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壽의 이야기사랑방 제 57화

by 신영훈 posted Mar 1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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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학자의 글은 제2절 건축으로 넘어간다. 그의 글은 (1)고구려 초기 궁전건축으로 시작된다. 다시 그의 견해를 들어보기로 한다.
고구려 왕조의 두번째 도성都城은 국내성國內城이며 지금도 성벽 유지遺址를 남기고 있다. 이 도시는 고구려 역사상 가장 긴 도성의 역사를 지녔다. 성은 방형을 이루며 동벽의 길이는 554.7m, 서벽의 기리는 6664.6m, 남벽 길이는 751.5m, 북벽 길이는 715.2m, 전체 둘레는 2.686m이고 모두 6개의 문이 있다.
***木壽는 이 국내성은 고구려때 임금님이 사시던 왕성이고 도성은 지금 국내성으로 부터 동편 넓은 터전에 넓게 자리잡아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산 기슭까지와 압록강 유역이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신라의 서라벌과 마찬가지이며 왕궁에만 성을 쌓고 도성은 쌓지 않은 유형에 속한다. 서라벌에도 도성 내에 많은 고분들이 자리잡고 있다. 국내성도 그와 마찬가지로 태왕릉, 장군총을 위시한 많은 고분이 도시에 있다. 또 태왕릉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도로망을 구축하던 기본 석표인 법수法樹도 남이 있어 여기에 도성의 도로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법수는 지금 남의 집 울타리 속에 숨어 있으나 나는 첮아가 보았다***
성벽은 담장 쌓듯이 안팎으로 쌓아올린 방식인데 장방형과 방형의 긴 돌로 쌓았다. 그 중에서 현재 보존이 제일 잘된 곳은 북벽과 서벽북단이다. 현재 높이는 2 ~ 4m로 현재 중국에 보존된 성 가운데 가장 오랜 돌로 쌓은 성이다. 성벽을 구축한 방식은 다듬은 돌로 아주 본때 있게 쌓았으며 바라다보며 좌우방향으로 수평을 이루고, 틈새가 고르고 아랫돌이 조금 튀어나와 있다.
***이 견해에서 북벽은 원형原形일 수 없는 구조이어서 중국사람들 견해로 보수한 결과로 생긴 모양이라고 할 수 있고 현 지표하에 상당한 깊이에 원래의 성벽이 남아 있어 후에 기회가 생겨 원형 찾는 일을 하게 된다면 제 모습을 훌륭하게 찾울 수 있을 것이다. 통구천에 면한 부분도 뚝을 쌓으며 매몰되어 있고 지금은 남의 집 울타리 안에 성벽이 있어 상태가 나쁘나 그 중에 우리들이 가서 옥수수밭에서 찾아낸 성벽은 비교적 원형을 잘 지니고 있었다. ***
---1984년에 간행한 <文物>에 '집안고구려국내성지의 조사와 시굴'이라는 보고문이 실려 있어 참고가 된다.---
국내성은 몇차례의 전란을 겪고 수리한 일도 여러번 거듭하여서 모두가 고구려 때의 모양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환경과 지세의 선택은 여전히 고구려인들의 축성하는 예술상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준다.
도성의 동쪽에는 龍山이 있고, 북쪽에 禹山이, 그에 이어 서족으로 칠성산이 있으며 압록강이 동북쪽으로 부터 국내성 남부를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간다. 도시는 배산임수하여 공격하기 어렵고 지세는 아주 험준하다. 게다가 여기는 기후가 따뜻하고 풍경이 아름다워 國都로서 아주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A.D 3년에 유리왕이 도읍을 이곳으로 옮긴 후 425년간 고구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427년 수도룰 평양으로 옮긴 후에도 이곳은 번영한 도시로 지속되었다. 이는 당초 도음을 정한 높은 안목의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지에 가서 여러 차례 성을 돌아보는 중에 공사를 하고 있는 장면도 목격하고 그로 인하여 성벽 쌓는 기법과 구조, 예컨데 치雉의 구조등을 볼 수 있었는데 3세기 구조물이라고 보기엔 너무 선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역시 고구려는 만만한 국가가 아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는 오랜 세월 여러번을 드나든 덕분으로 터득한 일이므로 보고 말하는 것과 보지 않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무게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운이 좋았던 것이다. 지금은 도시화로 인하여 성문은 자취를 잃게 되었고 성문의 구조가 어떠하였는지를 알기는 어렵게 생겼다. 어디가 문이 있었던 자리였는지 조차 알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1930년대만 해도 상당한 부분이 남아 있어 당시의 조사기록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는 찾아볼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