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壽의 이야기사랑방 제 103화

by 신영훈 posted May 0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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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께서 景福宮을 重建하시던 시절의 實錄에 실린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高宗實錄>(원명:高宗太皇帝實錄, 1970년 探求堂 간행) 실록의 기록을 다 번역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각자가 읽기로 하고 참고할 수 있게 原文을 轉寫하였다.
이 작업은 이번에 한옥문화원에서 만들어 圖書出版 韓屋文化에서 간행한 <韓屋의 古宮> (세계도서전시회 출품작, 곧 불어판 出市예정, 영어판도 곧 제작할 단계에 있음)을 섭렵한 분들을 위하여 오늘의 경복궁을 중건하던 고종 때의 노력을 좀 더 심도 있게 탐구하실 수 있도록 하자는 배려에서 시작되었다.
경복궁은 아다 시피 고종께서 重建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침략자들에 의하여 훼철되어 제 모습을 다시 잃게 되고 말았고 광복이후로도 지금 민속박물관으로 쓰는 건물이나 고궁박물관 건물 등이 들어서면서 경복궁의 원 모습과 또 다른 形容이 되었다.

高宗時 景福宮 重建工役의 考察
고종 2년(1865년) 2월 9일에 大王大妃는 경복궁 중건할 일을 下敎하면서 內下錢 二萬兩을 내 놓는다.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경복궁 중건 사업은 이렇게 시작된다.

  ㅇ大王大妃敎曰 向者大臣 有政府重修之請 己蒙允下矣 此實許久未遑之事 而今
    欲修擧 則不宜草草重修而止者也 政本重地 中外具膽 而龍蛇以後 尙未營建
    聞其崇臺華礎 廢在田間 而今所欲修葺者 只不過堂上廳舍云 緬想熙朝盛會
    明良輔弼 登庸翶翔之日 寧不慨然而興感乎 噫輔相之重顧何如也 堂陛等威之別
    儀文節目之間 亦不無今不如古之歎 則論道經邦 統百僚而振綱維 豈可若是其
    苟艱乎 相國無坐衙之地 不可聞諸隣國 內下錢二萬兩 爲先出付度支 自大臣
    廳舍 以至舍人之中書堂 一新重建 悉復舊觀事分付 今此興作 或不無時絀擧嬴
    之疑 而予之苦心所在 大夫卿士 皆應諒知矣 豈不聞 周雖舊邦 其命維新之詩乎
    君子之居此府也 殫誠盡忠 訏謨平章 以匡輔我冲王 以鞏固我萬億年丕丕基
    予於是 厚有望焉                -하략-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는 호대한 공사가 마음에 부담이 되었는지 창건 때의 경복궁을 회상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중건할 것을 다시 하교한다. 4월 초이튿날 대왕대비의 하교 기록은 구구절절하며 새로 등극한 임금의 도량이 대단하니 이제 마침내 중건이 이루어질 만 하다고 찬탄도 한다.

ㅇ初二日 大王大妃敎曰 景福宮 卽我朝定鼎初首建之正衙也 規模之正大 位置之整     肅 仰見聖人心法 而政令施爲 無一不出於正 八域蒼生 咸蒙福佑 自此宮始焉 不幸     兵燹之後 迄未重建 久爲志士之嗟歎 今因政府之重修 每憶國朝盛時 民物之殷盛 明     良之登庸 益切欽誦羨慕之心 仍念翼廟代理之年 屢行舊闕 周審基址 慨然有重營之     志 而未卒焉 憲廟屢欲繼述志事 而又未及擧 嗚呼 若有待於今日矣 今我主上 自在     潛邸 亦嘗遊覽 而近日 每歎祖宗御此宮時 太平氣像何爲  而今不如古乎 此不但肯     堂肯構之聖意也 有以見度量之弘大 是惟生靈之福而無疆之基 實基於此 予心不勝慶    幸 重建此宮 以恢中興大業 不可不與諸大臣謀之 時原任大臣 明日賜饌後 留待

