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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by 운영자 posted Dec 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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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1. 개국사(開國寺)

(1)『신증동국여지승람』(권5. 개성부 하 고적)-- 개성부 동편 5리에 있다. ·이제현(李齊賢)중수기
    『익재란고(益齋亂藁)』와 같은 내용임) ·이규보시(李奎報詩) -생략- ·『중경지(中京志)』 이제
       현 중수기 --(같은 내용)--

(2)『명종실록(明宗實錄)』(권 11. 6년 2월 4일)--개성부의 유생등이 상소하였다. "개성은 고려 왕
       씨의 고도(故都)이다. 왕씨는 불교로 해서 망하였다. 지금도 연복(演福), 왕륜(王輪), 광명(廣
       明),개국사 터 등이 있다. 비록 황폐되었으나 구적(舊蹟)이 완연하다. (이하생략)

(3)  개국사탑 『고려사』(세가 권3. 현종 9년(1018) 윤4월)--이 달에 개국사탑을 수리하고 사리를
      봉안하고 계단을 열고 승도 3.200여인이 참석하였다.

2. 벽화(壁畵)

(1)『삼국유사』 흥륜사(興輪寺)의 벽화 제54대 경명왕 때 흥륜사의 남문 좌우 행각이 불에 탔는데
       다시 짓지 못해 정화, 홍계 두 스님이 다시 짓기를 발원하였다. 921년 5월 15일에 제석신(帝釋
       神)이 왼편 경루(經樓)에  내려와 열흘 머무는 동안 전탑(殿塔)과 풀, 나무, 흙, 돌이 모두 향기
       를 풍기고 연못의 물고기들이 기뻐 작약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 이 광경을 보고 찬탄하며 옥과 필육과 곡식을 시주하고 공장(工匠)들도 스
       스로 몰려들어 일을 하니 곧 이룩되었다.
       제석신이 장차 돌아가려 하므로 두 승려가 천신의 모습을 그려 모시고 정성껏 공양해서 하늘의
       은혜를 갚게 하시고 또한 이로 인해서 영상(影像)께서 이 세상을 길이 보호하게 하여주사이다"
       고 빌었다.
       천신이 이르기를 "나의 원력은 저  보현보살이  현화(玄化)를 두고 펴는 것만 못하니 이 보살의
       화상을 그리고 모시어 끊임없이 공양하는 일이 옳겠다" 하니 두 승려가 벽에  보현보살의 상을
       공손히 그렸으니, 지금까지도 이 보살상의 모습이 남아 있다.

3.동경 흥륜사 금당십성(金堂十聖)

       (흥륜사 금당의)동쪽벽에 앉아 서편을 바라다보는 흙으로 빚어 조성한 니상(泥像)은 아도(我
       道), 염촉(?觸),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이고 서편 벽에 앉아 동쪽을 향한 니상은 표
       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이다.

4. 단청






5. 목탑

(1) 성왕의 7층목탑

     『삼국유사』(阿育王塔) --고구려 요동성 밖에 있는 탑에 대한 고노(古老)들의 전하는 말이 있
        다.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던 중에 요동성에 이르렀다. 성밖에 오색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 찾아가니. 스님이 석장을 짚고 서있다. 가까이 가면 스님은 자취를 감추는데
        그 곁에 세 겹의 토탑(土塔)이 있는데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아 처음엔 그것이 무언지 몰랐다.
        그래 탑을 위로부터 헐어보니 처음엔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다음에 명(銘)이 나오고 그 위에
        범서(梵書)가 있었다. 한 신하가 그 글을 알아보고 불탑(佛塔)이라 하였다. 성왕은 불교를 믿
        는  마음이 생겨 그 자리에 7층 목탑을 세웠다. 뒤에 불법이 전해오자 비로소 그 시말을 자세
        히 알게 되었다. 지금 그 목탑 높이가 줄더니 마침내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이 통일한 인도에
        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고구려 땅에 탑이 있다한들) 괴상한 일이 아니다.
        성왕은 동명성제(東明聖帝)라 하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명제는 전한(前漢)의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 37)에 즉위해서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B.C 19)에 승하하였으니
        그 때라면 한나라에도 역시 불교를 아직 모르던 시절이다. 그러나 신하 중에 서역문자를 아는
        이가 있어 범서를 읽었을 것이다. 대개 진신의 사리란 그 감응되는 것을 헤아리기 어렵다

6.석탑

(1) 영탑사 7층석탑

     『삼국유사』--고구려 보덕(普德)스님이 성 서편 대보산(大寶山)아래 바위굴에 이르러 선관(禪
        觀)하였다. 이 때 신인이 와서 청하기를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석장으
        로 땅을 짚으며 "이 속에 팔각의 7층 석탑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땅을 파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영탑사(靈塔寺)라 하고 그 절에 상주하였다.

(2) 가락국의 5층석탑, 파사석탑

     『삼국유사』--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 파사석탑은 수로왕의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A.D 48년에 인도 아유다국에서 시집 올 때 싣고 왔다. 탑은 방형으로 5층이며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다.  돌은 우리나라 석질과 다르고 본초(本草)에서 말한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
        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