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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석 4자 대좌 12자 주실지름 24자
• 하늘-땅 조화이룬 '소우주' 구도
• 감실바탕 돔공법 으로 축조
• 지정된 곳 서야 본존상-광배 조화
• 머리 크게,높이올려 착시 교정
• 중지-검지 겹쳐 '성불의 환희' 담아
    
이 연재를 읽는 분들께서 석굴암을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하라는 주문이 많았다. 그동안 외국과 비교하며 부분부분 설명한 것으로는 부족했던듯 하다.

불국사를 다녀온 분들은 참 많다. 석굴암에도 그만큼 다녀왔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부터 차근히 설명해 본다. 석불암은 원래 석불사였다. 그렇게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 한다. 굴로 인식하는 기미가 강하다. 실제는 석실금당(돌로 지은 법당)이다.

석굴사원과는 조성하는 법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석굴은 바위벼랑을 파고 들어가며 만드는 것인데, 석실금당은 다듬은 돌로 쌓아 축조한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엔 토함산 말고도 석실금당의 예가 더 있다. 죽령 마루터기의 보국사에도 입불을 모셨던 신라시대 석실금당이 있었고, 계립령에는 고려초엽의 미륵대원이 있는데 석실과 목조건물을 절충하였다. 경남 사천의 다솔사 말사인 보안암에는 조선시대 석실금당이 있다.

대만 대북시의 용산사 대웅전도 일종의 석실금당이다. 기둥과 벽체가 돌로 구조됐다. 그러나 이는 석불사형 석실금당과는 성격이 다르다. 석불사형은 이웃나라에선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삼국유사 에는 불국사와 함께 시작되긴 하였으나 석불사가 먼저 완공된 듯이 표현되어 있다.

공사가 마무리 단계였다. 이제 연꽃 새긴 천장들을 마지막으로 올려 끼우면 완성될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그 돌이 굴러떨어져 세쪽으로 깨지고 말았다.

김대정(전설 김대성의 본명 경덕왕 10년=751년 이전까지 대상을 역임)은 크게 낙담한다. 공사 총책임자로서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는 없지만 완성 예정시간이 임박해있었나 보다. 기가 막힌 김대정이 눕고 말았다. 비몽사몽간인데 신인이 내려와 깨진 세쪽을 맞추어 감쪽같이 완성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뛰어나가 보니 벌써 일을 끝낸 신인이 저만큼 가고 있었다. 한달음에 뛰어오른 김대정은 향을 사르며 감사했다. 그 자리를 뒷날 향령이라 불렀다.

삼국유사 에 왜 이 대목이 서술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신의가 부회되어 있다는 것은 그 법당에서 표훈이라는 대덕 큰스님이 경덕왕을 위하여 자식 점지하느라 하늘에 출입하던 곳임을 은연중에 발설하려던 것이 아닌가 싶은 심증을 갖게한다.

석불사는 괴벽한 자리에 있다. 지금 산아래에서 올라가는 길은 1913년 일인들이 수리한답시고 뜯어갈 궁리를 하면서 만든 가도로 시작된 것이다. 원래는 불국사 뒷산을 얼른 치달아 올라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가다가 우뚝한 바위봉우리가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는 부근에서 내려가야한다. 석문을 지나면 잘생긴 바위벼랑 아래 낭떠러지 끝이 있고 그 곳에 제비집 같이 자리잡은 것이 석불사의 석실금당이었다.

그런 숨은 장소를 차지한 까닭이 신탁의 장소로 고려되었던 것이라면 석불사는 노출시키기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대성에게 부회된 미묘한 전설로 도회하여 숨바꼭질 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사람들의 출입이 제한된 금당은 진중할 수 밖에 없다. 신탁하는 도량이라면 그에 걸맞게 조성하는 성의를 보였을 것이다. 당시 신라 최고 선지식이 창출하는 높은 경지의 주문에 부응하여 완벽하게 조성하려 하였을 것이다.

우선 하늘과 땅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평면을 완벽한 수로 설정하고 정방형으로 잡았다. 24척 사방의 정방형이다. 그에 내점하는 지름 24척의 정원을 금당주실 평면으로 하였다. 천원과 지방과의 만남과 교합이다. 금당의 주인공 본존여래상이 올라앉은 둥근대좌의 지름은 12척이다.

금당 주실 앞쪽에 다시 24척 사방의 평면이 설정된다. 본존 앞에 이르는 사천왕상이 좌우에 서있는 통로와 행의하는 장소인 전실을 거기에 안치했다.