이 교시 이후로 대왕대비는 여러 방도로 대신들과 유대를 강화해 가며 중건의 차비를 차근차근 다져나간다. 결국 경복궁중건은 대왕대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이튿날인 初三日에 대왕대비는 原任大臣과 二品이상을 빈청에 모으고 회의를 한다. 대왕대비의 그 의지를 鄭元容 領府事가 중론을 대변하며 찬동하고 領敦領 金左根과 領議政 趙斗淳등은 그 경비의 호대함을 염려하니 이어 여러 대신들이 소신을 피력한다. 重建役事를 심중하게 논의하는 중신들의 충정을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창졸간에 호대한 공사비 마련의 어려움도 피력된다.
인용문이 좀 장황할지는 모르나 중대사를 논의하는 장면을 우리도 경청하면 당시 여러분들의 식견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4월 3일의 기록이다.

  ㅇ初三日敎曰時原任大臣入侍時 戶判同入侍 二品以上來會賓廳
  ㅇ召見時原任大臣戶曹判書 大王大妃曰 昨以景福宮重建事 有所命下矣 卿等聞之乎
  領府事鄭元容曰 景福宮重建 幾百年未遑之事也 列聖朝 聖念之攸在 而古昔名碩之論
  皆同然矣 今奉成命 大小臣民之常所祝願者也 凡作宮室 先有規度然後 可以經始矣     大王大妃曰 自朝家苟欲經紀 則豈有不成之理乎 在昔此闕臨御時 民物富庶 稱爲太平    盛代 主上爲民生 有此經紀之意矣 領敦寧金左根曰 昨下慈敎 辭旨懇摯 三百年未遑    之事 今若一新營建 則此舊邦新命也 執不攢祝 事極重大 財力又非倉卒所可辦 此爲    泄菀 領議政趙斗淳曰 景福宮重修時 出民與否 待廷議畢集裁稟矣 判敦寧李景在曰     今此重建舊闕 卽屢百年未遑而繼述之大者 但目下國計 雖未大役 尙患窘跲 將何以措    辦哉 苟欲生財 財出於民 勢將收斂 而節約方便之道 惟在有司之臣措處之如何也 判    府事李裕元曰 舊闕營建 庶民必當子來 而至於物財 則有司之臣 可以措劃 臣無他見    矣

막중한 공사비도 문제지만 民力을 동원한다는 일도 여러 가지 염려스러운바가 많아 여러 대신들이 이 문제도 논의 한다.

  左議政金炳學曰 舊闕重建 景命維新之會也 不勝忭祝之忱 而凡國有大役 必用民       力 是所謂子趨父事也 至於財用 則有司之臣 當次第區劃 臣無他見也 戶曹判書李敦    榮曰 景福宮重建 久有朝廷之議 而今奉慈敎 孰不攢誦 若其民力舒困 財力瀛絀 自有    廟堂措劃 臣則惟當仰成矣 斗淳曰 請令政官開政 差出營建都監堂 郞 允之 大王大妃    曰 今此重建 專爲百姓之計 而豈可先費民力乎 元容曰 古制 歲用民力三日 如此國役
  民豈不出力乎 羣情胥悅 則自忘其勞矣 臣意則財用 猶屬第二也 役民勞民之際 在任    事者 察民情而軫民勢 隨事紓力 則爲好矣 斗淳曰 國之大役 民之赴役 卽左相所奏     子趨父事之義也 凡於國役用民之力 亦多己例矣 大王大妃曰 然則但用民力乎 斗淳曰    非但庶民而己 上自卿宰 下至庶民 當擧皆出力矣

대왕대비는 이 논의를 결론지으면서 그런 막중한 일은 興宣大院君에게 반드시 감독하게 하는 일이 옳겠다고 결론을 내리니 조두순은 당연한 분부라고 찬성한다.

