 못하도록 하는 건축법령을 제정하여 억제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 흐름이 난숙한 경지의 건축시대를 준비하면서 제2기 난숙기로 옮겨간다.


둘째. 제2기(爛熟期)

셋째. 제3기(熟成期)

네째. 제4기(激動期) ---미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