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으로의 초대 - 9. 집 짓기

by 운영자 posted Dec 2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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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집 짓기  


첫째. 집과 환경

1. 환경

집 주변의 천연스러움과 거기에 사람의 의도가 가미된 조형이 들어서면 그것을 우리는 집의 환경이라 부른다.  

우리 나라는 산악국가로 분류될 수 있을 정도로 산이 많아서 중국사람들이 고구려를 설명하려 할 때 이 점을 부각시키면서 "산곡간山谷間에서 바위틈에 흐르는 물을 마시며(食澗水) 살기를 즐긴다"고 서술하였다.

잘생긴 산을 영산靈山이라 부르며 하늘에서 내려 온 시조始祖들은 그런 산을 무대로 백성들을 일깨우는 정성을 다하였고 개국시조인 단군은 '홍익인간'의 철학으로 그 정성을 논리화하였다.

영산의 줄기가 아늑하게 대지를 감싼다. 그 터전에 영산을 뒤에 두고 고을이 열리고 도시가 형성되었다.

산은 사는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마련하였으며, 삶의 터전으로서의 효능을 십분 발휘하였다.

도시가 커지고 이웃과의 분쟁이 야기되었을 때 산은 적을 막아주는 요새의 구실을 하였다.

백성들은 산에 감복할 수밖에 없었고 산을 숭상하면서 그런 산에 산신이 산다고 믿었다.
산을 의지하고 짓는 집은 그런 산신의 권위를 존중하는 다소곳한 성정으로 건축되었다. 규모나 장식이 질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집의 형상을 주도하였다.

집과 주변 환경이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한 바탕의 같은 요소라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개화바람이 불기 이전까지 집과 그 주변의 환경은 이 공감대를 이탈하지 않았고, 그래서 산의 주시를 통해 '산천정기'가 백성들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인총이 많아지고 집터 잡는 일에 경쟁이 생기자, 좋은 터전이란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그런 여건을 구비한 터전을 차지한 이는 신분 향상과 유족한 삶을 영위한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가 부각되면서 집 주변의 환경은 삶에서 더욱 절실한 것이 되었다.  

              

              

              경주 양동 마을

              

2. 환경의 조성

천연이 형성해 준 여건이 다 만족스럽지 못해 다른 이와 견주어 부족한 점이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한다. 그런 노력을 우리는 '환경의 조성'이라 부른다. 천연에 인위가 부가되는 일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둘째. 설계

집 지을 사람은 행정절차를 밟도록 법이 정하고 있다. 농촌에서는 일정한 규격 이하는 행정관청에 신고하는 것으로 족하고, 일정한 규격 이상이거나 행정관청 조례에 따라서는 모든 집의 신축은 다 허가사항이기도 하므로 고장의 관할 관청에 가서 밟아야할 행정절차를 숙지해야 한다.

어떤 집 지을 것인지를 결심하였으면 자기 마음을 확정하고 구체적인 작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한다. 흔히 "간단히 짓는 시골집에 무슨 마련이 필요하겠느냐, 적당히 지으면 되지"하는 마음이다.
'그래도 정리한 것 있으면 도면으로 표시해 보라' 하거나 아니면 설계하라 하면 "그런 것까지 뭐 필요하겠느냐"고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래도, 설혹 헛간 한 채를 짓더라도 지식인이고 문화인이라면 자기 생각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을 결과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냐?"하고 되묻는다. '결과 물은 바로 우리 집의 틀이며 기준이 될 내용이 담겨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  

결과물이 그림이라면 신식 용어로 '설계도'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이 담긴 우리 집 지을 설계를 이제 본격적으로 착수해야 한다. 설계가 집 짓는 일에 근본이기 때문이다. 토담집 짓건 귀틀집 짓건 간에 설계가 있어야 그에 의지하고 궁리해 가며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가족과 의논하려 해도 말만으로는 구체화되기 어렵다. 식견이 다른 가족 구성원의 의향을 들어보고 의견을 종합해서 의사를 마무리하는 것이 현대식 가장이 즐겨 하는 생활의 지혜라면 가족과의 대화를 위해서라도 '설계도'는 있어야 한다.

사람 생각은 수시로 바뀐다. 완벽하기 어렵고 늘 미련이 남는다. 내집 짓는 일은 더욱 그렇다. 다른 집 구경할 때마다 "아! 저렇게 하는 수도 있는 것을--"하는 생각이나 후회가 떠오르기도 하고 "그렇지 저렇게 좋은 방법이 있는 것을--"하는 아쉬움이 복받치기도 한다. 궁리가 많고 기대가 큰 자기 집일수록 그런 일이 거듭되게 마련이다.

