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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란서에서 7월 25일에 귀국하였다.
아름다운 집이 완성되었다. 문과 담장까지를 구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동행하여 함께 일한친구들이 글을 서서 알리기로 하였다.
귀국해 보니 백두산 이야기가 들린다. 백두산에 가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다. 전에 중국쪽으로 올라가는 기회가 없지 않았으나 우리나라 삼수갑산을 거쳐 올라가고 싶어 그 시절의 행각을 포기하였었는데 이제 제 행로를 따라 올라갈 수 있게 되려나 보다. 전에 朴琮 그 어른께서 鐺州集에 쓰신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英祖 甲申年(1764)에 산행을 하신 이야기를 서술한 것인데 5월 14일부터 말일에 이르기까지의 行路이야기이다.
白頭山登程記는 꽤 여러 편 있는 줄로 알고 있는데 이 글은 그날 그날의 행보를 소상하게 기록하여서 앞으로 백두산에 간다면 꼭 한 번 다시 읽고 갔으면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중에 마침 崔喆선생이 編譯한 <東國山水記>에 ‘白頭山游錄’이 실려 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같은 책에 朴琮선생님이 쓰신 ‘東京 游錄’도 실려 있어서 경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바 있는 木壽로서는 당연히 읽어야 하는 글이어서 열심히 拜讀하였다.
이런 글들을 읽다보면 나는 미쳐 보지 못하거나 느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기록도 있어서 아차 싶을 때가 있다. 찬찬히 보고 깊이 살피고 다녀야 후회 없이 보며 살필 수 있을 터인데 하는 회한이 서리기도 한다. 朴선생님의 15일자의 기록이다.

어제는 말을 탔으나 딸린 사람이 없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말잡이를 구하였다.....-중략-
수창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趙첨지 廷來도 동행하기로 하였는데 高姓인 모씨가 와서     하는 말이 자기는 진즉부터 백두산 길을 잘 알고 있다면서 길이 三池를 지나면서 부터는    매우 험하여 가기가 어려운데다가 지금은 여름철이 아직 일러 얼음과 눈이 채 녹지 않았    을 것이니 가면서 넘어지고 미끄러질 염려가 있어 큰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니 돌아가 기다   렸다가 초가을에 가니 만 못하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일행들은 갈 길을 염려하는 기색  이 완연하다.
오후에 먼저 떠나 5리쯤 갔을 때 관원들이 나와 앞장을 섰다. 한 20리쯤 갔을 때 문득     보니 城主의 말이 보이는데 하인들은 나무 그늘에서 잠들었고 눈을 들어보니 城主는 시냇   가에 홀로 무심히 앉아 있다. 앞으로 가 인사하니 기다렸다고 하면서 앞장을 선다.-중략-
해가 질 무렵에 富寧에 당도하니 이날 걸은 길이 100리나 되었다. 이른 아침에는 날씨가   화창하다가 차츰 흐려지면서 산봉우리 아래로 구름이 끼더니 늦은 때에 이르러 뇌성벽력    에 비가 내리더니 다시 개었다.
富寧城主가 말하기를 茂山지방 사람들은 지금 運漕로 바쁜 처지라 동원시켜 길을 닦게 하   는 일은 매우 어려운데 길을 닦지 않고는 반드시 낭패를 당할 터이니 여기에서 돌아가는    것이 만전을 기하는 일이라 한다. 이 읍에 사는 급창을 지낸 사람이 전에 백두산에 올라가 본 적이 있다고 해서 불러다 물어보니 무산에서 산 밑까지는 대략 370리인데 어떤 곳은 물이 깊고 어떤 곳은 진창이니 길을 닦지 않고는 가기 어렵다고 한다. 다시 고을의 장교와 이노들에게도 물었는데 대답은 한결 같이 대답이 같다. 城主는 나를 보면서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茂山 백성들은 지금 運漕로 머리에 이고 등에 진 사람들이 도로에 연달아 있으니 그 고을 원이 객을 위해 길을 닦는데 동원할 수 없을 것이고 혹시 원이 백성들의 고생을 돌보지 않고 동원한다면 객인 우리들 또한 마음이 편할 리 있겠소이까? 듣기에 鍾城 城主 趙榮順이 辛巳年 가을에 백두산 유람을 떠나 茂山까지 왔다가 미쳐 길을 닦지 못해 그대로 되돌아갔다가 이듬해 미리 길을 닦게 하고서 바로소 백두산에 갔다고 합디다. 趙公의 山水를 좋아하는 性癖으로도 처음에는 길을 닦지 않아 그냥 돌아간바 있었으니 함부로 갈 수 없다는 말도 사실이지요. 실정이 이러니 자기 고집만을 부리면 이는 山水에만 유혹되어 분별 없는 걸음을 한다는 조롱을 면할 길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즉 곧 태도를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富寧 城主는 비로소 여기에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茂山城主에게 서신도 보내고 본부로 통지도 하기로 한 연후에 어두워 숙소에 돌아와 잠을 잤다.
