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壽의 나라(奈良)통신 6.

by 신영훈 posted Dec 2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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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에 일본에서 발행된 <건축잡지>라는 책을 보다가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 혼자 보기엔 미안한 생각이 들어 알고 계신 분들에게는 잠시 눈감아 주십사 하고, 모르는 우리끼리만 보도록 번역을 하여 보았다.

잡지가 발행된 시기가 일본이 세계각국으로 관심을 보내던 시기이고 또, 조선을 정벌하려고 국론을 모으던 시절이어서 조선에 대한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이 글을 번역해 실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일본인 편집자가 영어를 일본어로 옮긴 내용이라는 것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朝鮮은 發明國이다.

1900년에 런던에서 간행된 <評論의 評論>이란 잡지에 후레벨이라는 이가 <朝鮮은 세계의 발명국>이라는 제목 아래 글을 실었다. 그 글의 내용인즉 <同國의 금속활자판, 甲鐵船艦, 弔橋(현수교, 굵은 줄에 매달리게 하는 다리, 예 미국의 금문교), 砲爆烈彈(역자의 생각-진주성 싸움의 비격진천뢰를 의미하는 듯), 音韻的字母 등에 언급하면서 이들은 무엇이라 하든지 간에 세계적인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단지 音韻的字母만은 자기 국민들을 위한 것이다. 이들 발명품은 世界全班이나 自國에도 큰 이득을 영구적으로 줄 것이다. 이들과 같은 발명적 智力을 행동으로 옮겨 구체화시켰다는 점은 확실하게 자부하여도 좋을 만 하다고 할 수 있다"

고 하고는 하나씩 그 例證을 거론하면서 설명하였는데 그 중에 한 弔橋 설명은 대략 다음과 같다.


"弔橋라는 이름을 붙여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 그것은 1592년 임진강에 가설한 다리인데 급박한 상항에서 필요에 의하여 발명하여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충분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명나라 군대와 조선 군인들은 연합군을 조직하여 평양에서 쫓겨 한양으로 후퇴하는 왜군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었다. 연합군대가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다리가 없었다. 12만의 대군을 건너게 할 튼튼한 다리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 장수가 다리 놓기를 요구하였다. 어서 왜군을 추격해야 한다는 독촉이 자심하였다. 조선군대도 어서 건너가 왜군을 섬멸해야 한다는 생각이 골수에 사무쳐 있었다.

조선의 장수가 여러 사람을 징발하더니 사방으로 급히 파견하였다. 사방에 흩어졌던 그들은 길이가 100야드가 넘는 길이의 칡넝쿨을 다량으로 채집하여 운반하여 왔다. 그러더니 강바닥에 말뚝을 박기 시작하였고  8개의 말뚝이 박히자 말뚝과 수목에 칡으로 꼬은 줄을 작은 배를 타고 끌고 가면서 알맞게 걸고 그 한끝을 반대편 강가에 고정시켰다.

칡넝쿨로 꼬아 느린 두 줄기 끈 사이에 가는 나무를 가로질러 연잇고는 그 위에 흙을 얹고 작은 돌을 깔고 다져서 딛어도 빠지지 않게 되었다. 교량이 완성되자 시험하기 위하여 장수들이 다니며 점검하였고 능히 대군이 도강할 수 있을 만큼 완고하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연합군 12만명은 이 다리를 건너 추격을 맹렬히 할 수 있었다. 사람 뿐 만 아니라 군수 물자 까지도 다 건널 수 있었다. 완성된 다리 길이는 150야드로 세계에서 제일 긴 사장교, 조교가 이룩된 것이다. 그 조교는 이후 저절로 썩어서 없어지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발명의 왕국에 태어났으면 싶다. 朝鮮은 이렇게 중요한 발명의 탄생지라는 명예를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그는 설명을 끝내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관점은 어떠하였는지를 묻는 화두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이 글을 읽고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것에 너무 무신경한 편이나 아닌지 하는 자괴심도 우러나왔다.


2001년이 다 저물어 가는 그믐에 즈음하여 묵은세배를 들여 우리 서로를 칭찬하였으면 싶다. 내년에도 만사가 형통하는 좋은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인사를 드린다. 감사합니다.

일본 나라에서 木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