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3 16:55

기둥(조선일보)

조회 수 2409 추천 수 17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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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 부른 배흘림기법 이 특색(우리문화 이웃문화 27)
• 헬레니즘 영향받은 고구려양식
• 조시고려 가장자리 기둥은 안쏠림
• 중-일은 목재귀해 배흘림 드물어
• 대부분 작은 기둥들 잇대어 제작
  
조선일보의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단에 끼여 매년 따라가고 있다. 금년 정월의 청소년의 배 를 타고는 아주 가슴 뭉클한 희열을 맛보았다. 또렷한 눈동자, 밝은 얼굴로 여지 없이 찔러가며 거침 없이 질문하는 소년소녀들에게서 우리의 밝은 장래를 보는 듯했다. 이런 일이 큰 사업이구나 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왜 저렇게 엄청나게 크게 지어야만 하였느냐 는 질문을 동대사 남대문 앞에서 받았다.

전에 어른들 모시고 다닐 때 들어보지 못하던 날카로운 의문이다. "글쎄다. 조금 부족한 듯싶은 사람이 남 앞에서 공연히 어깨를 으쓱거리듯이 뽐내려 하는 마음에서 저만큼 욕심을 부리지 않았나 싶다. "학생은 다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대략 그러려니 싶었던지 깡충깡충 뛰어 앞서가는 자기 대열 속에 끼여 들었다.

내가 보아도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목수의 식견에서 그렇다. 과장은 조선말엽 경운궁(덕수궁)에서도 하였다. 고종은 없는 경비를 투입하여 경운궁을 중창한다. 아관파천에서 돌아갈 궁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정전인 중화전을 2층으로 지었다가 불에 탔다. 엎친 데 덮친 꼴이 되었다. 다시 짓는다. 돈이 없어 고층으로 지을 수 없게 되자 과장을 한다. 지붕을 크게 만든다. 장중하게 보이려는 의도이다. 무리하게 되었고 결국 아름다운 건물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동대사 대불전이나 그 남대문이 아름답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건축구조의 측면에서도 적정하지 못하다. 너무 호대하다보니 그에 걸맞는 길이나 굵기의 기둥감이 없다. 도리없이 인공으로 만들어 쓰는 수밖에 없다. 가는 기둥감 여럿을 이어 길이를 늘이고는 외곽에 쪽나무 여러 가닥을 빈틈 없이 접합시켜 가면서 싸감는다. 마치 나무통 메우듯이 하고는 단단히 못을 박아 고착시키고 대철(죄어맨 쇠띠)로 다시 한번 보완한다.

동대사 대불전에서 볼 수 있는 기둥의 모습이다. 북경이나 숭덕(열하)의 장대하고 엄청난 전각들의 기둥들도 이런 형상이다. 역시 부족한 목재를 극복하지 못한 채 과장한 결과이다. 천단(북경)의 둥근 평면 건물을 보면서 기둥 사이를 건너지른 창방 도리등을 어떻게 다듬었을까 하고 바라보았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헝겊 틈새로 합성한 목재가 보였다. 결국 별수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목재로 곡률을 만들기 어려운 부분에서는 표면을 감싸 바른 헝겊으로 적당히 마무리하고 말았다.

합성한 재목은 입힌 겉옷으로 해서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지만 오래되어 겉옷이 헤어진 자리에는 속살이 들여다 보인다. 목재 부족의 현장 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송나라는 목재를 남방에서 가져다가 부족한 지역의 건축을 도왔다. 겉목을 다듬어 배에 실어 운하로 운반하여 공급하는 제도를 운영한 것이다.

황하유역의 목재결핍은 한나라 이후로 심각하였다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어 있다. 당나라까지는 그런대로 견딜만 하였다는 설에 비하여 설득력이 있다. 지금도 중국의 목재는 백두산 일대와 흥안령산맥 일대에서 주로 공급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도에도 이 지역 여기저기에 임장(나무 저장소)의 표시가 있다.

예부터 그랬나 보다. 이런 특성이 이 지역의 주인이던 고구려의 목조건축을 발전시켰다. 벽화나 석조물들을 통하여 고구려인들의 배흘림 기둥의 조성도 알 수 있다. 배흘림 기둥은 양질의 목재가 풍부하여야 하고 기술이 고도화된 지역에서나 발전한다고 한다.

