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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부속시설


부엌살림 및 화덕


부엌의 화덕은 구들의 발생과 함께 생겨나서 난방과 취사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화덕은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화덕의 모양은 조선시대 서민의 주택에서도 나타난다. 화덕이 구들과 연결되어 난방과 취사를 겸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남쪽 지방에서는 취사와 난방을 분리한 아궁이가 있다.

제주도 살림집에서는 취사용 구들을 부엌 외벽쪽에 따로 마련한다. 고구려의 독립된 화덕과 같은 유의 화덕이라고 보여진다.

조선시대의 일반서민들은 화덕이 구들과 붙으면서 난방과 취사를 겸하게 했다. 그러므로 화덕은 크게 독립된 화덕과 구들과 붙어있는 화덕이 있다.

부엌에는 방에서 튀어나온 다락이 있고 조리를하는 부뚜막이 있다. 그릇을 넣을 수 있는 찬장이나 찬방이 따로 마련되기도 한다. 한쪽에는 물항아리가 있다. 부엌옆에는 따로 곡식간이 마련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부엌은 신성시되어 조앙신을 모시는 시설을 하기도 한다.

부엌에서 발생된 연기의 그을음은 목재표면을 검게 감싸지만 표면의 탄소로 인해 목재에 해충이 침입하는 것을 막을 뿐만아니라 썩는 것도 방지해 준다.



굴뚝



온돌을 난방으로 하는 한옥에서 굴뚝의 설치는 필수적이다. 초기의 움집에서는 지붕의 꼭대기를 열어 놓은 정도로 굴뚝을 대신 했다. 이러한 유형이 조선시대 말까지도 산간의 민가에서는 사용되었는데 까치구멍집이 그와같은 유형이다.

굴뚝에서 연기를 잘 빨아줘야 아궁이에서 불이 잘들어간다. 구조가 잘못되 연기가 안빠져 나가면 아궁이에서 불도 잘 타지않고 거꾸로 연기가 나온다. 연기의 역류를 방지해주기 위해서 굴뚝에는 개자리를 설치해 준다.

굴뚝은 자연조건에 따라서 높낮이의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북쪽지역의 경우에는 굴뚝의 위치도 아궁이 반대편인 건물 뒤 또는 옆에 설치하고 굴뚝의 높이도 높은 편이다. 중부지방으로 내려오면 굴뚝이 점점 낮아지며 남쪽의 경우에는 굴뚝이 화방담이나 건물 기단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제주도에서는 아예 굴뚝이 없다.

기왕에 만드는 굴뚝에 멋을 부려서 여러가지 모양의 굴뚝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재료도 다양하다.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내서 연통으로 사용하는 굴뚝이 있고 굴피나무 껍질로 만든 굴뚝도 있다. 오지를 여러개 연결하여 쌓은 굴뚝, 돌로 만든 굴뚝,벽돌로 모양을 내면서 쌓은 굴뚝,기와편을 이용해 쌓은 굴뚝,흙으로 만든 굴뚝,기단 한쪽에 구멍만 낸 굴뚝 등 다양하다. 굴뚝 주변으로 이엉을 두껍게 돌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보온을 해서 굴이 잘 내도록 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굴뚝에는 장식도 많이 베풀어지는데 경복궁 자경전 꿀뚝과 같이 십장생 문양으로 장식한 고급스런 굴뚝도 있다. 굴뚝 위에는 연가라는 집모양의 장식을 올려 연기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장독대


우리의 자연환경은 잘 썩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음식을 보관할 때도 발효시키는 방법이 가장 좋았다. 그런만큼 젖갈류를 비롯한 발효음식이 매우 잘 발달되었다. 고추장,된장,간장,김치,젖갈류 등을 보관할 장독대는 실생활과 어울려 중요한 요소이다.

발효음식은 햇빛이 잘들고 통풍이 잘되는 양지바른 곳에 두기 마련이다. 통풍을 위해서 장독대는 지표에서 일정한 높이로 시설된다. 장독 하나하나에도 돌로 동아리를 해서 받치기도 한다.

