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3 16:50

단청(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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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에서 '원류' 발견(우리문화 이웃문화 25)
• 벽-기둥에 직접채색 천붙여 칠하는 중-일과 달라
• 한-사슴뿔접착제 1000년을 그대로
• 중-금색만 잔뜩 색채-빛 한수아래
• 일-두가지색 뿐 중국식 헝겊도배

집 짓는 일이 완성 단계에 이르면 단청을 한다. 지금 진천의 보탑사 3층 목탑도 한창 단청을 하고 있다.

암채(광물질로 만든 천연 안료)나 석채(모래나 흙에서 채취한 안료)를 접착제인 어교(주로 민어의 부레로 만든다)나 아교(아교 소의 뼈로 만든다)에 갠 다섯가지 색채(장단, 삼청, 황색, 양록, 석간주색)를 만들어 목재 표면에 무늬 따라 채색하는 일을 단청한다 고 한다.

단청 안료는 보통 서역에서 수입해다 쓴다고 옛기록에 보인다. 그만큼 귀한 재료이기도 하다. 지난번 서역의 여러 고장을 다니다 보니 깎인 바위 틈에 여러가지 색의 암채가 드러나 있었다. 그대로 긁어다 물에 풀고 앙금을 앉혀 말린 뒤에 고운 가루를 접착제에 개어 그리면 바로 옆에 있는 동굴(수없이 많은 화불을 그린 천불동)의 벽화가 되겠다.

이런 벽화도 단청이라 불렀었다. 단청은 회화의 옛말이다. 회화는 회와 화의 합성어인데 그림의 유형에 따라 회와 화로 나누었다.

조선조의 도화서에도 선화(종6품)와 선회(종7품), 그리고 화사(종8품), 회사(종9품)의 전문가를 구분해 두었다.

단청의 전문가를 대략 화사, 화원이라 불렀는데 회화사상 저명한 작가인 이상좌(조선조 초기 화가)나 김명국(인조때 화가)도 화원으로 단청 일에 종사한 바 있었다.

단청은 대략 예부터 전하여 오는 초상(밑그림)에 의거하여 어려서부터 훈련된 바에 따라 법도 있게 진행하는 일을 위주로 하고 있어서 작가의 계맥이 뚜렷하고 작품도 경향이 비슷한 것이 보통이다.

현업하는 분으로 신언수, 한석성과 박준주 단청협회 회장이 대표적인 원로들인데 수십년씩 종사하였고 모두 70세를 넘겼다.

1963년도 서울 남대문 중수시에 벌써 화업의 편수-소임을 다한 한석성 선생을 문화재 중수나 벽화를 모사에서 으뜸으로 친다. 그 경지가 난숙을 지났다는 평판인데 이 분의 능력은 옛법에 따르되 새로 창출하는 창작도 가능해서 오늘의 단청을 구현하는 일에도 참여하고 있다. 보탑사 삼층탑의 단청은 한선생에 의하여 완전히 새로운 방도를 개척한 개성미 넘치는 작품으로 완성되고 있다. 고구려 이래의 여러 무늬들을 자유스럽게 채택-구사하면서 명품을 이룩하였다.

이런 법고창신의 정신은 고식적이고 교조적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한선생은 송나라에서 간행한 건축의 교과서 격인 영조법식 에 실려있는 단청무늬 표본도를 보면서 우리 단청에 비하면 한 수 아랫길에 속한다고 약간 낮추어 본다.

신언수-박준주 선생은 지난 4월에 북경을 비롯한 중국 여러 지역의 건축물을 돌아보면서 단청을 살폈는데 색채나 빛의 배색이나 보색에서 원리를 따르지 않고 공연히 돋보이게 하느라 금색만 잔뜩 입혀서 도포하였다고 역시 평점을 후하게 주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 건축의 단청은 목재 표면에 바로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쪽으로 합성한 재목을 헝겊으로 싸바르고 다시 흙으로 도포한 위에 색을 칠한 것이어서 우리와는 감각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노라고 하였다. 그런 기법은 천단에서도 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단청한 헝겊을 도배하여 완성하였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북경 공묘(공자님 모신 곳)의 대성전 내부 우물반자에서 단청하여 발랐던 헝겊의 한쪽이 떨어져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우물반자에는 나무로 설치하는 청판이 보이지 않는다.

이분들은 집안에 가서 공개하고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실견하였다. 색채의 배열이나 채색의 기법이 어쩌면 그렇게 지금의 우리 단청과 같을 수 있느냐면서 몹시 흥분하였다.

너럭바위의 거대한 판석을 곱게 다듬고 그 면에 바로 그린 그림이 오늘에 이르도록 생생한 것은 안료도 안료려니와 접착제가 비상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감탄을 연발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접착제는 사슴 뿔을 고아서 쓴것이 아닌가 싶다고 조심스럽게 검정하였다. 실제로 그것을 써보지는 못하였지만 어르신네들이 말씀하시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그럴 가능성이 짙다고도 하였다.

당나라 벽화는 기법에서 차이가 난다는 말도 슬며시 하였다. 벽화 뿐만 아니라 불화에서도 그런데 그나마도 우리와 같은 거대한 화폭의 대규모 상단탱화는 명나라 이래로는 조성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고도 하였다.

박준주 선생은 불화를 그리는 금어도 겸하고 있어서 그 방면의 소견에도 일가견이 있다.

일본 단청은 가칠(한가지 혹은 두가지 색만으로 칠하는 것 칠도 이에 속한다)이 위주인데 아마 서역에서 수입해야 하는 귀한 안료를 입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말을 전에 일본 화원에게서 들은 바 있다고 하였다.

자연히 단청은 격조 높은 건물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정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전에 일본에 갔을 때 보았더니 거기 단청도 그린 그림을 도배하듯 하더라고 한다. 청수사의 큰법당 조차도 그렇더라고 하였는데 우리 연재에서 사진을 보여주고 있는 김대벽 선생이 기묘하게 도배한 것이 일부 떨어져 너덜거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명치신궁만은 본격적으로 단청을 하였는데 매우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다른 건축물 대부분이 서까래가 네모난 목재인 각인데 비하여 신궁에서는 우리식의 둥근 서까래 연목을 썼다.

우리나라의 둥근 서까래 연목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건물에도 묘사되어 있어 아주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한다.

신궁의 단청은 금단청의 계열이며 머리초 구성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보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명치신궁은 일본에서 아주 격이 높은 건물인 듯한 인상이다.

이들 세 분 원로들의 결론은 단청의 종주국은 아마도 고구려일 듯 싶다고 반만 입을 열고 조용히 말하였다.

그분들은 평생을 종사한 진솔한 단청의 대가들이어서 겸양할 줄은 알지언정 속단이나 과장은 금기로 알고 있다. 이분들의 결론을 나는 귀 기울여 들으려 한다.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발행일 : 1995.09.05  기고자 : 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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