황하 북부지역을 하북이라 한다. 이 일대에서도 배흘림 기둥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하북의 분위기는 이른바 중원지역과 문화바탕이 다르다. 살림집 유형도 다르다. 서역이나 북방계열에 속한다. 공공건물도 마찬가지. 중국 건축사가들은 이지역 건축물을 북방계로 분류하려 시도한다. 그 시원이 요나라에 있다고 하였다.

요나라는 916년에 건국한다. 발해가 사라지면서 그 강역을 차지한다. 요나라는 아직 유목생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계란(글안)족이 세웠다. 그들은 고구려와 발해가 축적한 문화의 바탕에서 혜택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배흘림 기둥의 기법은 서역과 연관되었다고도 한다. 헬레니즘과 인연이 닿았다고 하며 북방문화가 유통되던 문화회랑에 유구들이 점재한다고 한다.

기둥은 가장 보편적인 재목이나 아주 까다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은 집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착각을 교정해 주어야 방정하게 혹은 안정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자리에 서있는 귀기둥은 다른 기둥들에 비하여 높이가 높다. 귀솟음이라 한다. 귀솟음이 있어야 좌우 끝이 처져 보이지 않고 상큼한 모습이 된다. 중국, 일본건축엔 귀솟음이 드물다.

기둥을 세울 때 정확하게 수평을 잡는다. 그러나 바라다 보는 눈에는 좌우끝이 약간 처져 내린듯이 보인다. 시각의 착각인데 우리는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교정하려 하였다. 고급의 높은 안목이고 기술력의 발휘이다. 우리는 귀기둥을 수직으로 세우지 않는다. 곧바로 세우면 머리가 바깥으로 벌어진 듯이 보인다. 역시 착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45도 각도로 안으로 약간 눕힌다. 안쏠림인데 이를 오금법이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이 기술이 스러지고 만다. 우리는 지금도 이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배흘림 기둥은 위가 좁고 배가 부른 특성으로 해서 안쏠림의 효과를 극대화시켜주는 성과를 함께 지니고 있다. 집이 돋보이는 소득도 있다. 배흘림 기둥은 위가 좁다가 차츰 배가 불러진다. 기둥 높이의 약 3분의 1 쯤에서 가장 배가 불렀다가 차츰 좁아지면서 주춧돌에 당도하는 선을 지닌다.

삼국시대로부터 배흘림 용례가 점고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과 벽화에 그려진 기둥에서 볼 수 있고 신라때 만든 국보 57호의 철감선사탑에서도 찾아진다. 탑의 탑신에 표현된 작은 기둥이지만 20배쯤 확대하면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만한 그런 형상이 된다.

목주로는 고구려계 건축물로 평가되기 시작한 일본 법륭사의 기둥을 손꼽을 수 있다. 이 기둥의 머리에는 고구려 특색을 잘 보이는 주두가 있다. 지난번 주두 (연재 19회)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는데 동대사 대불전 주두도 닮았다고 하였다. 약간 굽받침이 퇴화하였는데 그와 같은 것이 고려시대 조영된 강릉 객사문(국보 51호)에도 있다고 지적하였었다. 이 문의 배흘림 기둥은 법륭사의 기둥과 그 형태가 아주 유사하다. 배흘림 기둥은 보정사 극락전(국보15호), 부석사 무량수전(국보18호), 수덕사 대웅전(국보49호), 부석사 조사당(국보19호) 등의 중요 건축물들에서 볼 수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풍부한 편이다.

비록 한가닥의 기둥이긴 하지만 탐색에 따라서는 수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공술의 발달이 함축되어 있고 문화의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

기둥에는 또다른 일면이 있다. 잘자란 나무의 가지를 치고 겉목만 다듬어서 천연스러운 형체인 채로 세운 기둥이 있다. 조물주와 합작하려는, 천연에 동화하려는 기쁜 마음이 담겨진 기둥이다. 이는 배흘림 기둥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만하다. 놀라운 이율성인데 우리는 두가지 흐름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뛰어난 심성을 발휘하였다.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발행일 : 1995.09.19  기고자 : 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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