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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문화인회의 안목과 한국문화의 이해

지난번 비 맞으며 三川寺를 다녀온 후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간 분들은 고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탐구로 해서 우리 한옥문화인회의 안목이 향상되고 있다는 말씀을 한 참가자에게서 듣고는 용기가 났다.
우리 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우리의 미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를 두고 많은 궁리를 하고 있다. 관점에 따라 이해하는 방도가 다르겠지만 서구적인 학문의 방법론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기층문화를 탐구하는 방법론에 기반을 두고 자기의 것을 접근하면 훨씬 허심탄회하게 접근하면서 이해하고 그 장점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지 않을 가 싶다는 생각을 木壽는 하고 있다.
그런 노력의 한 방도로 9월 12일의 한옥문화인회의 현장 탐구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의 용암사龍巖寺로 바위부처님 뵈러 가려고 한다.
세상에 이런 부처님도 있다니 놀랍다. 아마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유형의 조각도 존재하기 어려울 터이니, 그런 조각을 부처님으로 떠받들어 온지가 벌서 수 백 년이 지났다는 일이 납득하기 힘들다. 그러나 지금도 이 바위부처 아래에 용암사라는 절이 있어 향화香火를 받들고 있다.


오늘의 용암사 대웅보전



바위부처는 대웅보전이란 편액을 단 법당 왼손 편 뒤로 설치된 신식 돌계단을 타고 오르면 산기슭에 불끈 솟아오른 큰 바위에 조각되어 있다. 나무 사이로 아침 햇빛에 비친 모양이 우람하며 그 특별한 모습에 입에 침이 마른다.









숲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바위부처님


큰 바위에 미륵님을 새겼는데 바위의 키가 모자라자 얼굴을 따로 조성해서 알맞게 올려놓고 완성을 하였다. 그것도 두 분을 나란히 모셨고 얼굴과 보개寶蓋의 모양을 서로 달리하였다. 정말 대단한 발상이다. 어떤 수련을 겪은 분이 어떤 인연으로 이런 조각을 할 수 있었는지 알기 어려우나 보통의 수준이라면 어림도 없을 일을 이룩해 내었다. 놀라운 일이다.
김위석金渭錫선생이 쓰셨다고 기록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암사 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대략 간추려 읽어본다.
「용암사 --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용미리 용미산에 있는 사찰. 이 절의 창건은 절 뒤에 서서 서쪽을 향하고 있는 보물 제93호의 쌍석불雙石佛과 관계가 깊다.
전설로는 고려 선종이 왕후와 후궁으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하여 고민하던 중, 하루는 후궁인 원신元信공주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서 “파주군 장지산에 산다. 식량이 떨어져 곤란하니 그곳에 있는 바위에 두 불상을 조각하라. 그러면 소원이 이루어지리라” 하였다. 알아보니 바위 둘이 있으므로 불상을 새기게 하였다.
그때 두 도승이 공사장에 나타나서 좌측은 미륵불로 우측은 미륵보살상으로 조성할 것을 지시하고, 모든 중생이 와서 공양하고 기도하면 아이를 원하는 자는 득남하고 병이 있는 자는 쾌차할 것이라 하고는 사라졌다. 그 뒤 불상이 완성되고 그 밑에 절을 창건하자 원신공주에게 태기가 있어 한산후漢山候 물勿을 낳았다고 한다. 특히 이 불상은 예로부터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공양을 마치고 열심히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아기를 원하는 부녀자들의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의 좌측과 우측의 지정은 보는 이의 좌우가 아니라 불상 자신의 위치에 따른 구분인데 앞에서 보면 바위가 셋 나란한데 향해서 좌측의 것은 처음부터 조각을 하지 않은 바위이어서 처음부터 삼존불로 의도되지 않았던 것 같다.
중앙이 미륵불이고 마주보고 우측이 미륵보살상에 해당한다면 불상과 보살상을 처음부터 구분하려 하였던 것 같다.