  大王大妃曰 如此莫大之事 以予精力 有所不逮故 都委於大院君矣 每事 必講定爲之    也 斗淳曰 當依下敎爲之矣

그리고는 곧 營建都監을 조직한다. 대왕대비는 領議政 趙斗淳과 左議政 金炳學 두 사람을 都提調로 삼는다. 두 정승을 도제조로 삼는 예는 드문 일이므로 이 重建役이 얼마나 심중한 가를 단적으로 표상한 한 모습이라고 할만 하다. 도제조 이하 提調로 차하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ㅇ敎曰營建都監都提調 以領議政趙斗淳 左議政金炳學爲之 提調 以興寅君最應 左贊    成金炳冀 判府事金炳國 兼戶曹判書李敦榮 大護軍朴珪壽 宗正卿李載元差下 大司成    李載冕 副護軍趙寧夏 趙成夏 副提調差下 ㅇ又敎曰 訓練大將任泰瑛 禁衛大將李景    夏 御營大將許棨 總戎使李顯稷 右邊捕盜大將李周喆 營建都監提調加差下

이제 공사가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먼저 고유제를 지내자는 발의가 있자 조대비는 윤허한다. 고유제는 예조에서 맡아 거행하기로 되었다.

  ㅇ初四日 議政府啓 舊闕營建當有告由之擧 廟社山川告由祭 擇日設行事 知委禮曹何    如 允之

공사 시작하는 날을 4월13일로 정하면 어떠냐고 아뢰고 윤허를 얻는다. 이제 본격적인 공역이 시작 되었다.

  ㅇ初五日 營建都監啓 景福宮重建日子 今月十三日巽時推擇 以此日時始役何如 允之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오랜 세월 방치되어 오는 중에 무너진 궁성자리나 그 가깝게 집을 짓고 사는 백성들이 있었다. 高宗이 친히 경복궁의 터전을 親審하는 중에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책의  마련이 있어야 하였다.

자칫 민주주의 시대도 아닌 그 시절에 무슨 배려를 하였겠느냐고 의아해 하는 이들을 만나는데 오히려 그 시절에 더 세심한 배려가 자상하였다.

  ㅇ十二日 詣景福宮 親審殿基 召見時原任大臣 都監堂上  -중략-  宮牆外 聞多小
    民之構屋以居者 將何以處之乎 元容曰 勢將撤移矣 敎曰 民情可矜 如有分數給
    錢則何如乎 元容曰 宮牆近處構屋 禁法也 宮殿始役之時 自當毁撤 何可別有恩施
    乎 領敦寧金左根曰 城底民家 雖是法外 而聖敎如是 依前例給之果好矣 -하략-

여러 사람의 의견이 있었지만 대비의 뜻에 따라 철거민들에게 給錢하여 막막함을 덜어주도록 결정한다. 법을 어겼으니 철거해도 좋다는 강경론을 피력하는 신하도 있었으나 대비는 衆論이 자기 의사를 따르도록 유도한다.
막상 철거가 본격화 되는 시기가 되자 철거민들은 당장에 갈 곳이 마땅하지 못하여 곤욕을 치른다. 이 소식을 듣자 대비는 한성부에 분부하여 西宮의 含春苑 담장 밖의 터를 나누어주어 집을 옮겨 짓고 살 수 있도록 마련해 준다.

    ㅇ(四月) 二十日 敎曰 景福宮宮牆之下 民戶撤毁 事勢固然 而其失所棲遑之狀
            聞甚可矜 許令西宮之含春苑內牆外 使之奠接事 分付漢城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자 자원하는 赴役군들이 몰려든다. 대비는 이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선전관을 파견하여 일일이 애쓴다는 말을 전하게 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 준다. 4월 16일자의 기록은 이렇다.

    敎曰 坊民之自願赴役 日以益多 聞甚嘉尙 發遣宣傳官 一一勞問 示意之擧 自營建      都監 量宜分給

이렇게 부역군들이 자발적으로 다량 몰려드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서이니 이는 곧 민심이 천심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ㅇ(四月)二十五日 詣景福宮 召見時原任大臣都監堂上 敎曰 京鄕衆民 自願赴役       其集如雲矣 領府事鄭元容曰 此闕工役 民情所祝願故 樂爲之赴役 古所謂庶民子來      民忘其勞者也 民心卽天心也

열성적인 부역군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대왕대비는 또 걱정이 앞선다. 그러다가 혹시 농사철을 잃으면 어쩌느냐는 걱정이라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단속하라는 지시를 한다. 趙大妃라는 분의 자상함이 지극하여 공사기간 내내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ㅇ大王大妃敎曰 使民務農 乃王政之大者也 迨此時役民 則必致失農之患故
       以各歸務農之意 向有所飭諭 -하략-

대왕대비는 공사에 진력하고 있는 工匠과 役夫들의 노고에도 마음을 쓰면서 혹시 병든 사람이 있으면 좋은 약재를 넉넉히 마련하였다가 잘 치료해 줄 것을 당부한다. 역시 자상한 마음의 발로이다.