16일 아침 일찍 일어났다. 읍의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白頭山과 虛項嶺 사이의 산천 형세와 도로 사정을 물으며 자세히 알아 보았다. 더러 말하기를 허황의 길이 甲山과 직통되어 상인들 내왕이 많으므로 깊은 겨울눈이 많이 쌓였어도 길이 막히지 않으며 허황에서 꺾이어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고작 50리이니 비록 길은 좀 허전하지만 막히거나 험악하지는 않은 편이어서 鍾城郡守 趙公이 산에 가면서 교자를 타고 정상에 까지 올라갔다 왔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어제 돌아가기로 한 까닭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기 어렵다는 것이니 백성들의 수고를 끼치지 않는다면 중도에 고만 둘 일이 아니다. 나는 마침내 城主에게 고하였다.
“대체로 산길은 좋을리 없지만 사람들이 가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좀 과장된 듯 하오니 다 믿기는 어렵습니다. 또 가기 힘든 곳을 가지 않고서야 어찌 좋은 구경을 하였다고 할 수 있겠나이까” 하였더니 성주는 급창을 불러 다시 묻는다. 그제서야 급창은 상인들이 더러 말을 타고 내왕한다고 실토하고는 “그러나 官行은 상인과 다르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상인들이 부리는 말은 갈 수 있는데 官家의 말은 갈 수 없느냐고 城主가 추궁하니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 때 옆에 있던 富寧군수가 또다시 못 간다고 말하니 성주는 앞으로 茂山까지가서 그 실정을 알아본 뒤에 거취를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나는 대답하기를 “城主께서 茂山에 가서 알아보고 결정하자 하나 무산 사람들은 그 곤란함을 열배는 더 늘여 과장하리라 여겨지니 오늘 가는 일은 唐나라 憲宗의 伐蔡故事와 같을 것이니 스스로 영단을 내려야 될 것 같습니다.  길가에 집 짓는 이가 남의 말 듣다가는 삼년이 지나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고 말하니 성주는 앞장서서 길을 떠난다.
부령군수는 만류하다 못해 냉연하게 돌아보며 “무산이나 잘 보고 돌아오라”고 한다. 그는 우리들이 무산가지 갔다가는 다시 돌아올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탄 말이 아주 피곤해 보여 城主께서 말을 빌려 주신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세곡을 실어 나르는 수레들이 바퀴싸움을 하면서 10리에 연달아 나오고 있어 이른바 흡사 木牛流馬가 군량미 싣고 포사곡에서 나오는 <삼국지>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물어보니 그들은 다 茂山 사람들이다. 풀숲에서 자고 모래 둑에서 밥해 먹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으면서 비바람도 피할 새가 없다. 머리가 하얀 늙은이가 수레를 몰고 오다가 車軸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다. 그는 울면서 내게 말하길 “아들 하나는 병으로 죽고 사위 하나는 병으로 눕고, 관리들의 무서운 독촉은 성화같아 이 늙은이가 길에 나섰습니다. 밭은 몇이랑 부쳤으나 아직 한 벌 김조차 매지 못하고 설령 지금 살아 되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무엇을 먹고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 가오리까”한다. 아마 내가 관가의 행차를 쫓아가고 있으므로 혹 자기를 구원해 줄까 싶어 한 말인가 보다. 나는 너무나 측은하여 한동안 바라다보다가“나는 보잘 것 없는 선비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였다.
폐무산에서 점심을 먹었다. 堡壘가 거친 협곡을 의지하고 있는데 그곳을 지키는 堡將은 일이 없어서인지 채소밭을 가꾸고 있다. 그 보루의 주인이 말을 비려주어서 富寧 에서 빌려 타고 온 말을 돌려보냈다.
오리쯤 더 가니 소나무 삼나무들이 크게 자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종일토록 햇볕을 가려 그늘 속으로만 걸어야 하였다. 차유령 위에서 잠시 쉬었다. 영마루는 과히 높지 않으나 부령과 무산의 경계가 된다.
