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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朴琮)선비의 세 번째 이야기는 간성의 청간정 부터 시작된다.

청간정(淸杆亭)

청간정은 간성부(杆城府) 남쪽 40리에 있다. 바닷가에 있으며 정자 한 채에 불과하다. 바다 경치로 이름이 난 곳을 찾는다면 곧 영동 1천리에 어디든지 바다를 끼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이 정자가 관동팔경에 끼인다는 것은 송구스럽다고나 하려는지.

나는 이 바다를 따라 걸은 것이 2천리나 되니 바다구경으로는 실로 싫증을 느낄 지경이어서 다만 정자를 바라보고 오르지는 않았다.

꼭 간성의 한 경치를 골라 팔경에 넣자고 한다면 선유담(仙遊潭)의 유한정(幽閑亭)이 좋을 것이다.

선유담은 청간정에서 북으로 10리에 있는데 주위가 반달 같은 못이다. 산의 봉우리는 못의 허리에 솟아있고 산 끝에다 정자를 지었는데 아늑하고 아름다워서 역시 하나의 경관이다. 정자엔 간이(簡易) 최림(崔琳)의 시가 있다.


낙산사(洛山寺)

낙산사는 양양부 북쪽 10리에 있다. 산은 설악산에서 갈린 지맥으로 내려오다 바다에 이으러 멈추었다. 북을 향해 등을 지고 남을 향하여 돌연히 산록을 이루었으며 절이 여기에 터를 잡고 앉았는데 용과 호랑이가 도포자락을 감싸듯 하였으니 역시 기이하다. 길을 따라 푸른 소나무와 古木 사이로 들어가다가 문득 홍예문(虹霓門)이 서있는 것을 보게 되며, 문안으로 수 십 보 들어가면 삼문(下脫門, 曹溪門, 天王門--주: 지금 천왕문 이외는 없음)이 있다. 문안에 들어가면 정취전(正趣殿, 주: 현존하지 않음)이 있으니 여기는 관음대불을 모셨으며, 그 뒤도 담이 둘러 있고 층층이 계단이 높게 있어 올라가면 전각이 있으니 원통전(圓通殿)이니 여기에는 큰부처 둘과 작은 부처 둘(주: 지금은 이런 불상이 없음)이 있는데, 9층의 석탑이 있는 뜰의 왼편엔 응진전(應眞殿)이 있으니 여기에는 석가불 하나, 보살 둘, 나한 열여섯, 사자불(使者佛)들을 모셨으며, 뜰 오른 편에는 용선전(龍船殿)이 있으니 여기에는 어패(御牌)를 봉안하였다. 이는 다 공전(供殿)으로 우람하고 대단하다. 화려하기로는 원통전이 으뜸된다. 당(堂)은 담 밖에 있는 것이 좌편에 넷, 우편에 세 개인데 각각 이름이 있다. 이들은 다 승방으로 방안에는 각기 작은 부처를 모셔 놓았다. 그리고 반야문 좌우에는 빈일(賓日), 송월(送月)이란 두 채의 승방이 있는데 이는 오가는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다.

동쪽 승방에는 숙종(肅宗)의 어제시(御製詩)를 붉은 비단으로 덮었으며 택당(澤堂) 이식(李植)과 간이 최림의 시도 있다. 난간에 의지하여 밖을 내다보면 만리 창해가 다 한 눈에 들어오며, 해와 달이 떠오르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주: 오늘의 寺觀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절에서 동으로 7리, 바다에 임한 보타굴(寶陀窟)이 있다. 석벽이 파져 생긴 굴인데 깊이가 천 길이나 될 듯 까마득하며 짧고 긴 기둥을 석면(石面)에 세워 지은 누각은 굴을 가로질러 세웠는데 거기에다 관음불을 안치해 놓았다.

바다의 파도가 석벽을 치고 굴속을 뚫고 들어오니 그 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어 우레 소리가 들리는 듯, 누각은 그 위에 떠 있으되 물보라가 솟구쳐 창에 흩뿌리니 굽어보면 몸서리친다.

곁에는 한 작은 암자가 있어 중 한 사람이 이를 지키며 하루 여섯 때 부처 공양을 할 뿐 남과는 접촉을 하지 않고 다만 송다(松茶) 만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와 말을 나누어 보니 비록 불경의 불법은 모를지라도 정신이 맑고 눈이 밝아 선(禪)에 깊이 들어 간 듯 하였다. 민숙은 솔차를 청하여 마시고 나에게도 권하기에 마셔보니 상쾌하기가 뼈속 까지 맑아질 듯 하였다.

낙산사의 기록을 살펴보니 신라의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재(齋)한지 7일만에 관음보살의 염주 한 말, 동해 용왕의 여의주 한 알을 받고, 또 재한지 27일에 관음보살을 굴속에서 친견하였는데 "두 대(竹)가 솟아 나오는 곳이 부처의 땅이니 거기에다 전당을 짓고 나를 공양하라"고 하였다. 그래 그 말과 같이 하였는데, 지금의 원통전의 터가 바로 그곳이며, 퇴 아래 대나무를 심어 이를 표지해 두고 탑 속에는 염주와 여의주를 넣어 두었다 한다.

아! 불가에서는 산하의 대지로 환망(幻妄)한다고 하니 그들의 소위 참된 몸이란 또한 환상과 허망이 아니겠는가, 항차 흙으로 구어 내어 황색 금칠을 하여 일곱척의 체구(불상)를 꾸며 놓은 것에 이르러서랴, 그렇다면 관음보살이 부처 땅이라고 지적한 것이나 의상이 절을 창건한 것은 다 역시 허망한 것이 아니겠는가,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박종 선비는 불교에 입문해 본 일이 없으므로 여러 가지로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대략 조선조 선비들 생각도 이와 유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승려를 천인으로 취급하던 당시의 사회풍조가 그런 생각을 만연시켰을 것이다.

낙산사의 옛 모습이 지금과 다르다는 기록을 예서 본다. 6.25등의 전란으로 피해를 입어서 옛날의 사관(寺觀)과 달라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문헌에 기록된 내용 중에 박종 선비와 견해가 다른 부분이 더러 있다. 여행자가 문헌을 싸들고 다니지 않은 이상 똑같기는 어렵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자기가 본 바를 적은 현장감이 우리에게 더 소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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