전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눈에 왜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많은지 집 한 채 짓고 나면 당장 건축전문가가 다된 듯이, 새로 집 지을 이웃에게 여러 가지로 조언하고 성공과 실패담도 들려주게 된다. 이때 '설계도'는 자기 식견을 남에게 자랑하는 자기 집 지은 '표창장'이기도 하고 '감사패'이기도 하다.

"자! 우리들의 문화유산을 위해 우리 집의 새로운 설계를 합시다" 집 짓는 일은 언제나 즐겁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 출발이 든든하고 유쾌하면 결과가 좋을 것은 뻔한 일이다.

  

안동 하회의 '심원정사(尋源精舍)'도 전문가들을 만나 설계하는 일로부터 집 짓는 공정이 시작되었다고 향산(香山) 윤용숙(尹用淑)보살은 그가 지은 <어머니가 지은 한옥> 첫머리에 썼다. 집 지은 소나무 재목을 찬탄한 '소나무 예찬'을 비롯해 살고 싶은 집, 주초, 집치장, 복문, 등등 여러 항에 걸쳐 공사 중에 터득하고 경험한 얘기들을 물 흐르듯이 서술하여서 읽고 있으면 공사 진행되는 과정이 소상히 눈에 잡히는 듯 하고 중간 중간 삽입한 경험을 통한 성공과 실패담도 경청 할만 해서 매우 즐겁게 읽게 되는데 <어머니가 지은 한옥>을 다 읽고 나서의 느낌은 역시 집은 어머니가 지어야겠구나 하는 수궁과 찬탄이었다.

책에는 공사 진행 중의 사진과 공사하기 전에 설계하고 관청에 드나들며 허가 받던 일이며 전문가의 자문과 도편수를 비롯한 장인들과의 인간적 접촉이며 송광사 스님과의 인연으로 석물 설치한 다정한 얘기도 실려 있고 스스로 터득한 기술을 발전시켜 자칭 전문위원이 된 재미있는 얘기 거리도 있다. 집이 완성되자 따로 준공도면 그려 <어머니가 지은 한옥>에 실어 공개하는 지성스러운 마음을 발휘하였다. 멋진 준공보고서가 이 시대 우리 주변에서 간행된 것이다.

책을 본 이들이 한옥 짓는데 그런 도면이 작성되는 줄 미처 몰랐다고 실토하는 소리를 나도 들었다. 한옥 짓는데 "도면 그리다니 놀랍다"는 반응과 함께 "그렇다면 옛날에도 설계도가 있었느냐"는 물음도 있었다. 오늘의 우리 상식은 한옥은 비과학적이고 어쭙잖은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설계도와 같은 서구식 발전된 기록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터라 <어머니가 지은 한옥>을 보는 눈은 사뭇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머니가 지은 한옥>에 실려 있는 도면은 현대인들이 수련한 기법으로 작성한 현대식 작도법에 의한 것이므로 그런 기법이 없었던 옛날엔 지금과 같은 도면이 있을 리 없다. 분명 지금과 같은 '설계도'는 없었다. 당시엔 옛날식 도면이 있을 뿐이며 그런 건축도면은 조선시대 공사준공보고서인 각종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軌)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런 준공보고서를 대표하는 정조(正祖)때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멋진 도면이 여러장 실려 있다.



셋째. 집의 시작

1. 토벽집

가. 기초하고  

설계가 완성되고 신고를 하거나 허가를 얻는 행정절차가 끝났으면 집 짓는데 제일 먼저 할 일은 집 지을 자리에 기초하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겨울이 매우 춥다. 추운 만큼 땅이 언다. 아주 추운 지방에서는 지표로부터 2m가 넘게 꽁꽁 언다.

동토지역이란 북부지역에서는 1m정도를 제외한 깊이의 땅이 꽁꽁 얼어붙어 있다. 사철이 그렇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삼동 겨울엔 얼었다가 봄이 되면 풀린다.

독에 부어 둔 물이 얼면 부피가 커지면서 독을 깨고 만다. 마찬가지로 땅도 얼면 부풀어오른다. 봄이 되어 풀리면 부풀었던 것이 다시 갈아 앉는다. 이런 작용으로 해서 기초는 영향을 받는다.

담장을 쌓을 때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의 힘을 빌려 달고질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이 기초하는 작업의 전부였다. 그리고는 큼직한 돌을 산에서 떠다가 담장 쌓을 자리에 차례로 늘어 세우면서 다시 달고로 박아 넣었다. 이때 큰돌 사이는 약간 떼어주어야 한다.

그 돌에 의지하고 담장을 쌓는다. 겨울철에 땅이 부풀어오른다. 큰돌과 담장이 짓누르는 부위는 그냥 두고 돌 틈을 비집고 부풀어오른다. 땅은 그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가 봄이 오면 다시 갈아 앉는다.

