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3 16:04

입석(조선일보)

조회 수 2115 추천 수 16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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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요한 생산 고구려 신앙흔적(우리문화 이웃문화 14)
• 풍년-득남 비는 "미륵님"
• 만리장성~일본 넓게분포
• 중국-열하 망치바위 엔 행운비는 인파
• 일본-아스카선 지금도 고구려 기풍제

몇해 전 경북 성주에 회오리 바람의 피해가 있었다. 비닐하우스가 휘말려 올라가 크게 농사를 망쳤다.

얼마 뒤에 보니 굵은 참대들이 곳곳에 섰다. 궁금하여 알아보니 영감님들 지혜인데 죽간을 세우니 피해가 현저히 줄어들더란다.

아마 회오리가 죽간을 타고 맴돌다 하늘로 치솟아 버리는 듯하다는 설명이다.

순창에서는 마을 주변 여러 곳에 돌기둥을 세웠다. 입석마을이란 칭호도 생겼는데 예부터 있어온 것이라 한다. 마을 노인장들은 옛말에 촌장님댁 대문앞에 입석하는 것이 통례였다 고 전한다고 했다.

신탁이 거기에서 진행되던가, 촌주의 권위를 상징하던 것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는 말씀들이다.

전남 남평의 한 마을 어귀에 갓모처럼 만든 것을 쓰고 있는 입석이 있었다.

무엇이 그런가 싶어 벗겨보려 하였더니 주민들이 기겁을 한다. 그것을 벗기면 마을에 바람이 들어 여인들이 큰일 난다고 한다. 입석을 미륵님이라고도 부른다.

미륵님에게 함부로 손 대어도 부정 탄다고 어서 바삐 지나가라는 손짓이다.

남해섬에서도 미륵님을 보았다. 길쯤한 천연스러운 돌인데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빌고 있었다. 아이 못낳는 서러움을 벗어나려는 일구월심의 치성이었다.

그런 미륵님은 전북지방에도 있었다. 무늬를 치장한 잘생긴 듬직한 물건이다. 원래 옆에 음샘이 있었다고 하였다.

경주 역사와 지리를 소상히 기록한 동경잡기 는 경주 남산에 서 있는 미륵님을 소개하면서 아들을 빌면 영험이 있다하고 그것을 기자암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삼국인들이 집단으로 이민해 가서 개척하고 발전시킨 도시가 일본의 아스카 (비조 명일향)이다. 5세기말, 6세기초 왜의 서울이 되었던 고장이다.

지금은 시골마을 처럼 변모하였지만 영화를 누리던 역사의 자취는 아직도 허다하다.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던 고송(다카마스)총이 발굴된 곳도 여기다. 고송총에서 고구려 복색의 여인을 그린 벽화가 나왔다. 이 고장 산기슭에 비조좌(아스카니마쓰)라 부르는 작은 신사가 있다.

왜국에서 최초로 개창된 절인 비조사(아스카데라 원흥사 또는 법흥사)가 바로 내려다 보이는 자리이다.

백제의 여러 건축가들이 경영한 절이나 배치법은 고구려적이다. 초대 주지스님이 고구려의 혜자스님이셨다.

아스카니마쓰 신사는 지금도 86대째의 대물림한 신관이 지키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신사임을 알 수 있다.

신사 경내 구석구석에 무수한 작은 돌멩이들이 열지어 있는데 형태가 양물거나 음석들이다. 그중 제일 좋은 자리에 대표적인 미륵님이 따로 모셔져 있고 금줄을 잡수셨다.

매년 2월 첫번째 일요일에 일본에서 사대성신사 로 알려진 온다굿 ( 제)을 거행한다. 음양이 교합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진중한 의식이다.

음양 교합의 결과는 생산이다. 풍년은 식생활을 해결하는 가장 행복한 결과이다. 그것은 생활의 풍요를 수반한다. 현대인이나 고대인들을 막론하고 기풍의 의식은 중대한 것에 속한다.

지역에 관계 없이 미륵님들을 정렬시켜 보면 삼국시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은 풍년들기를 염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국중대회의 중심 제의도 이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2차대전 이전의 코카사스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의 풍습을 조사해 보고한 글이 있다. 공통점이 많더라고 하면서 고구려 옛 강역을 벗어난 남방에서는 이런 사례를 볼 수 없더라고 하였다.

무수한 주민들이 넓은 터전에 모인다. 중앙에 거대한 입석, 미륵님을 세운다. 그리고 나선형 계단을 설치한다. 여자 무당이 춤을 면서 계단을 밟아 정상으로 올라간다. 절정은 무당이 정상에서 흐트러지게 춤을 추면서 막바지에 이르는데 교합하는 장면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춤사위더라고 하였다.

영고나 동맹과 같은 국중대회가 열렸었다는 사실을 국사책에서 이미 배운바 있다. 또 고구려 수도이던 집안의 동부에 국동대혈이라 부르는 신사의 처소가 남아 있다.

경주 남산 동편의 마석산에 거대한 입석이 섰다. 아래 마을에서 이를 신체로 삼고 동제를 지냈었다. 잘 지내면 넓은 들에서 추수하는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한다. 그 입석은 신라 건국 이전부터 거기에 있었다.

전체 길이가 1㎞밖에 되지 않는 세계에서 제일 짧은 강이 있다. 열하라 부른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가 그 고장까지 다녀온 기행문인데 청나라 왕실에서 이 곳에 피서산장을 경영하였다.

피서산장이 있는 고장에 그들이 망치바위 라 부르는 거대한 입석이 있다. 워낙 크고 높은산 위에 있어서 중요건물을 촬영하면 반드시 한귀퉁이에 끼어드는 배경과 같은 그런 물건이다.

만져보고 싶은 사람들로, 올라가는 길이 사람띠로 이어졌는데 한번 만지기만 해도 운이 좋고 수명이 연장된다는 속설이 있다.

피서산장이 있는 승덕은 만리장성 밖에 있다. 만리장성 안팎의 문화는 다르다. 청나라 역시 만리장성을 넘어들어간 동북의 민족이다. 승덕의 사원들은 성밖의 색북지방 사람들과의 친화를 위하여 라마교식으로 조영하였다고 한다. 망치바위 에는 중국문화를 대변하는 한족문화와는 다른 이질적 요소가 다분하다. 이런 문화가 고구려의 옛터로부터 오늘의 우리나라와 일본에 남아있다. <글=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발행일 : 1995.06.06  기고자 : 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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