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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때 景福宮 重建의 이야기는 대왕대비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의 <高宗實錄>에 그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종 실록>권2. 2년 乙丑 4월 8일에는 대왕대비께서 營建都監에 10만량을 내려 보내 우선 급한 일에 사용하게 한다. 그 기사내용은 이렇다.

     大王大妃曰 今此景福宮重建時 錢十萬兩 當內下矣 先爲補用事 分付營建都監

경복궁 중건역의 책임부서로 營建都監이 들어서고 총책임자 도감이 임명되는데 문제는 그 막대한 공사비의 마련이었다. 나라 재정이 어려운 시기의 막대한 工役은 그만큼 어려울 수  밖에 없는데 중건의 소문이 나자 자진해서 노동해서 작업을 돕겠다는 自願赴役者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그만큼 백성들이 경복궁 중건에 共感한다는 열기의 발산인데 이는 어느 특정인을 위한 중건이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입은 눈물겨운 피해를 복구하고 싶다는 백성들의 의지가 반영 된데서 비롯된 일이다. 그 점을 실록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4월 12일)詣景福宮 親審殿基 召見時原任大臣 都監堂上 領府事鄭元容曰  此闕
               王業肇興之洪基

당시의 중진급 전직 현직관원들이 경복궁로 모여 가서 두루 보면서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이룩한 正宮의 자취를 다시금 살피면서

          南面出治之正衙也 重建有命 涓吉始役 衆心頌祝
          將見太平晠化之像矣 向奉聖敎舊闕重建 專由爲民之聖念
          凡屬役民之事 順其勢而紓其力而民歡樂之 則益有光於堂構之業矣

당연히 중건하는 일의 마땅함에 교감을 하면서 그 기쁜 마음들을 피력한다. 나라를 重興하고 싶은 기운이 그만큼 백성들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나보다. 그 때 대왕대비는 걱정을 털어놓는다. 무너진 담장 밖 터전에 집을 짓고 사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當如是留念矣 宮墻外 聞多小民之構屋以居者 將何以處之乎

領府事의 소임을 맡고 있는 도감 鄭元容님께서 “勢將撤移矣”(그야 당연히 헐어내어야 한다)고 원칙을 천명하나 대왕대비는 걱정이 많다.

         敎曰民情可矜 如有分數給錢 則何如乎

얼마씩이라도 나누어주어 대책을 삼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왕대비의 자상한 마음씨에 행정책임자인 鄭선생께서는

      “元容曰 宮墻近處構屋 禁法也 宮殿始役之時 自當毁撤 何可別有恩施乎”
라고 단호하게 범법자들을 지탄하나 領議政 金佐根선생은

            “城底民家 雖是法外 而聖敎如是 依前例給之果好矣”

라고 아량을 베풀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오늘이라면 과연 어떠하였을꼬. 알기 어렵다.
어쨌든 그런 과장을 거쳐 어렵게 이룩한 경보궁을 倭사람들이 헐어내기 시작하였고 결국 오늘의 몰골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근간에 다시 회복시킨다고 이른 바의 ‘복원공사’를 문화재청에서 강행한 바 있는데 현대적인 도구와 식견으로 공사를 강행하면서 흙으로 구워 만든 것은 전혀 비한국적인 자재로 ‘복원’을 하였고 치수를 정하는 자도 현대의 척도를 사용하고 있어 조선시대 척도와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말끝마다 ‘복원’이란 소리를 하고 있으니 그 工役의 心性이나 技法이 어제의 것을 再現하였다고 할 수준이 못되는 일이 자명한데도 누구도 문제를 삼으려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과연 이 시대의 문화척도는 어떻게 가늠하여야 하는지 이다음 사람들의 평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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