앞에서 본 두 조상彫像



미륵불이라 부르는 중앙의 조상은 얼굴이 원만하고 보개寶蓋도 둥근 모자형이다. 그에 비하여 보살상은 얼굴도 네모지고 보개도 방립형方笠形이다. 그렇긴 해도 두 조상은 알맞은 간격을 유지하며 병립竝立해 있다. 그러나 측면에서 보면 미륵불이 보살상 보다 한 발 앞에 서 있는 듯이 조성되었다. 정면과 측면관側面觀이 그만큼 완연한 차이를 지녔다.
얼굴은 작은 다른 바위를 조각하여 올려놓았는데 큰 바위와의 접합 부분에 상당한 고려를 하고 힘써 완벽하기를 기하였다. 그 점은 세부를 처리한 솜씨와 처리법에서 아주 분명하게 들어나 있다.  











측면에서 본 두 얼굴




미륵불은 연꽃의 줄기를 손에 쥐고 있다. 쥐고 있던 손 위로 솟아 있었을 연꽃은 보이지 않지만 연꽃이 거기 있었던 자취만은 분명하게 남기고 있다.
본존불의 손과 달리 보살상의 두 손은 합장하고 있는데 두 손이 상당히 돌출해 있다. 그것은 그만큼 둘레를 파내었음을 의미하는데 자세히 보면 그렇게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입체감을 돋보이게 하는 방편을 구사하였다. 물론 보충한 바위의 형상을 기묘하게 이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래의 큰 바위의 응용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본존불의 손과 보살상의 합장한 손



올라가 뒤편에서 두 분이 바라다보는 보고 있는 망대望臺를 살피면 앞에 두 산봉우리가 들녘 저편으로 아득히 보이는데 연산된 두 봉우리 중에 높은 봉우리를 피하고 낮은 쪽을 바라다보게 하였다. 마음만 먹으면 높은 봉우리 바라다보도록 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다.
그러니 좌향에서 좌坐와 향向이 분명하다는 것은 그 점을 유의한 인식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이 조상造像에 상당한 식견이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조성기법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 물끊기의 배려는 말할 것 없고 모자 정수리에 자칫 물이 고일지도 모를 부분에는 배수할 수 있게 홈을 파서 완벽하게 하였다.
돌은 쐐기를 박아 갈라내는 기법 말고도 정釘질을 하면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 깎는 기법을 구사하였다. 이 기법은 상당히 숙달되지 못하면 구사하기 어렵다. 발을 딛을 충분한 자리도 마련되어야 한다.
완성된 뒤에 이 정釘자리는 다시 손질하여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보통이나 여기서는 그냥 두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선으로 해서 상하를 강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라다보면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얼굴 뒤로 큰 바위를 감싼 능선이 뒤로 이어진다. 뒤에서 얼굴의 뒤통수를 보면 깎은 머리의 윤곽을 볼 수 있고 의복의 깃이 감지된다. 뒤에서 보는 뒤통수에 올라 앉은 보개寶蓋와 큰 바위와 얼굴 아래 목 부분과의 접합에도 상당한 고심이 있었음이 보인다.
조상彫像 뒤편의 천연스러운 바위들은 마치 광배를 닮아서 주의 깊게 바라다보게 하는데 이 바위들은 뒤로 능선에 이어지면 뒷산 봉우리에 닿는다. 결국 우리나라 다른 바위부처에서처럼 그 산의 정기가 올 곳 지게 모인 그런 자리의 기맥이 정수를 이룬 바로 그런 자리의 바위가 조상造像의 터전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할 만 하다. 이런 바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 돌부처를 함께 보러 가서 열심히 살핀 뒤에 우리들이 다시 모여 이 조상彫像에 대하여 공동으로 토론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옥문화원 강의실에 모여 다시 슬라이드를 보면서 토론을 하고 그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우리의 회보 ‘韓屋文化’에 실어 세상에 알리면 어떨지 하는 궁리도 하고 있다.
인도, 중국이나 일본, 아니면 여타의 불교문화국가에 이와 같은 彫像이 다시 더 있는지를 이야기 하고 이 조각이 지닌 미적인 감각이나 畏敬의 대상인 불상으로서의 성격을 탐구해 보는 작업을 하면 매우 보람이 있을 것 같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외국말로 번역하여 한국미술의 큰 구수한 맛을 세상에 알린다면 더욱 그 효험이 클 것인즉 우리 한옥문화인회의 여러 어른들의 적극적인 동참이야 말로 큰 보람이 될 것이다.
우리 다 함께 차분히 살펴보십시다. 우리 조상들의 업적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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