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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


때로 책을 읽다 보면 뜻밖의 자료와 만나게된다. 더구나 지금 남아 있는 유적에서 자취를 감춰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록과 만나면 몹시 반갑고 즐겁다.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옛 분이 살던 시절의 자취를 보았을 때의 감상을 적은 내용이라면 그것 또한 소중한 간접경험이요 우리들의 이해에 큰 보탬이 되는 기본자료가 된다.


1767년 가을에 관동지방과 경주를 두루 유람하고 기록한 박종(朴琮, 1735~1793)의 『동경유록(東京遊錄)』은 내게 퍽 유익한 자료이어서 자주 참고를 한다. 물론 지금의 인식과 다른 견해도 있지만 그것이 그 당시의 상식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점도 소중한 정보가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최철(崔喆)선생이 번역하고 편집해서 펴낸 『동국산수기(東國山水記)』(德文出版社, 1977년)에 실려 있는 그의 글을 읽고 있다.

「1767년(丁亥) 9월 25일 나는 李君 敏叔(訥)과 함께 경주 구경을 떠났다(함경북도 朱村 태생?).  삼도(三道-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27군 1.110리를 걸어서 동짓달 이튿날에 드디어 경주에 도착하니 이미 달이 세 번 바뀌었고 39일이 걸렸다.」로 시작되는 글이다.

(1).안변(安邊)의 학포(鶴浦) (2).통천(通川) 총석정(叢石亭) (3).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 (4).간성(杆城) 청간정(淸杆亭) (5).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 (6).강릉(江陵) 경포대(鏡浦臺) (7).삼척(三陟) 죽서루(竹西樓) (8).울진(蔚津) 망양정(望洋亭) (9)평해(平海) 월송정(月松亭)등의 경치 좋은 곳을 들러 경주에 당도한다.


안변의 학포는 우리에겐 생소한 고장이다. 광복 이전에 살던 분들은 몰라도 가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는 그의 글을 통하여서나 그런 곳이구나 하는 정도의 감을 잡을 수 있어 그의 글을 읽어본다. 고스란히 다 읽기는 좀 뭣하므로 적절히 빼 먹으며 읽어 간다.


「학포는 안변부에서 동쪽 40리에 있는데 종횡으로 10여리에 이른다. 삼면으로 산이 둘러 있고 동북면 만 조금 열리어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남족으로 평평한 땅이 학포의 腹部를 타고 들어가 불쑥 일어나며 자그만 산봉우리가 되었고 산의 서편에 작은 섬이 있는데 그 모습이 알처럼 생겼고 섬의 서편으로는 작은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솟아있는데 푸른 소나무로 덮였다.

학포 서편 5리부터는 모래가 샇여 봉우리가 된 것이 종횡으로, 혹은 서로 동으로 뻗었는데 모래 질은 곱고 가늘며 빛도 매우 희어서 보기만 하여도 그 밝음이 눈이 부신다. 바람이 불 때면 모래가루가 하늘에 날아 마치 연기와 같고, 바람이 자서 안정되면 모래 결이 비단 같은 무늬를 이루고 그사이 얕은 물이 고였으나 한 점 티끌도 없이 깨끗하다.

전차 학포에 가까우면 모래 빛은 더욱 밝으며, 모래가 싸인 봉우리들이 더욱 기묘한데 한 무리의 백로들이 모여서서 사람을 보고도 날라가지 않는다.

물빛은 푸른데 모래 빛은 희어서 새로 볕에 바랜 빨래와 같아 그 곱고 정한 모래판이 손상될까봐 걱정되어 함부로 걷기조차 면구스럽지만 바람이 따라와서 사람의 발자국을 곧 메운다. 나는 웃으면서 민숙에게"천하에 만약 신선이 있다면 곧 이곳이 그의 처소일 것이니 혹 이 세상에 우리의 발자국이 싫어서 메우는 것이 아닐까?" 했더니 민숙이 "신선의 유무는 고사하고 우리의 마음 바탕이 마땅히 모래처럼 맑고 깨끗해야만 다음에 구경하는데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해안 경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정보를 잘 기록해 두었다가 통일이 되면 가서 보고 신선과 수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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