장독은 조리를 하는 부엌이나 우물과도 가까워야하기 때문에 대부분 반빗간 뒤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안채로 반빗간이 합쳐짐에 따라서 안채 부엌과 가까운 곳에 장독을 설치한다. 주로 안채의 후원이나 옆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부엌 앞마당에 두는 경우도 있다.

장독대의 모양과 장독의 배치도 여러가지여서 생활의 지혜와 멋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낮은 담장을 쳐서 일곽을 형성하기도 하고 샛문을 다는 경우도 있다. 또 장독에는 찬광과 연결되어 여러 부식물을 보관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공간이 있고 항아리을 둔다.

장독은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정한수를 떠 놓고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독은 정신적인 공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물


명당의 물은 지표상의 명당수와 지하를 흐르는 수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살림집에서는 지표의 물도 중요하지만 우물을 통해 얻어지는 지하수맥도 중히 여겼다. 우물은 삼국시대 이미 집집에 있었다. 굴착하는 도구와 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우물을 보면 지표위로 우물틀을 설치하고 있다. '井'자형으로 방틀을 짜고 물을 들어 올리는 도루레를 설치하는 등의 과학성을 보이고 있다. 우물가에 커다란 물독들과 자배기,항아리 그리고 통나무로 만든 구유통이 있고 그 옆에는 작업하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이 있다.

우물 옆에는 물확과 연결 수조가 있어서 부엌이나 방앗간에 물길이 닿도록 하기도 한다.

삼국시대 신라의 김유신장군댁에도 이런 우물이 있었다. 이 전설적인 우물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재매정(財買井)'이라고 불리고 있다. 경주시내에는 이밖에도 많은 우물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분황사에 있다. 지금도 관광객에게 시원한 물을 제공한다.

우물은 사람의 혈맥과 같아서 대단히 중요시 여겼으며 치장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우물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나타나고 있다. 생활과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시 되어왔을 것이다.

우물은 물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냉장고의 역할을 한다. 빙고가 시설되지 않는 일반민가에서는 여름에 과일이나 음식을 우물에 끈을 매 보관했다가 먹는다. 어느 곳에서는 우물 옆에 샘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루각건물을 지은 다음 남쪽은 사창으로 하고 나머지 3면은 판벽으로 막아 음식을 보관하기도 한다.



뒷간


배설은 먹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하루를 걸러도 어렵고,때를 지체해도 어렵다. 얼른 해결해야 가뿐해 진다. 배설은 인간에게 요긴한 것이었다. 신라 때도 마찬가지 였다. 불국사에 신라인들이 사용하던 매화틀과 부춧돌들이 남아 있다.

매화틀은 요즘과 같은 수세식은 변소로 생각하면 쉽다. 궁궐내에서도 이러한 화장실이 사용되었을 것인데 용변을 본후 밑에서 바로 받아낼 수 있도록 한 것 이다.

지방에서는 잿간에 변소를 마련하는 경우가 있다. 부춧돌 두 개를 놓고 한쪽 벽에는 주걱처럼 생긴 부삽이나 고무레 놓여 있다. 뒷쪽에 재를 용변을 보기전에 일정양 부춧돌 사이에 끌어다 놓는다. 그리고 용변을 본 후에는 주걱을 이용하여 재에 말아 한쪽에 치워뒀다가 거름으로 이용한다. 재는 탈취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요즘의 수세식 보다도 냄새가 안난다. 또 거름으로 활용하니 일석이조다. 화장실을 잿간 위에 높게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떨어지는 가속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재로 감싸진다.

제주도에서 '통시'라고 하는 유형은 뒷간이 돼지울간 위에 마련된다. 일을 보면 돼지가 달려들어 깨끗이 치워준다. 화장실을 지면으로부터 높게 설치하는 것은 오랜역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화장실은 정착과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동생활에서는 이동식 화장실인 요강이나 매화틀이 사용되었다. 또 특별한 화장실의 시설없이 노천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것은 현재 서역의 이동식 몽고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생활습속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역사 이래로 발달된 많은 화장실을 갖고 있는 것이 또한 한옥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안채 뒤쪽에는 여인들이 이용하는 후원공간이 마련된다. 여기에는 여인들이 뒷물을 할 수 있는 북수간(北水間)이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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