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壽의 나라(奈良)통신 15

by 신영훈 posted Apr 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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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에 이번에 하는 공부의 마감으로 오사카의 절터를 찾아갔었다. 백제에서 절을 짓기 위해 전문가들이 파견되는데 <일본서기>에 瓦博士의 성함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와박사는 동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그 절의 창건 때 지은 법당 자리를 발굴할 때 초기 창건절터에서는 기와 파편이 전혀 발굴되지 않았다. 나무로 지붕을 이었기 때문이며 이때의 법당은 기둥을 땅에 묻어 세우는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후에 와박사가 파견되자 법당을 다시 짓는데, 멋진 무늬의 막새기와까지 구색 갖춘 기와지붕으로 완성한다. 그 터전에서는 발굴 시에 훌륭한 와편들이 많이 수습되어 귀중한 초기 불교사원 자료로 보존되고 있다.


이 절터를 처음 찾아간 것은 약 15년 전쯤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대벽선생님 따라 사천왕사로부터 걸어서 물어물어 갔었어서 이번에도 그런 분위기를 기대하며 겨우겨우 물어 찾아갔더니 주변은 완전히 변하였고 공원이던 절터에는 신사가 들어섰는데 지금은 사적의 표시로 세운 말뚝과 설명판 하나가 당그럼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안내판에는 후에 와박사가 만들어 기와 지붕을 완성하였을 때 사용한 막새기와 무늬를 사진을 찍어 제시하고 있어 그나마 좀 마음이 가라앉는 듯 하였으나 점심 굶은 배가 왜그러는지 자꾸 뒤틀려서 얼른 그 자리를 따나고 말았다.


그 날 오사카 시립 역사박물관에 가서 우리나라 국보전시회를 참관하고는 9일에 있을 연구소 특강 준비를 위해 얼른 나라로 돌아왔다.

4월 10일에 귀국할 일정을 잡고 연구소에 통보하였더니 가기 전에 이야기 좀 하고 가라면서 귀국 하루 전인 9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시간을 정하였다. 특강이라는 형식이긴 하였지만 연구소 소속의 건축전문가들만 모이는 조촐한 자리여서 제목은 <한국목조건축의 옥개구조>라는 것이었지만 일본 건축의 과장된 지붕과 우리의 조촐한 지붕과 중국의 북방형 직선과 강조된 남방형 곡선의 지붕을 비교하면서 과연 일본건축이 중국에서 왔다고 하는 일본식 개념이 온당한 것인가를 말하면서 한국건축을 무시하고는 일본건축의 원류를 찾기 어렵다는 점을 그간 공부한 일본건축에서 사례를 들면서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말을 하였더니 처음엔 주제와 달라 좀 곤혹스럽게 여기는 것 같더니 이야기가 끝난 뒤의 반응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4월 10일에 만 6개월 머물던 집에서 이삿짐을 들고나오니 그런대로 감개가 있었다. 그 날 아침 일찍 늘 자전거 타고 다니던 공원을 산책해 보았다, 이젠 겨울 색을 벗고 완연한 봄볕이 찬연한 정경이 몸을 감싸주었다. 여러가지 감회가 떠오른다. 나라통신을 읽어주셨을 분들에게 해야할 인사도 여러가지로 궁리하게 되어 평소보다 좀 긴 산책을 하였다.

어제까지 부슬거리던 비도 멎어서 날도 매우 상쾌하였다. 이제 나라에서 보내는 마지막 통신을 띄워야겠고나 하며 돌아와 생각하니 집에서는 인터넷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였다. 귀국해서나 해야겠다고 작심을 하였으나 막상 귀국하여 보니 여러가지 일에 휘둘려 겨우 이제야 여러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나라통신을 당분간 몇번 더 하였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그간 하지 못하였던 이야기 거리들을 털어놓는 것이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차분히 정리된 이야기 거리들을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나, 형식을 달리 해야 하는 것인지도 좀 의논을 해서 정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여러분 그간 성원해 주셔서 무사히 6개월의 수련을 끝내고 건강하게 돌아왔음을 감사하면서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