주실과 전실 평면은 전체 길이가 48척이다. 주실 벽둘레의 11면관음, 십대제자, 사대보살상을 조각한 판석의 넓이는 4척이다. 이 수만 보아도 4, 12, 24, 48이 응용되고 있다. 이런 수가 기본이 되어 구축된 석실금당을 수리에 따라 분석하면 삽도와 같은 해석이 가능해 진다.

우주의 운행과 땅의 운세와 기운이 하나의 초점이 되면서 잉태하여 결실하게 하는 조화를 의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도 보수공사 때 현장감독관으로 상주하고 있었다. 칠흑같은 밤에 촛불을 켜들고 들어가 살펴보는 조사도 하였다. 촛불을 본존의 앞과 뒤편 대좌 위에 하나씩 켜놓았다. 그때만 해도 전기가 들어와 있지않은 시절이었다.

본존과 둘레의 조상들이 다정하게 다가서고 있었다. 이들은 정면을 향하고 서있지 않고 들어오는 입구쪽을 바라다 보고 있어서 들어가면서 자연히 다정하게 상면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촛불로 연출된 음양의 입체적 효과로 해서 그만 감동이 한층 증대되고 벅차오르는 환희를 경험하게 했다. 이웃나라 석굴사원 조각들의 경직된 분위기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매력이 여기에 있었다.

의식은 전실에서 하게 마련이다. 본존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자리가 지정되어 있다. 본존과 석실 중앙을 통과하는 중심축이 있고 이에 교차하는 부축선이 있다. 전실 팔부신장상 첫번과 두번째 상이 접합하는 위치에서 부축선이 그어진다. 이 두 선의 교차첨에 서야 제자리이다. 키가 5척가량이면 눈 높이가 가장 좋다. 본존상과 둥근 광배가 잘 어울려 보인다. 지정석에서 이탈하면 광배와 머리가 어긋나 보인다. 광배가 머리에 부착되지 않고 석실 뒷벽에 따로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광배와 본존의 머리와 바라다보는 눈이 일직선상에 있을 때만 비로소 정돈된 모습이 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늘어서서 기도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에서 구도한 의지라고 해석된다.

본존상을 먼저 제자리에 모시고 석실을 조성했다. 공정의 순서가 그래야 했다. 그러니 내부에서 작업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작업은 주로 바깥에서 해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보살-제자상을 새긴 판석 뒤로 상당량의 적심을 채워 올라가야 발디딜 자리가 생기고 작업도 가능해진다. 지금도 다른 방도는 없다. 판석 위에 감실이 있다. 판석보다 두께가 두텁다. 자연히 판석과 적심에 걸터앉게 된다. 이는 판석을 적심에 고착시키는 효과도 있다.

반구형의 궁륭천장(do-me)이 감실에서부터 축조된다. 기발한 기법을 창안한 것이다. 긴 돌을 적심 깊숙하게 박아 단단히 고정시켰다. 돌 앞머리에 턱을 만들고 거기에 의지해서 천장돌을 쌓아올렸다. 마치 우물마루에서 귀틀에 청판 끼우듯이 하는 기막힌 기법이다. 둥근 천장의 3백60도 전면을 매켜마다 그렇게 하였으니 끄떡없을 수 밖에 없다. 1910년대 앞부분이 약간 훼손되었을 뿐이다. 본존상을 조각한 기법도 놀랍다. 머리를 크게 만들고 높이 올려 착시현상을 교정했다. 인자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웃나라 불상에서 보기 어려운 자비의 미소다.

오른손이 무릎에서 아래로 향했다. 항마촉지인이라 부른다. 부처가 성불하면서 마구니의 항복을 받았다는 표시다. 그 손의 늘어뜨린 손가락의 검지가 중지를 슬며시 올라탔다. 삼매경에 들어 한소식 하면서 환희가 절정에 이르면 저절로 손가락이 그렇게 되더라는 득도한 스님의 증언이 있다.

웃음과 함께 조각가 스스로가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는 감히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고의 조각가가 최상의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이웃나라 여러 석굴사원을 함께 답사하고 다니던 일행들이 다시 토함산 석불사에 갔다.

"아마도 석불사를 꽃피우기 위하여 그 많은 석굴들이 있었나봐요. "

내 귀에는 그 결론이 지나친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다.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발행일 : 1995.09.26  기고자 : 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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