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2336 추천 수 15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세계 유례없는 백제 와박사제 현대건축법 활용/도깨비-연화문 등 걸작 남겨 일에 "기와 예술지도"/맞물려 고정하는 건식공법 터득/신라와만 3백종 넘어

한옥의 기와골 끝에 장치하는 무늬 놓은 기와를 막새라 부른다. 암키와 끝에 무늬판 드림새가 달렸으면 암막새이고 수키와에 달리면 수막새라 부른다.

수막새 무늬 드림새는 지름이 10~17㎝가량이다. 여기에 연화, 보상화, 서초. 서조수와 도깨비 형상이나 인물상이 무늬로 만들어져 베풀어진다. 무늬는 도드라지게 양각하는 방법이 일반적이고 가장자리에 윤곽선을 돌려 강조한다. 윤곽선을 굵게 하고 연주무늬를 장식하기도 한다. 크지 않은 무늬판에 도안을 완성시키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건축주들은 특색 있기를 희망한다. 같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무늬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연꽃이다. 형상이 두세가지로 한정된 것이어서 아무리 기발한 착상을 해도 유사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기와 라는 책에서 수집 분류한 종류는 무려 3백점을 넘는다. 신라시대의 것만으로 그렇다. 그만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또 고구려, 백제, 신라 막새들은 각기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한 눈에 구분해 낼 수 있을 정도다.

참담한 고심에서 우러나온 창작일 터이다. 그 어려움에서 전문가 배출이 기도되고 육성된다. 백제에서는 와박사 제도를 두었다.

고구려에선 이미 기원전에 기와집을 지었고 4세기경의 수막새들이 수습되고 있다. 이런 노력이 일찍부터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와는 만들기도 어렵고 이기도 쉽지 않다. 지붕을 치장하는 장엄이 발달하면서 여러가지 부속기와들이 채택되고 그만큼 지붕을 완성하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와박사들의 고심이 그만큼 커졌다. 그런 점을 백제건축가들이 왜국의 법흥사(법흥사 원흥사 또는 비조사로 부르기도 한다)를 지은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588년, 백제 위덕왕은 왜국에 불사리를 전하여 주면서 율사, 사공, 노반박사와 와박사 마내부노, 양귀문, 능귀문, 석마제미, 그리고 화공 백가 등을 파견하여 법흥사를 창건하게 한다. 이 기록에서 다른 분야에 비하여 월등히 많은 와박사가 파견되었음을 본다. 기와를 백제에서 싣고가지 않았다면 현지에서 제작하고 시공해야 하였을 것이다. 그 어려움을 감당하도록 여럿을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장식에는 여러 부속품들이 사용된다. 그중에 도깨비를 형상하였다고 하는 귀면기와도 있다. 단청하는 분들은 그것을 나티 의 형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도깨비 장식기와도 삼국마다 제작하였고 특성을 지녔다. 그중에 녹유라 부르는 유약을 입힌 작품도 있다. 아주 탐스럽게 웃고 있는 활달한 얼굴이 무늬의 내용이다. 이들은 잡귀를 물리치는 소임을 부여받고있다고 해서 벽사무늬로 분류된다.

백제가 멸망하자 다수의 인물들이 왜국에 이주한다. 신라군이 뒤쫓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북구주 하카다항 내륙에 대재부(다자이후)를 건설한다. 663년경의 일이다. 이 공사에 사용되었다고 보이는 도깨비 장식기와들이 발굴 수습되었다. 그들은 백제의 그것에 아주 흡사하다.

후대가 되면서 일본인들은 19세기에 탈아세아를 지향하였듯이 9세기 이후로 탈삼국을 시도한다. 왜의 문화가 급속도로 저하한다.

최근세의 도깨비 기와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붕의 도깨비 기와들은 웃음을 잃었고 지나치게 긴장하여 오히려 표독스럽게 보일 정도이다. 구수하고 넉넉한 금도는 아주 가셨다.

일본 법륭사(호오류지)의 지붕에도 그 유형이 등장하였다. 삼국기의 난숙한 목조건축물 위에 너무 긴장되고 과장된 기와지붕이 형성되었다. 아쉬운 노릇이다.

중국에는 도깨비 기와가 흔하지 않은 편이다. 이를 두고 말하기 좋아하는 유식한 분들이 일러 주었다.

도깨비 기와란 원래 동두가면을 쓰고 신병을 거느리고 황제군과 황하유역에서 세력을 다투던 환웅의 장수인 치우장수의 모습을 본뜬 것이어서 중국 사람들이 피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족이 경영한 건축물에서 보다는 중원에 진출한 북방민족들의 치세때 건립한 건물에서 도깨비 기와를 찾아보기가 쉽다.

도깨비 형상을 무늬로 정리하고 거기에 의미심장한 내용까지를 가미한 작품으로는 백제 방전이 으뜸이다. 백제 도성이었던 부여의 한 절터에서 산경문전 등과 함께 나온 도깨비 무늬의 방전은 다시 볼 수 없는 걸작품이다.

불상을 봉안하던 불단에 치장되었던 장식용 방전도 백제의 유능한 와박사에 의하여 제작되었다고 보인다.

이들은 대단한 것을 만들어 내었을 뿐만 아니라 시공에서도 발전한 기법을 구사하였다.

방전을 습식 공법의 하나인 접착제로 벽체에 부착시키지 않고 현대건축에서 최신기법이라 하는 건식 방법과 같은 방도로 부설한 것이다.

방전 네귀퉁이의 파진 홈에 쇠붙이로 만든 은정을 박아 상하와 좌우 방전들과 연계시킨 것이다. 맞물리면서 고정되는 방법이 응용된 것이다. 역시 우리 와박사들의 노력이었다. <글=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발행일 : 1995.05.30  기고자 : 신영훈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6 13:19)

(우)03056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길 103-7 전화 : 02-741-7441 팩스 : 02-741-7451 이메일 : urihanok@hanmail.net, hanok@hanok.org
COPYRIGHT ⓒ2016 한옥문화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