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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실에서의 일이 조금 한가해지자 다시 안내서를 들고 앉는다. 읽다 만 글을 이어 읽는다.

<상 이집트(계곡)와 하 이집트(델타), 그 '두 국가'의 상징적인 통일은 왕권에 대한 이집트식 사고의 중심이 되었다. '파라오'라고 알려지고, 큰 집이라는 뜻인 국왕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는 태양의 신 '라'의 아들이자, 매의 신 '호루스'의 의인화된 모습이며, 죽고나면 지하의 대왕인 '오시리스'로 간주되었다. 이집트를 통일한, 이집트를 수호하는 전통적인 왕의 개념을 묘사한 거대한 왕의 상이나 조각이 세워진 신전은 왕권을 위한 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신전의 벽에 왕들의 이름을 새긴 긴 명단은 정치적인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즉, 평판이 좋지 못한 왕과 모든 여성지배자들의 이름은 공적인 기록에서 간단하게 제거되었다.

기원전 250년 마네토라는 승려가 처음으로 30대 왕조 혹은 지배층의 명단을 작성하기 전에, 이집트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역사기록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후의 역사가들이 그 명단을 정리해, 전쟁과 정치적 분열로 특징지어지는 '중간시대'와 구별해서,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왕국들'로 규정하였다.


궁중 예술에서 전퉁적 상징들이 계속 사용됨으로써 역사가 연속적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사실 이집트의 문화적 정치적 노선은 빈번히 바뀌었다. 그것은 각기 다른 지역으로부터 유래하는 왕조가 정권을 잡을 때마다 행정수도가 자주 바뀌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빈번한 정권교체는 자주 북부와 남부사이의 묵은 정쟁관계를 반영하였다. 남부 이집트에 있는 테베는 중/신왕국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지위를 고수하였지만, 결국은 타니스를 비롯한 여러 델타 도시들에게 그 지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집트도 평온한 역사가 아니었음을 알겠다. 우리의 경우도 전쟁이 있으므로 해서 오히려 각종의 분야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었다. 이집트도 결국 그런 흐름의 역사를 지녔어서 오늘에 보는 바와 같은 다양성이 배태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1월에 나도 이집트에 가서 여러 유물을 보고 다녔었다. 박물관에 옮길 수 없는 거대한 건축물들을 차례로 볼 수 있었는데 그들 벽면에 칼로 새김질한 그림과 함께 상형문자들이 있었다. 나는 아직 읽을 수 없지만 이런 기록이 있다는 사실에 압도되었다. 놀라운 인류의 기록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설명:아비도스의 라메세스--- 2세 신전에 있던 왕의 명단 일부. 신왕국, 기원전 1250년경, '카타치'라고 불리는 타원형 장식 테두리 속에 라메스 왕과 그 이전 왕들의 이름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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