     ㅇ大王大妃敎曰 漸當極熟 工匠役夫之課日勞力者 不能無生病之慮 而近來藥材
     苟非陳舊 則太半品劣 便是有名無實矣 今番則自營建都監 嚴飭兩醫司 使之豫
     備眞材 圖所救療之方

景福宮의 重建공사는 宮城부터 쌓기 시작하는데 이 공사는 4월 28일에 시작하여 6월 20일에 끝을 낸다.
6월 20일 부터는 交泰殿 짓는 일을 시작해서 10월 9일에 상량한다. 어째서 임금님 침전인 康寧殿을 제쳐두고 왕비 침전인 교태전부터 짓기 시작하였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기 어렵다.
이보다 앞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 일터에서 銅器 한 점이 출토하였는데 그릇에 詩가 새겨져 있고 壽進寶酌 이라 쓰기도 하였는데 다분히 興宣大院君과 연관 된 듯한 기미가 짙은 글귀여서 참석자 들은 다 놀라워하였고 이 사실을 朝報에 실어 널리 알리게 하였다.

   ㅇ(五月)初四日勸講訖 命內侍 出示具蓋銅器一坐 敎曰 此是石瓊樓下所出者也
   見甚慶忭 其在孝理 不可無識喜 內閣提學 與今日入侍講官玉堂以下撰銘以入 承旨
   金泰郁跪受器 啓蓋視之 則中有螺酌一坐 蓋中環書 有詩曰 華山道士䄂中寶 獻壽
   東方國太公 靑牛一迴白巳節 開封人是玉泉翁 當中 有壽進寶酌四字 諸臣以次奉
   玩訖 講官朴珪壽曰 事不偶然 謹當退與內閣提學 作銘以獻 而審其詩意 似是獻壽
   於大院君 以太公比擬 而大院君 殿下之私親也 唐宋人語 以國家之尊屬 謂之國太
   公 此詩語 恐是獻壽於國太公之謂也 敎曰 今日筵說 頒諸朝紙可也  

공역이 한 참 방창한 중에 숙련된 일군들 손이 모자라게 되었다. 일반인들은 구하기 어려우므로 승려들 중에 기능이 있는 이들을 팔도에서 초모하여 일을 하도록 하자는 영건도감의 품의를 조대비는 윤허한다.

   ㅇ(五月十二日)營建都監啓 今於營建之役 匠數不敷 木石治鍊 萬無及期之道  僧
   徒中 以匠手爲業者 使之募合修成冊上送 限竣事間 赴役之意 星火行會於八道四
   郡何如 允之

왜 그랬는지의 설명 없이 閏五月 그믐날 東寧尉 金賢根, 南寧尉 尹宜善, 直提學 李承輔를 營建都監 提調에 加差下하고 檢校待敎 鄭範朝와 左承旨 宋熙正을 副提調에 역시 加差下한다. 이제 그만큼 공역이 본격화 되었다는 증좌일 수도 있다.
6월에 들어서면서 대왕대비는 장마철을 고려하고 공사를 정지시킬 일을 지시하고 동원되어 일을 하다 병을 얻은 백성들을 위문하도록 한다.

   ㅇ(六月)初四日 大王大妃敎曰 亢旱之餘營 雖得一霈 近日陰濕頗緊 此時營建
   之役 迫於事勢 縱不得停止 工匠及赴役之民 易致生病 發遣堂上宣傳官勞問

경복궁 중건에 소용되는 목재가 호대한 중에 그 목재공급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남과 호서지방의 병영과 수영에서도 배로 실어 한양으로 보낸다. 우리는 흔히 강원도에서 벌목한 재목을 뗏목으로 옮겨다 사용하였으려니 생각하기 쉬우나 남쪽지방 島嶼에서의 공급은 창덕궁 인정전 중건 때에도 있었던 일이다.

