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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2005년 4월 12일, 용산에 새로 지은 국립박물관에서 주관한 초대박물관장신 金載元박사 15주기추모식에 참석하였었다. 식이 거행되는 중에 제자들의 추모사가 있었다. 작고하신 분의 평소의 위대하심을 누누이 설명하면서 찬탄하는 내용이다. 다들 절절이 그 어른의 살아생전의 모습과 멋진 업적을 회상하며 감격적인 그 추모사를 듣다가 가슴이 찌릿해 왔다. 나는 인간문화재 대목장 제74호신 이광규李光奎선생님의 제자이면서도 한 번도 그 어른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짓누른다.
오늘 아침에 요사이 정리하고 있는 예전 문서들 중에서 어느 신문기자가 작고하신 이광규선생님에 대하여 간단하게 써서 보내라는 전갈을 듣고 급히 써서 보내준 원고지 8매 짜리의 초고草稿를 찾아내었다. <李光奎 도편수의 作品世界>라는 제목인데 다시 읽어보니 글은 시원치 않고 이 선생님에 대한 예비지식 없이는 알아듣기도 어려운 내용이어서 내심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이 자료를 요청한 그 기자가 그때 과연 어떤 기사를 썼을까 생각하니 송구스러운 마음이 복받친다. 얼마나 잘못 썼는지를 고백하기 위해 그 초고의 내용을 여기 옮겨 보겠다. 그러나 말미에 그 시절에 쓰지 못하였던 내용을 조금 보충하고 또 註를 부기하여서원문 그대로만은 아님을 밝혀 두어야겠다.


李光奎 도편수의 作品世界
                                                 木壽    申      榮     勳
                                                         (木壽韓屋硏究所長)

