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총두침 백두산 향하고 있었다.(조선일보)

by 운영자 posted Jul 0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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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 아! 고구려 역사탐방단 중국답사 화강암 천 6백 개 동방피라미드
• 집안 국내성 축성술서 철 다루는 문화민족 확인
• 고구려인, 고분 습도-온도까지 조절 원상태 보존

고구려 왕조는 사라졌어도 고구려 문화는 살아있었다. 조선일보 아! 고구려 역사탐방단 2백18명은 a, b 두 팀으로 나누어 지난 7월24일부터 중국 집안의 고구려 고분과 유적, 백두산, 북경의 자금성과 만리장성을 탐방하고 31일 귀국했다. 연방여행사 안내로 고구려 두 번째 서울이었던 집안에 도착한 탐방단(단장 김명규)은 오회분과 무용총, 국내성,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환도산성, 통구고분군 등을 둘러보며 고구려 문화의 실재를 확인했다. 역사학자와 문화재전문가 4명으로 구성된 강사진의 자세한 설명으로 고구려 유적을 대할 때마다 참가자들은 고구려 문화의 독자성과 세련미, 그 웅혼한 기상에 자신들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여기저기 훼손되고 방치되다시피 한 고구려 문화재를 보고는 큰 아쉬움을 나타냈다.

오분 현란한 색감

중국 연길을 거쳐 백두산 천지와 장백폭포를 관람한 탐방단 a팀은 26일 오후 중국 집안에 도착했다. 탐방단 a팀은 먼저 압록강과 중국 집안~북한 만포간 국경철교를 둘러보고 27일 고구려 유적탐방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탐방단 a팀은 첫 번째로 집안박물관에 들러 오회분과 무용총 벽화 모사도와 광개토왕비 탁본, 화살촉과 칼, 솥 등 생활용품을 관람했다. b팀은 집안으로 먼저 들어가 고구려 유적을 보고 백두산을 등정했다.

고구려 후기 고분인 오회분 5호묘. 이 묘에 들어서자 참가자들은 현란한 색감으로 모든 벽면을 가득채운 벽화를 보고"아!"하는 탄성을 질렀다. 꿈틀거리는 것 같은 현무 주작 청룡 백호의 모습. 1천3백~1천4백 년 전 고구려인들의 숨결을 그대로 느끼는 듯 한 표정이었다.

"벽면에 그렸는데도 어떻게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입체감이 저토록 뚜렷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 진주에서 왔다는 김영철씨(40)는 "숨결이 멎는 것 같다"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사진으로 탐방단에 참여한 이화여대 신형식교수가 오회분 유래와 벽화 등에 대해 설명했다. 신교수는 "이 고분은 고구려인들이 습도와 온도를 적당하게 조절한 고구려 건축기술의 총화"라며 "이 때문에 벽화가 거의 원상태로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말했다.

웅혼한 기상의 무용총

고분 밖에서 참가자들은 강사인 윤명철박사의 고분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윤박사는 "고구려 고분에는 고구려만의 독자적인 사상과 생활이 표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뜻밖에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는 고구려 초기 고분인 무용총을 관람할 기회를 가졌다.

무용총 안으로 들어오자 참가자들은 오회분과는 다른 고분구조와 벽화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춤추는 여인들, 호화로운 장막, 씨름하는 고구려 사람들.

강사들은 "이 고분은 무용도가 있는 단순한 무용총 이 아니라 고구려의 한 시대를 축조해 놓은 살아있는 역사"라고 말했다.

탐방단이 무용총 다음에 들른 국내성은 집안시 중심에 있었다. 해자가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고 성벽도 3~5단 정도만 남아 있었다.

서희건 문화재 전문위원은 국내성 북쪽 성벽에서 탐방단에 동쪽 5백55m 서쪽 6백65m 남쪽 7백50m 북쪽 7백15m의 국내성 규모를 밝히며 압록강과 통구천을 자연 해자로 활용한 고구려인들의 슬기를 확인시켰다. 거대한 화강암을 떡주무르듯 다룬 고구려인들의 축성술은 곧 양질의 철을 다룰 줄 알아야 가능하며 그러한 상황이 고구려벽화의 야철의 신 과 2천여 년 가까이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국내성의 성벽에서 읽혀진다는 것이다. 서위원은 "고구려가 중국과 싸워 패했지만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던 고구려 문화는 이 지역에서 발흥한 요, 금, 청나라의 바탕문화로 중국문화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한-중-일 학자들 간에 아직도 역사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광개토왕비. 그 중요성 때문이었든지 신영훈, 서희건, 윤명철씨 등 3명의 강사가 역사, 한일관계, 비문내용을 실물을 보며 설명했다. 주목을 끈 것은 "광개토왕비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본래 위치에서 뒤로 밀려나 있다"는 지적. 신영훈위원은 그 흔적을 확인시키면서 "능비인 이 비석이 이같이 교란된 이유 때문에 광개토대왕릉을 못 찾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고구려 탐방의 하이라이트는 장군총이었다. 장군총은 정교하게 다듬은 1천6백여 개의 화강암으로 축조된 동양의 피라미드 . 직사각형 모양의 돌 사이에는 종이가 안 들어갈 정도로 정교하게 축조되어 있었다.

"3층목탑 건축 추정"

신영훈위원은 장군총의 구조를 설명하며 주목되는 연구를 내놓았다. 몇차례 장군총을 답사, 연구한 신위원은 장군총의 상단에 위치한 현실은 구조상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면서 그위에 삼층목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군총의 주변에서는 지금도 고구려 시대의 기와가 출토되고 있어 건물이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식의 무덤은 발해로 이어져 그 유적이 중국 땅에 남아있다.

신위원은 "장군총같은 피라미드는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면서 "한반도문화가 모두 중국문화가 흘러와 형성됐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북아지배 입증"

탐방단원들은 이번 탐방에서 장군총의 두침이 북향을 하지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들은 집안지도를 펴놓고 두침방향인 동북 52도로 선을 그어 나갔다. 그 곳에는 백두산이 있었다. 탐방단원들은 감격했다. "고구려가 동북지방을 지배했고 백두산은 우리의 성산임을 장군총도 증거하고 있다"고 흥분한 것이다.

탐방단은 환도산성을 직접 올라보고 부근 고분군을 둘러보았다. 고구려 문화를 보는 눈을 새롭게 갖게된 탐방단원들은 중국의 자랑인 북경의 자금성에서 그 우람한 기둥들이 작은 기둥들을 묶어 천으로 싸고 그 위에 회를 입혀 주칠을 해서 말끔하게 보일뿐 우리나라의 통나무기둥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번 탐방단에는 광주 고려고 함수남교감 등 교사 11명과 하나기기 대표 이명래씨(59) 등 서울고 동문 6명 등이 단체로 참여했다. 소설가 최인호씨(49)와 이문석 전 총무처 장관, 어명하 명지대 교수, 이천 문화원장 이은구씨, 일본인인 고우무라 가오리씨(31)도 탐방단에 있었다.

                                                                    발행일 : 1994.08.02  기고자 (집안) 서교 기자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6 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