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한옥교실

청소년 한옥교실 08 - 한옥의 냉방

by 운영자 posted Dec 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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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약볕에 나가 뛰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돌아와 우물가에서 시원하게 목물하고 방에 들어가 누우면 차가운 방바닥으로 해서 등의 땀이 금새 싹 가신다. 찬 바닥을 골라 이리 '딩굴' 저리 '딩굴' 하다 보면 더위는 저만큼 물러나서 이제 배 잠방이 입고 일어나 앉을 만 하게 되었다.  

토담집은 흙벽이 두껍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막아주지만 여름의 더운 기운을 가로막는다. 담이 두꺼운 토담집은 출입구가 크지 않은 편이다.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 정도이다. 그런 토방(土房)은 바람이 따로 불지 않아도 뙤약볕의 마당보다는 훨씬 시원하다. 굴 속 같기 때문이다.

시멘트는 뙤약볕에 달구어지면 열기를 실내로 전달하지만 흙은 더위를 막아주고, 해가 떨어지면 시원한 기운을 되찾아 준다. 그 점은 더운 날 시멘트벽에 기대앉으면 후덥지분 하지만 흙의 두꺼운 담에서는 오히려 찬 기운을 느낀다는 경험에서 알 수 있다. 겨울이면 반대로 흙은 따뜻한데 시멘트벽은 찬 기운이 맴돈다. 우리가 21세기 오늘날의 한옥으로 토담집을 권장하는 까닭도 이런 장점 때문이다.

마루 깐 대청에 나간다. 시원한 화채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우니 석빙고에 들어와 앉은 만큼이나 시원해 좋다. 큼직한 태극선으로 슬슬 부채질하면 이제 더위는 남의 일이 되었다.

격을 차리는 사람이면 다리 짧은 좌탑(坐榻)에 올라앉는다. 사이를 두고 가지런히 박은 나무오리로 해서 좌탑의 바닥은 바람이 솔솔 통하게 되었다. 까실하게 왕골돗자리를 깔고 앉으면 이제 마련은 다된 셈이다.

새로 장만한 등걸이를 배 잠방이 속에 받쳐입는다. 의복이 몸에 착 달라붙지 않고 등걸이로 해서 사이가 뜨고 그리로 통풍이 되니 부채 바람이 깊은 사타구니에까지 시원하게 불어준다.      

삼복더위의 찌는 듯한 마당에 비하면 대청은 한결 시원하고 쾌적하다.대청은 아침나절부터 벌써 그늘에 들어 있어서 좌탑을 뒤편 바라지창 가깝게 자리 잡으면 뒷동산에서 불어드는 시원한 바람기로 해서 기분 좋은 졸음에 빠진다. 얼른 등걸이 벗고 잘생긴 죽부인(竹夫人) 끼고 대나무 죽침(竹枕)이나 사기로 만든 도침(陶枕) 베면, 머리가 상쾌해 지면서 남가일몽(南柯一夢)을 즐길 수 있다.

대청은 묘하게 태양열을 이용한다. 한옥은 처마가 깊다. 깊은 처마는 뙤약볕을 가린다. 볕을 가리니 그늘이 진다. 그늘은 나무 그늘이 시원한 것처럼 마당에 비하면 훨씬 서늘하다. 서늘하고 더워서 차이가 나면 공기는 서로 흐른다. 한옥은 그 점을 이용하고 있다.

한옥은 도심을 제외하면 대략 배산임수(背山臨水)하는 터전을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산기슭에 집터 잡는다. 시원한 숲의 바람이 집으로 분다. 뙤약볕의 마당에서 더워진 공기 쪽으로 찬 공기가 흐르는 것이다. 마당으로 가려는 공기가 집에 막혀서 처마 밑에 감돌고 있다.

이 기류가 아주 놀라운 여건을 조성한다. 소문을 들어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충북 진천 연곡리의 보탑사 삼층목탑 동편 약사여래상 앞에 놓인 수박은 사월파일에 올렸는데도 썩지 않고 생생하게 견딘다. 그 해 동짓날에 수박을 잘라 나누어 먹는데 그 때 까지도 수박은 상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시골 종가댁 뒤 마당에 오지 항아리를 묻고 일년 내내 제사에 쓰일 과일을 저장한다. 제철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비철에 쓰려는 준비인데 용케도 그 과일은 상하지 않고 여름을 지내고 한 해를 넘기기도 한다.

처마 밑에 항온항습(恒溫恒濕)의 기운이 있어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동력을 사용하지 않고 저장할 수 있는 이 이치를 우리는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 탐구가 과학적이라면 당연히 규명해야할 대상이 되며, 이는 한옥이 지닌 장점을 알아내는 한 단계가 된다.

집 뒤 처마에서 감돌던 바람기는 열린 바라지창을 통하여 대청으로 불어든다. 막혔다가 통과를 하니 공기가 속도가 붙고 풍속(風速)이 생기니 대청의 공기는 빠르게 유통한다. 그런 공기의 한 가닥이 대청의 삼각형 천장으로 불어 오른다. 피라미드의 각추형 처럼 생긴 천장을 휘감은 바람기가 대청 마루로 쏟아진다. 충진된 기(氣)가 대청에 좌기(坐起)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서니 여름에 탈진한 하였던 기운에 생동감이 자극을 한다. 과하(過夏)하는 보약을 따로 먹지 않아도 그만한 기운이면 거뜬하게 여름을 이겨낼 수 있게 된다.

복날에 뜨끈한 국물의 음식을 먹는다. 이열치열의 처방인데 시원한 토방이나 마루 깐 널찍한 대청에서 식구들이 모여 앉아 즐겁게 먹으면 여름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잘도 삼복더위를 넘긴다.

대청은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발달된 구조여서 매우 개방적이다. 그 개방성이 구들과 연합하여 한옥을 완성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채택되어 대청 앞쪽은 거의 개방된 구조로 남겨둔다. 대청은 그래서 큰 나무 아래정자나 다락집이나 원두막만큼이나 시원하게 냉방의 기능을 발휘한다.

열대야의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현대인들에게 대청 만들고 처마를 깊게 구조하라고 권하고 싶은 것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 형편에 종일 냉방하느라 그 비싼 기름을 소비하지 않아도 여름을 무던히 지낼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01년 주택은행 사외보에 실었던 신영훈선생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