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석주"우리문화 이웃문화 34"(조선일보)

by 운영자 posted Jul 0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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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에 짐 얹은 석인상 고구려~옛 이집트 분포
• 파르테논 신전 돌기둥과
• 화엄사 3층석탑 같은 양식
•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잇는 공동의 문화요소
  
새벽 비행기를 타고 카이로에서 룩소로 갔다. 나일강가의 룩소는 고대 이집트의 문화유적이 있는 고장이다.

먼저 강 건너 서편부터 보기로 했다. 주검의 계곡이 강 건너에 있다. 강가의 마을을 떠나니 온통 숲이 없는 들과 산이다. 산에는 골짜기가 있고 수많은 무덤들이 있었다. 공개하는 무덤에 들어 가니 벽화가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을 그렸는데 비교적 상태가 좋았다.

무덤에는 통로 한편에 작은 방이 있다. 부장품들을 넣었던 곳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 구조와 유사하다. 피차 석실고분이란 점도 동일하다. 벽화를 그렸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닮은 점이 많다는 뜻이다.

강을 건너 다시 동쪽 마을로 돌아왔다. 석조 신전을 구경하고는 유혹하는 키 큰 말에 이끌려 19세기풍의 바퀴 큰 마차를 탔다. 시가지 구경에 나섰다.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다.

무심결에 지나치다 아차 싶어 눈여겨 보니 머리에 짐을 인 여인이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짐을 잡지 않고 잰 걸음으로 활갯짓 하며 걷는다. 이는 일이 몸에 밴 동작이다.

그렇다. 머리에 인 석인상이 신전에 있었다. 여럿이 줄지어 서서 상부구조를 떠받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사람이 돌기둥이 되어 상부구조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상부구조는 다 허물어져 이고 있던 부재의 형상은 볼 수 없으나 맞은 편에 줄지어 서있는 둥근 돌기둥과 더불어 떠받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머리에 상부구조를 이고 있는 완연한 인형석주는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에서 볼 수 있다. 몸에 착 붙는 의복을 입고 한쪽 발을 내 딛는 듯이 서 있는 자세로 머리에 똬리를 얹고 이고 섰다. 짐을 인 여인을 보는 중에 옛일이 떠올랐다. 6 25때 나는 돈암동 전차 종점 부근에 살았다.

언덕 위 높은 지대여서인지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랫동네 공동우물에서 길어다 먹었다.

누이가 물동이를 똬리 위에 받쳐 이고 가면 물 지게 지고 뒤뚱거리며 뒤따라가던 생각이 났다.

누이의 똬리는 언제나 말쑥하여서 늘 아름답게 보였던 생각에 나도 모르게 쿡하는 웃음이 터졌다. 마부가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돌아다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한 눈을 찡긋해 보인다. 밉지 않은 인상이다.

그런 중에 생각이 이어졌다. 조선조 화가들이 그린 풍속화로 머리에 짐을 인 여인이 묘사되어 있다. 단원 화백의 그림이었는지. 지게 진 남정네와 아이 업고 머리에 짐을 인 여인이 다정하게 수작하며 가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도 있었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보았던 기억도 되살아 났다. 도기(다기)인지, 향로인지를 머리에 이고 있는 석인상이 있었다. 신라시대 작품이라 하였다.

생각이 또 번진다. 지리산 화엄사에는 2층의 큰법당인 각황전이 있다. 뒷산 중턱에 효대가 있는데 국보 35호인 사사자 삼층석탑과 따로 만든 석등이 있다. 신라시대의 작품들이다.

탑의 구조는 큼직한 기단 위에 다섯의 기둥을 세워 상부 탑신을 받게 하였다. 다섯의 돌기둥 중 네귀퉁이 기둥은 사자로 새기고 중앙기둥은 스님을 형상하였다.

스님과 네마리 사자가 머리에 탑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스님은 연꽃대좌 위에 합장한 자세로 단정하게 서서 머리에 똬리를 얹고 탑신을 이었다. 똬리도 역시 연꽃장식을 했다. 스님이 기둥이라면 똬리는 주두인 셈이다.

파르테논신전 석인들도 머리에 주두를 얹고 이고 있어서 같은 계열의 구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네마리 사자들도 연꽃방석에 앉아 탑신을 머리로 떠받쳐 이고 있는데 역시 연꽃 새긴 똬리를 사용하고 있다. 이고 있는 탑이 무거운가 보다. 앞발로 단단히 받쳤는데도 목이 움츠러 들었고 어깨는 으쓱 솟아 올랐다. 무거운 것을 이고 버티고 앉았을 때의 형상을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득의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석등은 탑에서 약간 떨어진 위치에 있다. 젊은 스님이 공경하는 자세로 머리에 석등을 이고 앉았다. 탑을 머리에 이고 공덕을 쌓고 계신 큰스님을 찬탄하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일련의 작품을 통하여 머리에 이는 일이 그 시절에 습관이되어 있었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그런 관습은 그 이전부터 전래하여 보편화 되었던 것임을 알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이집트 여인들의 이는 습속도 오래된 전통 계승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그 관습의 바탕에서 신전의 석인들이 머리에 상부구조를 이고 있도록 하는 표현이 발상 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동과 서가 닮았다? 전혀 연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동쪽과 서편의 지역에 같은 맥락의 문화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의문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머리에 짐을 인 여인은 일본, 류구나 중국과 서역에서도 보았다. 세계 여러나라를 다니며 살핀 지견인데 이런 유사한 현상이 점점이 분포되어 있는 광범위한 지역이 있음에 주목하게 되었다. 공통성의 문화유산을 지닌 이들 지역을 나는 문화회랑으로 보고 싶다. 같은 맥의 문화요소가 왕래하던 통로였다고 규정해 보려는 시각이다.

문화회랑의 동쪽끝에서는 고구려가 중심 세력이었고 후대에 계승되었다. 북방민족들의 활동무대였던 지역과 서역을 지나 바이칼호반과 스키타이의 흑해와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을 문화회랑에 포괄하였으면 한다. 회랑의 서쪽 중심권인 지중해 연안에서는 이집트도 포함시켜야 하리란 생각이다.

좀더 많은 탐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비로소 실체를 알 수 있게 되리란 기대이긴 하지만 우선 이렇게 설정하여 우리의 시각을 증대시켜야 관계자료가 눈에 뜨이기 쉽게 된다는 점에 유의하고 있다. 널리 다니며 본 경험에서 터득한 식견이기도 하다.

머리에 이는 관습을 바탕에 둔 문화현상이 동과 서의 중심지역에 분포되어 있다는 점을 주시하는 까닭도 우선 실마리를 잡으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인다는 습속과 거기에서 우러난 문화성을 우연한 단순 유사성에 불과하다고 무시해야 할 까닭이 없다면 나는 이 자료도 문화회랑 탐색에 이용해야 마땅하리란 생각을 마차 속에서 하였다.

어느덧 잘자란 가로수 그림자가 나일강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석양 놀이 빛나고 있다. 새로운 여명을 잉태한 찬란한 놀이다. 내겐 그것이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축복해 주는 상서로운 기운같아서 석양의 룩소 거리를 두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신이 나서 달렸다.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발행일 : 1995.11.07  기고자 : 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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