  ㅇ(九月 初五日)議政府啓 連見統制使 全羅左水使謄報封山樹木之折拔 公私船隻
之破傷 不紀其數 水無舟楫漕轉貿遷 其將阻塞 左水營所屬邑鎭風落木 旣承判付
付之營建都監 而外此兩南湖西被傷之木 使監 兵 水營 出給船業者 量其船隻大小
照數烙給 請及時裝造 允之

대왕대비는 공사가 진첩되면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자 전각마다의 扁額할 일에  대비한다. 태조 창건 때 鄭道傳이 殿閣의 이름을 지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정도전의 그 해박한 식견과 노고에 새삼 감탄을 하고 그의 勳爵을 되돌리고 시호를 내리고 그의 후손을 健元陵의 참봉으로 삼으라고 하명한다. 이제 重建役事가 그만큼 진첩된 것이다.

  ㅇ(五月初十日)大王大妃敎曰 法宮殿閣 次第經始矣 永念鄭道傳定名頌祝之辭
  千載之盛 不覺曠感 且國師無學之當時勤勞 屢見於國史野乘 而雖欲示意 無處
  可施矣 奉化伯鄭道傳 特爲復勳贈諡 其祀孫 令該曹 問名 健元陵參奉擬入

9월17일에 완성된 각전각과 문에 걸 현판에 글씨 쓸 書寫官들을 지명한다. 다음과 같다.

  ㅇ(九月十七日)營建都監 以景福宮各殿堂 各門懸板書寫官
    *交泰殿   曺錫元    *康寧殿   李載冕    
    *延生殿   李載元    *慶成殿   趙成夏
    *含元殿   趙寧夏    *麟趾堂   李周喆
    *千秋殿   鄭範朝    *萬春殿   宋熙正
    *光化門   任泰瑛    *建春門   李景夏
    *迎秋門   許  棨    *神武門   李顯稷

사실은 懸板을 걸기 이전에 上樑을 해야 하는 것이 工程이므로 上樑文 製述官과 書寫官들이 差下되었을 것이나 이에 대한 기록은 집중되어 있지 않다. 실록에는 3년 10월 9일에 상량문 제술관을 차하하고 12월 9일에 書寫官을 차하한다.

  ㅇ(高宗 三年 十月初九日) 營建都監이 아뢴다.
  *勤政殿上樑文製述官   趙斗淳      *思政殿上樑文製述官  金炳學
  *慶會樓上樑文製述官   柳厚祚      *勤政門上樑文製述官  金炳冀
  *弘禮門上樑文製述官   金炳國

  ㅇ(高宗 三年 十二月初九日) 營建都監이 아뢴다.
  *勤政殿上樑文書寫官   金炳德      *思政殿上樑文書寫官  洪祐吉
  *勤政門               李敦相      *弘禮門              李承五

상량문 서사관과 아울러 현판 서사관도 함께 차하된다. 이는 지난번에 누락 되었던 전각의 편액을 쓰도록 보완한 조치이다.

  *勤政殿  李興敏   *思政殿  曺錫雨   *勤政門  申錫禧   *弘禮門 金世均

이어서 4년 3월 27일에 경회루의 상량문 서사관과 현판 서사관을 또 추가한다.

ㅇ(高宗 四年 三月二十七日)命慶會樓上樑文書寫官 鄭基世 懸板書寫官 申觀浩差下  

지금 편액은 잔존하는 전각에서 일부 볼 수 있으나 상량문은 전혀 알 길이 없는 중에 1926년 9월 1일에 光化門을 옮기기 위하여 해체하는 중에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공사를 주관한 內務局景福宮建築出張所에서 출현한 上樑文의 全文은 다음과 같은데 저들이 옮기면서 한 글자도 잘못 읽은 것이 없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
실록에는 현판을 쓴 이는 밝혀져 있으나 상량문 제술관과 서사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었던 터라 아주 귀중한 자료가 출현한 것이다.

