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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 역사문화대학 유적지-사찰 답사 " 동학 명칭조차 통일    안 돼 씁쓸"
• 전통사찰 찾아 천연의 건축법 확인도

조선일보 제22기 역사문화대학 수강생 1백8명은 지난 24-25일 전북 정읍군과 고창군 일대의 동학관련 유적지와 전통사찰을 답사했다.

수강생들이 먼저 찾은 곳은 동학 농민군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고택. 전북 정읍군 이평면 조소마을에 자리 잡은 이 집은 1894년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킬 당시 서당 훈장을 하며 살던 곳으로 생가는 아니다. 1백 년 전에도 그랬을 것 같은 야트막한 야산 주위로 논과 고추밭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조용한 이 마을 초입의 고택에서 정읍문화원 최현식 원장이 첫 강의를 했다.

"이 세 칸짜리 초가가 동학혁명의 진앙지인 셈입니다. 그러나 전장군이 처형당하고 나서는 집안이 풍비박산돼 가족도 모두 흩어져 집의 위치도 잊혀졌지요. 그러다 70년대에 전장군의 장녀가 나타나 증언해 주어서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적지로 지정만 돼 있을 뿐 그 당시를 짐작할 만한 유물은 전혀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전봉준 생전부터 있었다는 집 앞 우물도 형태만 갖췄을 뿐 쓰레기가 둥둥 떠 있어 일행을 씁쓸하게 했다.

이어서 수강생들이 찾은 곳은 농민군이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승리를 거둔 황토현 전적지. 제폭구민 보국안민(제폭구민 보국안민) 이 새겨진 기념탑 앞에서 최원장은 "이곳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동학군은 정읍-고창-영광-함평-전주 등의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1백년이 지나도록 민권-민주, 척왜를 내걸고 봉기했다 희생당한 수많은 농민군에 대한 연구는 물론, 명칭조차 통일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원장은 기념탑 비문이 보국안민 (통상은 보국안민)인 것은 "당시 기록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강생들은 동학유적지에 대한 답사에 이어 신영훈 문화재전문위원의 안내로 내장사-백양사-선운사 등의 전통사찰을 찾아 선조들의 지혜를 더듬어 보았다. "기둥이 두 개인데 왜 일주문이라고 부르는지 이상하지요? 그건 기둥이 몇 개라도 수직으로 나란히 서있으면 일주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 신위원은 전통사찰의 입구에서부터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천연의 맛을 그대로 살려낸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수수께끼 풀이하듯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절집은 억지로 산을 깎아 짓는 것이 아니라 천연의 산하에서 뭔가 빠진 것 같은 곳을 찾아 지었습니다. 그러니 자연과 잘 어울릴 수밖에요. 심지어 대웅전의 용마루도 자세히 보면 수평이 아닙니다. 주변의 산 모양과 어울리게 약간 비뚤게도 지었지요. 인공적인 서양 건축물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지요. "

신위원은 특히 기둥과 대들보가 가공하지 않은 나무 그대로인 선운사 만세루를 설명하면서 "이런 천연스러운 멋을 제대로 살린 건축법은 지금 중국-일본 등에서는 모두 사라져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며 "무조건 외국 것을 좋게 보는 풍토는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행일 : 1994.06.28   기고자 :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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