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조선일보)

by 운영자 posted Jul 0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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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산을 거점화 유사시 백성대피(우리문화 이웃문화 32)
• 귀퉁이엔 귀중품 보관하는 '미로'
• 고구려성벽 퇴물림법으로 쌓아
• 일,평지서 높게 가신만 보호
• 중,낮고 넓게 울타리개념

17세기 후반의 화가인 한시각은 함경도 길주성 관아에서 치른 과거시험 장면을 비단 두루마리 화폭(674.1 57.9㎝)에 자상하게 그렸다. 성벽, 성문과 관아, 주변 마을까지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성문밖 해자에 걸려 있는 나무다리다. 성문 앞쪽의 나무다리는 중간이 잘려 있다. 잘라진 끝에 줄이 결색되어 있다. 끈의 한쪽이 성밖에 세운 홍살문 같은 시설을 거쳐 성내의 물레에 감겼다. 물레를 감으면 줄이 당겨지면서 나무다리가 들린다. 통행이 불가능해진다. 일종의 현교인 셈이다.

문종실록에 재상 금종서를 비롯한 분들이 의주성에 현문을 설치하며 노력한 상황이 서술되어 있다. 그림의 현교와 더불어 주목해야할 자료이다. 성문은 적이 몰리는 공격목표로서 방어책을 고심해야 한다. 역대 여러 성곽에서 여러가지 방안이 채택된 중에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것으로는 신라 삼년산성(충북 보은군 사적 235호)의 서문이 으뜸이다.

이 산성은 자비마립간 13년(470)에 완성된다. 3년이나 공력을 투입했다 해서 삼년성의 이름을 얻었다. 이 성은 소지마립간 8년(486)에 개축된다. 상주에서 화영 넘어 보은으로 진출하는 거점이며 백제 공격시에 문무왕이 왕래하며 머물던 요새다.

서문은 노문의 구조다. 드나드는 큼직한 문짝 위에 바짝 문루가 올라가 있는 유형이다.

공격군이 닥치면 문루에 숨었던 군사가 맹렬히 대항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닌 성문이다. 로문은 나무로만 완성된다. 듬직한 목재를 쓴다. 그런 문의 기둥과 벽체가 서 있었던 심방석과 문지방돌이 지금도 제자리에 남아 있다. 문짝을 달았던 문지도리홈도 보인다. 홈의 구성으로 보아 문짝이 밖으로 열리게 되었다.

아주 드문 구조다. 보통은 문은 안으로 열린다. 영화에서 보듯이 당차(바퀴 달린 긴 통나무를 밀고 가서 문짝을 부수는 공성구)로 충격하면 문빗장(장군목)이 부러지면서 성문이 열린다. 그런데 문짝을 밖으로 열게 하였으니 공격무기들이 소용없게 된다. 더구나 성문 밖은 좁다.

성문이 낭떠러지 끝에 위치, 문밖이 넓을 수 없게 되었다. 수레와 수십명이 자리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다. 문에 이르는 길은 높은 성벽 밑을 지나게 되었다.

공격군이 이 길을 뚫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기막힌 지형의 이용이다. 바보 온달이 장군이 되어 신라를 공격하는 선봉장일 때 쌓은 성이 지금의 란양땅의 온달산성이라고 마을 어르신네들은 직접 보았던 일처럼 소상히 들려 준다. 이 성도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이 성은 남한강이 감돌아 드는 굽이를 똑바로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다. 높은 산에서 널리 내려다 보고 있어서 적병이 물길(남한강수로) 따라 움직인다면 영락 없이 포착되겠다. 이런 온달산성은 고구려 북방의 산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형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태자성은 태자하를 내려다 보고 있고 연주성도 강이 성 밑으로 흐른다.

지형을 기막히게 이용한 점에서는 만리장성도 어지간 하다. 동쪽끝 산해관은 석성이 바다에 들어가 있다는 것 외에는 신기하지 않지만 열하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장성이나 팔달령의 성은 경관이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서쪽 끝인 가욕관의 장성은 설산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경치가 그만이다.