멕시코에서 돌아오는 길(여러분 이해의 편의를 위해 註를 달아 설명을 부연하였다. 註: 1966년 12월부터 67년 3월까지 멕시코올림픽의 문화행사에 참여할 한국문화의 대표로 멕시코시의 대통령궁 앞 공원 안에 사모정 -韓國亭- 하나를 짓기로 되었는데 이광규도편수의작품이 선정되어 직접 가서 지었고 木壽가 수행하였다. 이에 앞서 66년까지 덴마크국립박물관 한국실에 한옥 사랑채를 하나 지었는데 이 선생 작품을 木壽 혼자 가서 지어 완성하면서 크게 칭찬을 들은 일로 해서 이광규선생님 작품이 멕시코올림픽 문화행사에도 선정되었다.) 에 미국에서 이름 난 건축물들을 살피며 다녔다. 1967년도의 일이었다. 이 선생님은 멕시코에 계시는 동안에도 열심이셨다. 멕시코대사관 여러분들의 협조도 적극적이었고 우리들이 하숙하고 있게 된 이민 2세대 할머님 댁의 아드님이 멕시코 건축계에 이름난 작가이어서 그 3세의 도움이 또한 자상하였다. 멕시코 고대문명이 남긴 건축물은 무론이고 고대 마야건축물을 보도록 칠레에까지 동행을 하였다. 작품을 하는 틈틈이 짬을 내어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니는 우리 선생님의 모습이 내게는 큰 감동이었다.
이 선생님은 원래 부지런하셨다. 60년대만 해도 겨울철엔 일이 없어 쉬어야 하였다. 그럴 때면 이름 난 건축물들을 순방하시면서 木壽를 꼭 수행하게 하셨다. 많이 보고 그 이치를 알아야 된다는 말씀을 되풀이 하신다.
선생님은 배운 대로의 技法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전북 花巖寺 극락전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고 木壽가 專門委員 자격으로 그 修補에 참여하는 중에 선생님께 그 건물구조의 특성을 말씀 드렸더니 당장에 현장에 가서 그 구조의 특성을 탐구하고 그로부터 ‘덧보’라는 새로운 부재를 창안하시어 송광사대웅보전 이래로 당신 작품에 활용하셨고 이 선생님을 후계한 曺喜煥 도편수가 鎭川 寶塔寺 三層木塔을 지으면서 그 ‘덧보’를 활용하여 큰 성과를 얻는다. ‘덧보’는 多包가 찌그러지는 약점을 보완하는데 큰 구실을 하는 보완장치가 되었다.
그 분은 法古創新의 정신에 투철하였다. ‘옛 제도를 익혀 새로운 것을 창안한다’는 뜻인데 1972년에 지은 晋州의 矗石門 중건도 그런 작품에 해당한다. 근세에 자취를 감춘 건물을 그 터전에 남은 홍예받침돌 등을 근거로 陸築과 門樓를 再現하자 아주 멋지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 어른의 지혜와 안목이 밑받침된 法式과 技法이 충분히 발휘되었던 것이다.
木壽가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1962년도 서울 숭례문 중건 공사장에서였다. 육축공사의 책임자 구실을 하면서 뵙게 되었는데 조원재 도편수의 부편수로 참여하신 장년 44세의 혈기왕성한 분으로 당시 목수로 참여하신 조선말기의 연세가 높은 老匠 여러 어른들을 거느리면서도 전혀 구애되지 않았고 오히려 노장들께서 칭찬을 하셨다.
이 선생님의 대표적인 작품은 석굴암 전실 목조건축물, 불국사 중창의 여러 건물, 서울의 미국대사관저, 민병도씨댁, 용인자연농원 호암선생댁, 서울 청룡사 대웅전 등등인데 그중 청룡사 대웅전은 설계로부터 시공에 이르기 까지를 스스로 다 맡아 완성하였다.
그 시절만 해도 한옥을 설계한다는 인물이 거의 없었다. 더러 책상 위에서 그림을 그린 설계가 나돌기도 하였으나 집장사 집 짓는 정도가 고작이어서 그런 설계는 아예 무시하고 그 터전에 맞게, 그 집주인에게 어울리는 집을 짓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진지한 자세를 늘 堅持하고 계셨다. 그 분의 일터에 가면 양판이라는 현장의 설계도면 말고 아주 정확하게 법식에 어울리는 종이에 붓으로 그린 도면을 비치하고 수시로 보완하면서 작업을 진행하시는데 그 도면이 밖에 노출되는 일을 아주 꺼리었다. 도면을 그리실 때 더러 거들라고 하셔서 몇 곳에서는 현장 조수를 겸하면서 그 일에 몰두하곤 하였는데 밤에는 일일이 그 도면의 구석구석이 지닌 이치를 묻고 스스로 깨닫도록 훈련을 시키시었다.
선생님은 法式에 아주 능통하였다. 주변 사람들 권유에 따라 <木造建築法式>이란 假題로 글 쓰실 궁리도 하고 계실 정도였다. 이 어른을 중요문화재 제74호 大木匠으로 국가에서 지정한 것도 저런 식견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1918년에 경기도 여주에서 탄생하였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목수 일을 익혔고 조선왕조 건축의 최고 수준인 景福宮重建役 도편수의 技法을 전수한 正統派이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건축가들에게 “내일의 뛰어난 건축가가 되려면 어제를 알아야 하는데 어제를 망각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한탄하면서 “한국인이 축적해온 아름다움이 만방에 발휘되려면 순화된 이 지역의 우리 집을 잘 알아야 된다”고 충고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 선생님은 1990년 송광사 제8차 重創佛事에 참여하여 九山 方丈큰스님 요청에 따라 대웅보전의 모형을 1/20 규격으로 만들어 단청까지 하고는 이어 地藏殿을 완성하고 대웅보전을 지을 나무들을 치목하시던 중에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작고하시는데 구산방장스님이 입적하신 뒤를 이었다.
선생님의 부편수이던 曺喜煥이 도편수가 되어 선생님의 작품을 완성하였고 조 도편수는 진천 보탑사 삼층목탑으로 선생님 은덕에 보답하는데 우리들이 송광사 불사의 건축 책임자이신 이 도편수님을 寺博士의 칭호로 부르려다 좌절된 이래의 허전함이 이로써 환희를 맛보게 되었다는 칭송을 함께 그분 영전에 받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 曺편수도 곧이어 선생님 계긴 저세상으로 따라 나섰다.

짧은 글에 함축된 이야기를 다른 이들은 이해하기 어렵게 생겼다. 언젠가 누구 재주 있는 분에게 부탁하여 우리 선생님의 一代記를 완성시켰으면 좋겠다. 아직도 이 어리석은 제자는 동동거리고만 있을 뿐이지 아무 일도 이룩하지 못해 산생님 뵈울 면목이 없어 하니 아마 보다 못한 曺 편수가 먼저가 선생님 만나 뵙고 좋은 말씀 드라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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