석양 무렵 新站에 당도하여 村家를 찾아들었는데 비가 내린다. 아침나절에는 안개가 끼었다가 이내 개이더니 어두워질 무렵에는 우뢰가 치고 비가 잠시 내린다. 시골집이라 방바닥이 너무 더워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17일 戊辰, 해가 서발이나 올라 왔을 때 길을 떠났다. 바로 동구로 나가 50리를 가면 두만강에 이르니 여기가 바로 茂山邑이다. 이는 곧 潘胡老士(여진) 부락의 옛 땅인바 성터는 곧 亇乙于(마을우)란 추장의 麻培(성)의 옛터이다. 여기는 회령, 부령, 경성 三邑의 교차점의 위치하였다. 長白山 밑으로부터 남쪽으로 가면 길이 갈려 명천, 길주, 단천 등지로 가게 된다.
여진족인 노사는 수시로 남북 여러 읍에 출몰하여서 회령에서 단천 까지는 각 읍에 수십개소의 山堡를 설치하였는데 이들은 방비를 위한 시설이었다. 지금은 이 도적의 무리들이 이미 제거되었고 우리 쪽에서 鎭堡를 설치한지도 이미 백년이나 되었다.
백성들은 넓게 퍼지었고 땅도 개척되어 농사와 누에치는 일이 날로 번성해 세월이 태평하고 번성하여 강산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다. 임금님의 은덕이 이제 여기에 가지 고루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여기 이 땅도 우리의 內地가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저런 堡壘가 소용없는 데도 그냥 두어두고 있어 병졸들의 수고와 원망을 듣고 있으니 알기 어려운 일이다.
나의 異戚兄 崔錫倫이 무산에서 찾아왔다. 읍내에 사는 車天輪이 일에 능하고 산길 또한 잘 안다고 해서 만나 보았다. 그의 대답은 위험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하고 茂山 城主 또한 그리 말하므로 걱정을 하니 성주는 “과연 어려움이 이와 같다면 생사가 걱정이 되니 어찌 산 구경에 목숨을 걸겠는가?”라고 타이른다. 군수께서 다시 말하기를 정말로 산에 오를 수 없으니 한 번 城樓에 올라가 무산을 자세히 구경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한다. 나는 웃음이 났다. 올 때 부령군수가 조롱하여 말하기를 “무산 구경이나 잘하고 오라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되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崔兄과 더불어 城樓에 오르니 강을 사이에 둔 胡山의 중첩한 산들이 널리 이어져 있어 변방의 감회가 저절로 울어난다.
최형의 귀띔으로는 車天輪은 관의 명령과 관리들의 압박으로 우리들 백두산 탐방을 저지하려 하였다고 한다. 대략 백두산에 가면 本邑의 힘을 빌리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곤리와 백성들이 꺼리고 관리들 또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저지하려는 것이란다.
막 내려가려 하는데 마침 鍾城의 군수 옆에 머물고 있는 손인 衙客 金元之가 만나러 왔다. 이미 만나자는 기약이 있었다. 그가 함께 데리고 온 급창 한 사람은 이미 종성군수 趙公을 따라 백두산에 갔던 사람이기도 해서 백두산 등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入山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날 한나절은 개인 날씨였다.
18일 己巳. 식전에는 안개 같은 비가 내려 마치 장마철 같더니 한낮이 되면서는 구름이 걷히고 날이 맑아졌다. 매우 기뻤다. 여기서 행장을 갖추려 마련하기로 하고 우선 하인 8명을 보내 길을 닦고 草幕을 치게 하였다. 崔兄이 나를 보려고 몇 차례 왔었다.
19일 庚午. 일찍 출발하였다. 하늘은 청명하고 햇볕은 쨍쨍이다. 다만 흰 구름 한 뭉치가 서북산 아래 감돌고 있을 뿐이다. 강을 끼고 15리쯤 가서 산으로 오르게 되었는데 羊巖이 두만강에 있으면서 천 길 하늘을 찌른다. 3면은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고서는 오르기 어렵고 뒤로 1면은 뾰죽뾰죽한 산들이 연달아서 겨우 더듬어 오를 수 있었을 뿐이다.
한 줄기 長江이 절벽을 끼고 감도는데 좌우 바위들은 병풍인양 둘러 있으니 실로 景觀이 대단하다. 城主가 이르기를 “江이 山과 함께 어울린 아름다움이 칠보산 보다 낫다 할만 하지 않은가”한다. 나는 대답하되 “이는 다만 강 위로 솟은 하나의 높은 臺로 그 風致의 우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以下는 다음번에 계속하기로 하고 지루할까봐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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