만리장성과 반대 되는 것이 일본식 성이다. 대판성을 비롯한 각지역, 명성으로 손꼽히는 성들은 대부분 평지에 있다. 만리장성이 강역을 한 쌈지로 감싼 광역의 울타리라면 일본 성은 주인과 그의 가신과 무사들만 포용할 수 있는 너비로 조성된다.

비상시에 백성들을 성내에 입보시킨다는 개념에서는 벗어나 있다. 평지이고 좁은 면적이어서 성벽을 높게 쌓아야 했고 망대를 겸한 천수각이 허공에 솟아 올라야 했다. 그에 비하면 만리장성은 성벽이 낮으나 넓다. 줄기차게 빈틈 없이 멀리도 쌓았다. 북방민족의 침입방지가 임무다. 고구려로부터 서역에 이르는 지역의 사람들을 주시 하겠다는 각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제약한 족쇄일 수도 있다.

고구려가 남긴 성을 찾아다니다 보니 그점이 더욱 실감나게 느껴진다. 다 알다시피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에 동명성왕이 최초의 서울로 정하였던 도성이 해발 8백20m 고지에 있다. 흘승골성이다. 유리왕이 천도한 압록강가 집안의 환도산성도 7백m가 넘는 고지에 성벽을 쌓았다. 그외 대부분의 고구려 성벽도 높은 산 능선에 축조했다. 그리고 흐르는 강이 가깝게 있다.

이들은 높은 산으로 해서 어디에서나 바라다 볼 수 있다. 특히 광야에 면하여 있는 높은 산은 일종의 등대와 같아서 대지의 끝에서도 바라다 보인다. 방향을 잃지 않고 찾아갈 수 있는 이점을 지녔다.

성 밖으로 나서지 않겠다는 마음의 만리장성이 경계이던 시기에 고구려 산성 주변의 옥토는 다 농사 지을 수 있는 땅이었다. 아무리 멀리 나가도 산성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라면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사냥할 수 있었다.

이는 성과 성을 이은 선을 국경선처럼 생각하던 관점에서 벗어나게 한다. 거점에 자신있는 백성들이 농사 짓던 땅까지를 강역으로 보아 좋다고 한다면 고구려는 훨씬 더 넓은 지역에서 자유로이 활동하였다고 할 수 있고 이론상으로는 그 경계가 만리장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차즉 하면 들의 곡식을 거두어 산성에 입보하면 청야에서 적군은 식량공급의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적의 예봉을 꺾고 지구전에 돌입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다.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적인 방책이다. 여러 차례의 승리를 점검해 보면 그런 점이 눈에 띈다.

고구려성의 한 특징이 성내 한쪽에 일곽을 형성한 부분이다. 이를 삼국지 (삼국지 진수가 편찬한 사서)에서는 책구라고 했다. 구루 는 고구려에서 성을 일컫는 이름이다. 책은 머리수건을 의미하는 점에서 성의 한귀퉁이를 지칭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몇 곳의 성에서 그런 흔적을 보았다. 연주성에서는 중성처럼 간장(샛담)을 쌓고 문을 내었는데 옹성으로 문을 엄중하게 한 흔적까지를 볼 수 있었다.

유사한 구조가 삼년산성에서도 발견된다. 서문 반대편 동변에 있는데 입구를 잘 찾지 못하면 들어가 보지 못하고 헛수고로 끝나는 수가 있다.

이렇게 숨겨진 자리는 성내에 보존해야할 귀중한 것들을 갈무리 하던 시설이 있던 곳으로 해석된다.

삼국지 의 고구려전에서 특별히 책구루 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쪽의 성곽에는 이런 시설이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성벽쌓는 방법도 서로 다르다. 아래쪽에 단이 이루어지도록 물려 쌓는 퇴물림법은 고구려 성벽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집안의 국내성에서도 그런 기법으로 쌓은 성벽을 볼 수 있다.

일본 대판성 성벽과 같은 선의 조성을 고구려의 천추총이나 서대총 같은 고분 축조에서도 찾을 수 있다. 큰돌로 쌓는 기법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구려는 역시 만만치가 않다.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발행일 : 1995.10.25  기고자 : 신영훈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6 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