집의 기초를 그렇게 하였다가는 큰일난다. 그래서 단단히 하였다. 한옥에서는 기둥 세울 자리에만 입사기초立砂基礎하는 방식을 택한다. 현대인들은 이런 기초법을 '독립기초'로 분류한다. 양옥에서처럼 벽체가 서는 자리 전부에 연이은 기초를 하면 '연립기초'라 한다.

기초는 지반의 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 방안이 강구되어야 하므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 주초 놓고  

주초는 기둥이 밑둥을 받쳐주는 돌을 말한다. 그래서 보통 '주초석'이라 하며, '초석'이라 줄여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말로는 '주춧돌'이라 한다.

주춧돌은 산에서 알맞은 돌을 떠다 사용하기도 하고 화강석을 규격에 따라 다듬어 맞춤 돌을 만들기도 한다.

시골집들은 대부분 바위를 떠다 천연스럽게 주초를 놓았다. 초가삼간뿐만 아니라 부자 집에서도 그렇게 하였다. 예컨대 해남지방에서 제일 부자이고 고급스러운 집으로 지금도 지식인 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고산 윤선도 선생의 생가인 녹우당에서도 천연스러운 바위를 주춧돌로 사용하였다.

다듬어 만드는 주춧돌의 모양은 크게 세 가지이다.

1. 폭이 넓고 운두가 낮은 것  

주춧돌 2. 폭이 좁고 운두가 높은 것

3. 키가 아주 훤출하게 큰 것

더러 짐승의 모습으로 다듬은 초석을 사용하는 예가 있으나 이는 아주 드문 일에 속한다.




다. 기둥 세우기  

기둥은 둥글거나 네모진 것이 보통이나 원초시대엔 둥근 것이 보편적이었다.

흔히 "둥근 기둥은 고급스럽고 네모진 기둥은 그만 못하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아주 적절한 것이지만 또 틀린 말이기도 하다.

둥근 기둥을 원주圓柱라 한다. 원주는 살림집뿐만 아니라 궁집이나 절집의 중요건물에 채택되어 있다.

원주는 '흘림'을 두거나 '배흘림'을 만들어 멋을 부린다. 네모진 다른 부재들과 달리 둥근 기둥은 투실해 보이며,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런 점에서 "둥근 기둥이 고급스럽다"는 표현이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둥근 기둥에 비하여 네모난 기둥은 나무의 지름이 더 커야 만들어진다. 가령, 지름이 한 자(1척)인 기둥의 경우 둥근 기둥은 1척 2촌 정도의 원목으로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네모난 방주 기둥의 일변을 1척으로 하자면 원목의 지름이 1척5촌 이상이어야 한다. 재목이 훨씬 투실해야 하는 법이다.

방주도 흘림도 두고 배흘림도 둔다. 아주 드문 예이긴 하지만 그런 배흘림을 두자면 원목의 지름은 1척 8치 이상이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는 "둥근기둥이 고급스럽다"는 말은 틀린 해석이 된다.

기둥은 그 종류가 많다.

1. 모양에 따른 구분  

1).원주 2).방주 3).각주(6, 8각)

2. 기능에 따른 구분

1).기둥(원주, 방주) 2).간주(間柱) 3).활주

3. 구조에 따른 구분

1).평기둥. 2).갓기둥, 3).귓기둥, 4).고주 5).활주

4. 규격에 따른 구분

1).짧은 기둥(동자주) 2).평기둥 3).고주 4).귀고주

*토벽집엔 당연히 기둥을 세우는 것이지만 토담집에도 기둥을 세우면 유리하다. 특히 귀 기둥은 거의 필수적으로 설치하는 것이 시공이나 사후 관리에 유익한 점이 많다. 여기의 기둥은 네모난 방주가 쓸모가 있다.

*귀틀집의 형상을 다락집처럼 지으려면 마루 아래로 짧은 기둥을 세워야 한다.이를 '루하주樓下柱'라 부른다. 루하주는 다듬지 않은 천연스러운 나무를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어 멋 부리기에 안성맞춤이다.

루하주를 돌기둥으로 만드는 수도 있다. 그 돌기둥도 익산 미륵사지 금당의 백제시대 돌기둥(혹은 주초석)과 같이 후덕하게 만들기도 하고 조선조 다락이나 내루內樓에서와 같게 날씬하게 화강암으로 다듬어 세우는 수도 있다.

지형에 따라선 집 한쪽에만 루하주를 세우고 나머지 부분에는 외벌 장대처럼 돌을 다듬어 멋들어지게 설치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은 토벽집에서도 활용된다. --이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