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6 10:39

목탑(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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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서 발원한 "목재건축연금술"(우리문화 이웃문화 31)
• 소실된 신라 황룡사 9층탑 "대표작"
• 중국에도 파급 일의 불탑은 우리 기술로 완성시켜
  
이집트에 가서 보고서야 겨우 터득했다. 스핑크스가 지키고 있는 카이로의 피라미드 중에 작은 무덤을 배총(어르신네 무덤 뒤에 쓴 작은 사람들의 무덤)으로 거느린 것도 있었다.

고구려 집안의 장군총에도 배총이 있다. 여럿이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남았다. 피라미드의 배총은 세개였다. 나란한 것들 중에 가운데 것은 보통의 피라미드형과 달랐다. 정방형 평면에서 장군총처럼 층단을 두면서 돌로 쌓았다. 형상이 장군총과 아주 흡사하다.

초기의 피라미드는 장군총과 유사한 구조였다.

피라미드를 만들기 시작한 멤피스(memphis)지역 것들이 그렇다. 카이로의 피라미드는 후대에 발전한 형태다.

유사하다는 점에서 보면 초기 피라미드형이 장군총이 되어 고구려에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에는 장군총류의 무덤이 많았고 가야, 백제, 신라에도 파급됐다. 심지어 삼국인들이 건너가 활약한 왜국의 일부 지역에도 토탑이란 이름으로 존재한다. 토탑이라 하나 실재는 웅산탑의 예처럼 장군총형 석탑 구조다.

장군총이 대표하는 이 유형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의문만 탱천할뿐 나는 아직 잘 모른다. 누구도 그에 대하여 내게 일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옛기록에 조금 나온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 에서 잠시 언급한 토탑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스님은 목탑도 말했다.

반가운 기록이다.

고구려 요동성의 아육왕탑에 대한 기사에서 였다.

성왕이 3층의 토탑을 보았다. 위에 솥을 엎어놓은 듯하여 처음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사람 시켜 파 보니 범서가 나와서 비로소 불탑임을 알았다. 곧 믿음이 생겨 그 자리에 목탑을 세웠다 고 하는 내용이다.

스님은 계속해서 성왕을 동명성왕이라 하나 의심쩍다. 동명왕(bc 37년 즉위, bc 20년 승하)시절엔 한에서 조차도 아직 불법을 몰랐을 터인데 누가 벌써 범서를 알아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때 혹 서역의 문자를 아는 자가 있었을 것이므로 범서라 한 것같다 고 풀이할 수 있게 서술했다.

스님 지적처럼 한나라에도 아직 불법이 전래되지 않은 시기에 고구려에 벌써 전법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역과 연락이 있었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을만 하다는 생각을 그렇게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솥을 엎어 놓은듯한 부분을 머리에 얹고 있는 인도형 묘탑과 유사한 것들이 고구려에 이미 들어와 있었고 그것을 토탑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까닭이다.

동명성왕은 곧 신심이 생겨 탑을 다시 쌓을 때 토탑을 재건하지 않고 목탑을 세웠다. 토탑을 헐고 목탑을 세운 시기에 큰 시차가 없다면 성왕은 어설픈 토탑의 모방보다는 기술이 축적되어 있는 건축가에게 7층의 목탑을 조영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동명왕은 아들 유리에게 찾게 한 신표를 일곱모 난 주춧돌과 소나무 기둥 사이에 숨겨둔다. 고급기술로 완성한 목조건축물이 동명-유리왕의 부자혈연을 확인하는 무대 가 된 것이다. 바위로 일곱모 주춧돌을 다듬고 거대한 나무 기둥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고구려에서 목탑은 낯선 구조물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내세울 수 있게 한다.

목탑은 양질의 목재가 풍부한 고장에서나 조성이 가능한 건축물이다. 발전과 보급이 그런 여건이 완숙한 고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면 목탑은 목재의 고장인 고구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무시되어야할 까닭은 없다.

