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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의 살림집


(1)『後漢書』동이열전 제75

습속이 근검하여 나라님을 위해 궁실 가꾸기를 좋아한다.

其俗節食 好活宮室

(2) 『三國志』위지동이전 제30

고구려(요동의 동쪽. 남쪽으로는 朝鮮, 濊貊)과 접하고 동편에 沃沮, 북쪽으로 夫餘국과 접하고 있다.)
영토에는 산이 많고 골이 깊고 평야가 없어서 보통 산골짜기 기슭에 의지하고 집을 짓고 바위틈에서 솟는
물을 마신다.

多大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 食澗水

토지가 척박하여 곡식이 넉넉지 못하나, 백성들은 근검절약하고 궁실 가꾸기를 즐겨하며, 궁실 좌우에 큰
집을 짓과 귀신과 영성(靈星) 등에 제사를 지낸다.

왕실의 동편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朝服) 등을 간직한다.  때때로 그 의복을 꺼내다 입는데 그 작은 성을
책구루(瓔溝婁, 구루는 '구라'라는 말로 곳집[倉]을 의미하기도 함)라 부른다. '구루'라는 말은 고구려에서
는 성(城)을 일컫는다.

고구려의 귀족들은 농사를 짓지않는다. 그런 좌식하는 사람들이 1만여호에 이르렀다. 이들의 집에서 심부
름하는 사람들은 멀리서부터 쌀이나 곡식을 져오고 또 물고기나 소금을 공급하였다.

나라에서는 따로 큰 창고(大倉)를 설치하지 않고 대신에 집집마다에 작은 창고(小倉)을 지었다.
이 작은 창고를 이름하여 부경(부京)이라 불렀다.

[참고-- 申榮勳 : 「咸陽介坪里鄭氏宅小倉」·『美術資料』 1972년, 처음으로 부경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혼인이 정하여지면 신부집에서는 살림집 뒤에 따로 작은 집을 짓고 신랑을 맞아 살림을 하게
하였다. 그 작은 집을 서옥(壻屋)이라 불렀다.

『삼국지』 고려조 기록- 其俗作婚姻 言語己定 女家作小屋於大屋之後

(3) 『周書』열전 제41. 異域 上

토지는 매우 척박하여 백성들의 집은 절검(節儉)하여 겨우 모습을 이루는 정도에 그치고 여럿이 한 방을 쓰
고 함께 잔다.

불교를 돈독히 믿으면서도  음사(淫祀)하기를 즐겨하고  부여신(夫餘神)과 등고신(登高神)을 모신 묘(廟)에
제사 지낸다.

평양성 동서 길이가 6리 가량이며, 남쪽은 패수(浿水)에 연하였다.  성내에는 큰 창고가 있어 군수물자를 비
축하여 두었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성문을 닫고 고수하였다.

임금은 왕성 옆에 따로 집을 지어 두나 늘 상주하지 않았다.

(4)『舊唐書』 열전 제149

살림집을 반드시 산곡(山谷)에 짓는데 대부분 이엉을 이어 지붕을 만든다. 다만 부처님을 모신 절이나 신묘
(神廟)·왕궁·관부(官府)건물에는 기와를 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의 습속으로 겨울에는 모두 장갱(長橙,구들)
을 설치하고 불을 지펴 따뜻하게 지낸다.

基俗負?者多冬月 皆作長穀 下然?火以取暖






<고구려 정침내부의 생활상 -안악 제3호분 살림집의 구성>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살림집의 여러 부속 건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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