光化門 上樑文
伏以若作室□堂 拊丕基而圖永 迺立門有伉 旋化樞而嚮明 于時也天閶上開 其方則帝車南指 顧玆法宮聽政之所 奧自神京定都之初 背嵩面河 王業奠中黃之宅 體國經野 宸居近上紫之垣 猗殿宇正位辨方 而楣扁額各思義 禹勤堯思 敷盛德於春生秋成 義泰箕康 迓景祿於日升日恒 寶扆御陽之位 金門闢正南之維 瑤躔候極宿之祥 昇平有象 璿籙兆亭午之運 文明出治 比若前代之承光宣光 四方之所共仰
  有如兩闕之敦化興化 百僚之所必趨 自中古未遑重修 在聖朝思述先志
恭惟 主上殿下升聞 潛邸 泰運興邦 承 文考之顯謨 在厥初呼哲命吉 奉 大母之懿訓 率由章不愆不忘 仁孝英明之□彰令聞 八域咸頌 政敎施措之動合盛典 百度鼎新 爰攷玉帶之舊圖 載營華蓋之重構 肆 宸衷之先定 又廷議之僉同 家國共休 願乎上者願乎下者 朝野相慶 咸曰一哉咸曰大哉 縱軫毋奪民時 擧皆如趨父事 非謂公儲私蓄 有裕於昔年 抑以地利人和 若待乎今日 司徒按考工之記 太史占定中之星 鼛鼓弗勝 梓材惟丹雘 垣墉惟塗墍 棟宇協吉 體象乎天地 經緯乎陰陽 一礙一砌之無改前規 寓精義於法祖 中侈不陋之皆合中道 垂遠圖於裕 昆 迨輪興之奏新工 迺根闑之仿古制 漢建章之千門萬戶 豈取觀美而壯居 周明堂之右个左扉 亶爲懸瀍而布令 碧瓦鱗動 負神武而將將 畵檐翼齊 對冠嶽而屹屹 揭舊號於寶額 銀鉤重新 護佳氣於丹闈 金鑰增固 週帀如彩虹飮月之狀 盤紆若赤螭捧日之形 玉凧朝儀 排雙扇而蹌濟 靑繩御路 方二軌二坦平 鳥臺風生 宛是城上所舊址 黃閣地近 依然門下省遺撫 軒豁之政如我心 閌閬乎無遠天室 閽人□□ 沈沈高閣漏聲 閤吏引班 蒼蒼禁城曉色 臨朱鳥而正晷景 聳金爵而凌雲霄 被四著明峻之功 一家氣像 成萬推存神之妙 入荒庭衢 敢頌川至之休 庸助霞擧之役
兒郞偉抛樑東 駱峰初日照新宮 林葱匝域含生類 自在吾王大化中
兒郞偉抛樑西 煌煌奎璧耀金題 喜聽門卒平安報 鞍峴烽光夜夜低
兒郞偉抛樑南 漢水環之碧於藍 郡國舟車都會地 恩波洋溢頌遐覃
兒郞偉抛樑北 毋嶽參天瞻峻極 援斗爲巵躋彼堂 聖人請祝於千億
兒郞偉抛樑上 對越天心迓景貺 筳臣退食每遲遲 日昃猶勤治道訪  
兒郞偉抛樑下 大庇群生居廣廈 臨殿時聞擊壤聲 黃雲處處滿田野
伏願上樑之後 日月光華之無私照 雨露化育之所均霑 闢之乾闔之坤
宣闓澤於家家戶戶 人爲關義鍵 納景祥於子子孫孫 建不拔洪基
措諸泰山盤石 開太平萬世 躋之壽域春臺

大匡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臣李裕元奉敎謹撰
資憲大夫行龍驤衛大護軍兼知經筵事  臣申錫禧奉敎謹書
同治四年(高宗 2년, 1865년)乙丑十月十一日戌時

멋진 문장에서 당시 문화인의 긍지를 읽을 수 있는데 말미에 가가호호의 백성들이 다 태평만세하기를 기원한 애틋한 마음이 담겼다. 우리는 절절한 감명을 받는다. 그러니 만일 상량문만 다 모았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문학작품의 총화가 되었을 것이니 경복궁 중건을 통한 또 하나의 문화업적이 이렇게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을 다 볼 수 없다는 점은 매우 불행한 일이나 혹시 후손들 중에 草稿를 보존하고 계신 분들이 있어 공개하여 취합할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 될 것이다.
너무 문장이 긴 것 같아서 다음에 계속하기로 하고 이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