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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없었습니다. 한옥 문화원과 함께 집을 짓기로 결정하고 나니 이미 2월 중순이 후딱 넘어가 버렸습니다. 시기가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들 하지만 보통은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 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부터 서둘러 설계를 한다해도 얼추 3월은 넘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늦었다고 무턱대고 서둘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요.

  일단, 터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모눈종이와 연필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기에 내심 현장에서 대강의 설계를 하시려나보다 생각했습니다. 양평에 도착해서 잔설이 채 녹지 않은 터의 이곳 저곳을 꼼꼼히 살피신 선생님께서 집의 중심선을 어디에다 정할 것인지 또 좌향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은 건지 이런 저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터가 편안해서 좋다는 덕담도 잊지 않고 해 주셨지요.

 그런데 이제는 가려나보다 하는데 갑자기 "뭐 해? 어서 모눈종이에다 그려봐!"하시는 겁니다."네? 제가요?" "그럼, 건축주가 원하는 대로 집을 지으려면 직접 설계도 해야 하는 거야."  '아이고, 하느님! 우째 이런 일이?' 도리없이 쪼그리고 앉아 모눈종이를 펼쳤지만 정말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방에 앉았다 생각하고 눈 높이를 맞추어 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눈을 지긋이 감아 보기도 했지만 제겐 그저 한쪽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층층나무 꼭대기에 원숭이처럼 매달린 제 모습만이 떠 오를 뿐이었습니다.

그 꼴이 하도 안돼 보였는지 다행히도 선생님은 지금 잘 안 되면 집에서 그려 보라며 슬며시 숙제로 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는 있었지요.
   왜 일까요? 왜 제가 직접 설계를 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집에 대한 어떤 욕구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충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대청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도 우물마루로. 또 가능하다면 2층으로 짓고 싶다. 툇마루도 달면 좋고. 화장실은 친 환경적인 방식을 도입한다 등등.... 그런데 저는 그저 이런 건축주의 생각을 설계 전문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 역할은 끝나는 것이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설계는 설계 사무소에서 해줄 것이려니, 그냥 그러는 것이려니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모눈종이를 마주하고 앉으니 '이제 행복 끝, 고생 시작!'이라는 생각에 한 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솔직히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살아가며 도면을 그릴 기회가 어디 그렇게 흔한 일 이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이 터에는 ㄱ자 집이 어울리겠다는 힌트를 주셔서 집의 윤곽을 어림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우선 집의 형태를 그리고 나서 공간을 구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전체를 2층의 구조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아 부분 2층을 고려하였습니다. 우선 1층에 위치해야 할 공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재, 작은 대청, 건넌방,화장실, 계단, 주방,큰 대청 그 다음에 안방. 이것은 마당에 들어서서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서에 따른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2층에는 응접실과 마루 그 옆에 아이들 방을 그려 보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왜 제가 2층을 고집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집을 진다니까 자기들은 2층에 방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옥으로 지을 거라고 했더니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해요. 아마 아이들은 한옥이라면 당연히 1층으로 밖에 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사실, 지금도 제가 2층으로 한옥을 짓고 있다고 말하면 십중팔구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집도 있느냐며 못 미더운 눈초리를 합니다.) 갑자기 오기가 생기더군요.(그렇다고 오기로 집을 짓는 것은 아니구요 ^^;) 그래서 약속했지요. 꼭 2층에 방을 만들어 주마 하구요. 한편으로는 잘 지어 놓으면 한옥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한 몫을 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객이 와서 하룻밤 묵을 때 2층을 전용 공간으로 만들면 손님이 편안하게 쉴 수도 있을 것이구요. 이래저래 한옥을 2층으로 한다는 계획은 우리 가족에게는 참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ㄱ자 집에 이러한 공간 배치를 하고 보니 자연스레 이 공간들을 연결해 주는 긴 복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동선에 관계된 문제 이지요.

흔히 '한옥은 동선이 길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옥이 마치 쓸데없는 공간을 너무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21세기 살림집의 전형으로 남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는 것 처럼 평가절하 되기도 한다는군요. 동선에 관한 제 지식은 중고등학교 시절 가정시간에 잠깐 배운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때는 언제나 동선은 짧을 수록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선이 짧다'는 것이 그렇게 좋기만 한 걸까요? 제겐 '동선이 짧다'는 것은 곧 집에 '이야기 꺼리가 없다'는 말과 동일하게 들립니다. 재미가 없겠지요. 만일 저더러 제한된 공간을 분할할 때 효율성을 따질 것이냐 아니면 정서적인 면을 고려할 것이냐를 묻는다면 주저 않고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집은 자연히 동선이 길어지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첫번 째 작품(^^;)을 가지고 한옥문화원을 찾았습니다. 설계도를 보신 선생님께서는 몇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공간의 배치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크기 개념이 부족하다는 점,(사실 배치는 했지만 공간의 사이즈는 다 똑 같았거든요) 부엌이 어둡겠다는 점, 건물의 외벽이 너무 직선 일색이라 재미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벽선이 꺽이면서 들락날락하면 어떤가하는 문제) 사실, 이 부분은 두가지 면에서 저를 놀라게 했는데 제가 무지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러한 제안이 굉장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또 하나 벽선을 그렇게 처리하는 것은 귀틀집이 갖고 있는 매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꺽인 만큼 비용이 올라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울러 수납공간이나 가재도구들의 위치를 지정한 좀 더 구체적인 설계도를 요구하셨습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는 푸념도 해 보았지요. 적어도 그 때는 그랬습니다. 집에 돌아와 다시 궁리를 하고 머리를 짜내어 그려내기를 여러 번, 몇 번의 퇴짜를 맞은 끝에 드디어 이 정도면 이제 설계사무소에 넘겨도 되겠다는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가 그린 설계도를 가지고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설계사무소에 갔더랬습니다.  설계 참 잘했다고 칭찬 받을 줄 알았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그린 설계대로 집을 지으면 100평이 된다는군요.(허걱!) 학사재보다도 크데요 글쎄! 모두들 한심하게 쳐다봐요. '이게 아닌데.,... 아니라니깐요. 집의 구조나 배치만 보고 크기는 설계사무소에서 조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마음 같아선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창피하고 어려워서 그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고 맙니다.

  꿈은 거창했지만 이렇게 현실은 늘 제게 아쉬움과 씁슬함만을 남기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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