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壽의 이야기사랑방 제 120호

by 신영훈 posted Mar 2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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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호 <月刊 에세이>에 ‘고구려가 살아 있더라구요’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며칠 전에 다시 보게 되었는데, 한동안 중국에 가지 못해서 최근의 상황은 잘 모르겠으나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유적지를 다니며 살펴본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이다.
최근에 다녀온 분들은 이때와 달라진 오늘에서 고구려를 보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본 바를 말하면 읽은 분들이 그 당시보지 못하였던 내용들을 더 알려줄 것 같아 내 글을 여기에 옮겨 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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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저럴수도 있군요” 하면서 손으로 가리키는 쪽을 보니 젊은 여인들이 개울에 나란히 앉아 빨래를 하고 있는데, 치마가 물에 젖을까봐 그랬는지 온통 치켜 올리고 궁둥이까지 다 드러내놓고 있다. 사타구니도 드러나 있는 정도이다. 우리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저렇게는 할 수 없을 터인데 이건 좀 지나친 듯하다. 고구려 수도이던 국내성의 서편 성벽 밖으로 흐르고 있는 通溝川에서 본 광경이다.
   도무지 거리낌이 없다. 중국은 바야흐로 여성 위주의시대인가 보다. 여성상위시대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저것에 비한다면 비록 TV에서 판판이 병신구실 하는 남자일망정 남권이 남아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래하는 관습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공자님이 동방을 가리키며 “동방예의의 나라가 저기에 있다”고 하였을까 싶다.
   8월초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1990년 이래 매년 중국의 건축을 살피고 있다. 우리나라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알기 위한 노력이다. 느닷없이 다른 사람들 보다 일주일쯤 먼저 떠나자는 유혹이 있었다. 발해의 유적지도 아주 보고오자는 것이다. 본대와 함께 가서 고구려 자취만 보고 돌아오는 일보다 유익할 듯 해서 선뜻 동의하고 따라나서기로 하였다.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의 방학봉 교수님 호의로 지프차 한대를 전세 내었다. 그것을 타고 두만강 압록강 유역의 발해국과 고구려국의 유적지를 다녔다. 본대와 합류하기 이전의 열흘 일정이다. 하루 열두 시간씩 자동차로 강행군하는 답사가 시작되었다. 어느 날은 열일곱 시간을 타기도 하였다. 밤에 차를 내리면 대지도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이다.
   고구려 건축 특색 중의 하나가 구들들인 방이 있다는 점이다. 구들 드린 방은 후대에 이르러 한옥의 한 요소가 되어 마루와 함께 연합하면서 독특한 特長을 이룬다.
   시베리아에서 유적지를 조사하면서 그것이 어느 시대에 조영된 것이라고 추정하였다가도 발굴을 통하여 구들의 존재가 확인되면 고구려 시대 유적이라 단정하는 것이 세계고고학계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그만큼 구들이 고구려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구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의 현대인들의 주택에도 채택되어 있었다. 비록 중국인이 사는 집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의 강력한 흐름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국인, 그들이 한족이라 부르는 주민과 조선족이라 구분하여 부르는 우리 종족의 집은 확연히 다르다. 한 마을에 두 종족이 살고 있어도 이웃의 두 집은 외모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한족의 집은 문이 중앙에 있는데 비하여 조선족의 집은 문이 한쪽에 치우쳐 있다. 거의 틀림없는 구분이다. 놀랍다. 같은 것과 다른 점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문화의 큰 테두리 속에서 종족에 따라 각생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문화는 중국문화의 한끝에 있는 듯이 설명하는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특히 일본에서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의 견해가 그런 골자이었다.  36년간의 세뇌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 흐름이 광복된 지 반세기가 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 와보니 이렇게 극명하게 다르다.
   여러 가지를 보았다. 중국문화와 다른 것이 수없이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군총은 피라밋이었다. 이집트 형의 것이 아니라 중남미의 피라미데스라 부르는 그런 유형이다. 피라미데스를 건설한 종족도 우리처럼 궁둥이에 푸른 반점을 지녔다한다. 전 세계에서 피라미데스를 건설한 종족은 우리들 동이족뿐이다. 중국에는 없다.
   고구려의 탑도 보았다. 발해시대의 벽돌로 쌓은 탑도 보았다.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유산들이다. 중국이나 일본인들은 그간 수없이 조사하고 다녔으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법도 있는 것이다.
  이제 문이 열렸다. 닫혔을 때는 도리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왕에 문이 열렸으니 우리 눈으로 보러 다녀야 하겠다.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하여는 먼저 우리의 것을 알아야 하겠지만 중국을 헤집고 다니며 중국이 무엇인가를 실제로 체험하는 일도 시급한 일이다. 쓸데  없이 놀러 다니는 비용을 뜻있는 이들에게 주어, 찾아다니며 견문하게 하는 일도 슬기로운 일의 하나가 된다.
   고구려를 찾는 일에 나서면 더 좋다. 살아 있는 고구려가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줄줄이 찾아가 살아 숨쉬는 고구려의 맥동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오늘의 사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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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기의 식견이 있다. 그 식견에 반영된 고대의 우리문화를 인식하는 방도는 제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그 인식을 모아 한 줄에 늘어세우면 이야기의 줄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정리가 가능해 진다. 우리들 이런 작업을 조직적으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해 볼만 하다. 여러 가지 방도가 있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탐색단을 따로 구성하여 그 탐색을 일임시키고 뒷바라지를 해 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므로 그 쪽 다녀오시면서 느끼신 바가 있는 사람끼리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멋진 일이 성취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