일설에 황하유역은 급속한 사막화로 일찍부터 황폐하기 시작하여 목재 결핍이 심각하였다고 한다. 이는 오늘에 이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차츰 묘탑이 보편화되면서 장군총 같은 피라미드 묘실 위에 목탑을 세워 규범을 갖췄을 것이다. 이는 동위의 향당에 유사하기는 하나 향당이 2층 건물임에 비하여 고구려는 다층의 위용을 응용, 한 발 앞서 있었을 뿐이다.

이런 사조는 우리문화로 이어진다. 발해국의 분묘위에 전탑을 세우는 일로 답습된다. 그한 예가 압록강가 탑전 언덕 위에 현존하는 전축분(벽돌로 쌓은 묘실이 있는 무덤)과 그 위에 세운 5층전탑이다.

탑은 사람들이 하늘을 우러러 쌓아올린 정성이다.

장군총은 장대한 석대로 조상에 감응하고 탑을 세워 신불의 영험을 기리려 하였다.

그것이 장군총류의 기본형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역문화회랑등을 통하여 파급되는 견식도 기탄없이 응용했다. 고구려 건축가들의 멋진 창작의욕이 발현한 걸작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한인들이 감히 생심하기 조차 어려운 특이한 건축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고구려에서 피어난 꽃이 한반도 남방을 거쳐 왜국에 까지 파급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목탑의 첫 손가락은 신라의 황룡사 구층탑이다. 인도에도 동남아에도 중국이나 일본에도 그만한 목탑이 없다.

중토에도 현존하는 목탑은 드물다. 중토에서 완연한 것의 대표는 산서성 응현에 있는 불궁사의 5층탑이다. 평면이 8각이다. 8각형등의 다각형 건물은 다분히 북방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불궁사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성향으로 보아 그것도 고구려와의 관련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현존하는 역대 불탑 중에는 벽돌로 짓거나 벽돌과 나무로 합작한 것들이 있다. 규모가 장대하고 상층까지 올라갈 수 있게 만든 것이 중토의 예라면 일본에 현존하는 중요한 불탑은 대부분 목탑이다.

목탑들은 사방불을 봉안한 1층만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바깥 형태는 날씬하나 건축적 구조는 별로 볼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우리나라에는 그나마 잔존하던 목탑들마저 임진왜란으로 사라졌다.

삼국시대 이래 무수하게 경영되었던 목탑의 소식은 문헌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이런 역사가 못내 아쉬웠다. 이웃나라 보다 월등하였던 세월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다. 기술력도 뛰어나 있었다. 목조의 기술은 지금도 상류이다.

백제 건축가 아비지가 황룡사 구층탑 짓는 일에 특별초빙되었듯이 기술력이 부족하면 그만한 목탑 짓기가 어렵다.

오늘날 사는 우리들도 발심하였다. 원기를 본받아 고급기술을 발현시켜 3층의 목탑을 짓기로 뜻을 모았다.

아구(유라시아) 대륙의 고탑들을 돌아보고 우리의 옛 기술을 더듬고 오늘의 기술을 모아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성의 탑을 쌓아 올린 것이다. 그 형체가 광복 50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충북 진천읍 보탑사의 삼층목탑이 이제 완성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높이가 43m이다. 아파트 15층 높이와 맞먹는다. 우리의 3층 개념이 얼마나 장대한가를 알 수 있다. 이웃 나라들의 덩치 큰 건물에 기 죽을 까닭이 없다. 그러니 황룡사 구층탑은 얼마나 높았으랴 비교하여 볼만 하다.

황룡사 구층탑이 삼국통일의 염원을 담았다면 오늘의 보탑사 삼층탑에는 남북통일의 기원이 알알이 영글고 있다.

그 정성에는 수많은 문화인들의 식견이 열매를 살찌게 하고 있다. 환희의 동참인데 그런 소식이 어느덧 널리 퍼져서 벌써 순례하는 마음들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의 새로운 회심이 하늘을 향하고 정성을 모아 우뚝하게 솟아 올랐기 때문일까.

고구려에서 시작된 흐름이 오늘에 우리에게 이어지면서 작은 바탕에서 큰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목탑을 완성시킨 것이다. 옛날과 오늘이 한바탕 위에 있다는 현인의 말씀을 우리는 몸소 실감하고 있다. <글=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발행일 : 1995.10.17  기고자 : 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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