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6 10:55

석굴사원(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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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황석굴에 새겨진 고구려 벽화(우리문화 이웃문화 35)
• 불꽃무늬-극락조-치미 '고구려식' 빼박아
• 한-일에 대형석굴사 없는건 기후탓

조선일보사의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단은 부산항을 떠난 8천톤급 여객선이 하카다(박다)항에 도착하자 20대 가까운 대형 버스로 행렬을 이루며 일본의 유적지를 누빈다. 아마 조선통신사 일행이 으쓱대며 큰거리를 활보한 이후로 벌어지는 장쾌한 행렬이랄 수 있다.

백제인들의 업적인 수성과 대재부터를 거쳐 삼국계 유물이 출토된 선산고분을 보고 수증기 내뿜는 아소산에 이르면 벌써 짧은 겨울날이 저문다. 강행군한 피로를 별부의 온천탕에서 풀고 이튿날 오이타(대분)로 이동한다. 하카다항에서 옮겨와 대기하고 있는 전용선을 타고 아름답다는 세토(뢰호)내해를 거쳐 오사카로 가기 위함이다. 오이타도 구주(규슈)의 다른 지방이나 마찬가지로 이쪽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나누어 살며 문화생활을 영위하던 곳이다. 지금도 한민족 관련 많은 문화재들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그중에서 석굴사원도 주목할만하다. 오이타의 석굴사원들은 바위벼랑을 파내어 만든 불교사원이긴 하나 발달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본존상을 위시한 권속들이 내부 벽면에 부조되어 있긴 해도 굴내공간이 협소해서 겨우 두어 사람이 운신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 석굴도 시원치 못하다. 바위벼랑에 굴을 파고 들어가 앉으면 여름철에 바깥은 햇볕이 쨍쨍한데 굴 속에서는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습기가 시원한 석굴 안벽에 이슬로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풍토로 해서 석굴사원은 발달하기가 어려웠다. 고작 경북 군위군에 있는 국보109호 군위삼존석굴을 손꼽을 수 있을 정도다.

인도에서는 석굴사원이 크게 발전했다. 무덥고 메마른 지역에서 석굴은 쾌적한 장소였다. 후대 불교가 동방으로 전파하면서 유사한 기후 여건을 지닌 고장에서 석굴사원이 활발하게 조성되었던 것도 그런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손오공이 놀았다는 화염동천의 천불동 석굴에 가서 느낀 감상은 이런 동굴이 아니고서는 어렵겠구나하는 깨달음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라 생각되는데 인도에서는 사원 이외에 승려들이 거처하기위한 승원이 석굴로 조성되었고 그 방도가 주변 국가로 파급되었던듯하다. 이 승원은 사원과 함께 발전했다.

석굴사원은 벼랑을 파 들어가면서 굴내에 탑이나 불상을 조성한다. 탑-불상이 위치할 자리를 남겨두고 주변만 파서 훤하게 만든 뒤에 탑이나 불상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쓴다.

서역과 돈황과 운강석굴 등에서는 제물의 석벽에 불상을 조성하되 부족한 부분에는 다시 흙을 발라 보충하여 완성하고 단청하여 장엄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했다. 이에 비하면 군위삼존석굴은 석벽에 조각한 것은 본존좌상의 광배 뿐이다. 본존상과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밖에서 따로 만들어다 제자리에 봉안했다. 절충식인 셈이다.

절충식이란 측면에서 볼때 바위벼랑만으로 부족하면 앞쪽에 목조건물을 지어 법당 기능을 완성시킨 석굴도 있다. 중국 락양의 용문석굴이나 돈황 혹은 맥적산석굴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절충식에 비하면 약식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애불 앞에 목조건물을 지어 법당으로 사용하던 예가 있어 저들과 같은 맥을 지닌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여러지역의 석굴사원을 순방하였다. 대동시의 운강석굴이 내게는 주목거리였다. 바위벼랑을 파고 조성한 굴이 수많이 개탁되어 있다. 시대도 다르고 관여한 사람들도 다르다. 굴마다 제각기 특성을 지니고있다. 내가 주목하는 굴은 9호와 10-11호다. 앞에 배흘림이 있는 거대한 기둥이 있는 9호와 10호는 안으로 들어서면서 전실의 장엄한 갖가지 조각과 무늬와 만나게 된다. 장엄한 내용에 따라 색을 칠해 각자의 성격이 잘 드러나고 전달하려는 내용이 아주 선명하여 좋다. 들어서면서 맞은편 벽에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다. 빠끔하게 뚫려있는 문 위편에 기와 이은 지붕이 형상화 되어 있는데 기와골-용마루들도 완연하여 옛모습을 판독할 만하다.

용마루 좌우 끝엔 치미가 설치되고 중앙에 화염무늬가 자리잡았다. 극락조라 할 수 있는 새가 양쪽날개를 훨씬 벌려 쳐들고 춤을 추는 탯거리로 화염무늬 좌우에 들어서 있다.

용마루 중앙에 장식한 화염무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용마루 좌우 끝의 치미도 벽화에서 보던 모습이어서 낯이 익다. 두 날개를 펴고 마치 승리의 춤을 추는듯한 새도 고분에서 보던 것과 같다. 특히 쌍영총 현실, 돌기둥 위쪽 벽면에 그려진 새와는 똑같게 생겼다.

9-10호나 11호의 전실 측면벽에는 부처가 들어앉아 있는 감실등이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기둥 위의 창방위로 춤추는 새가 있고 그 가운데에 자 처럼 생긴 합장형의 구조물이 있다. 쌍영총에서도 두마리 새의 중앙에 같은 모양의 합장형 구조재가 있다. 이를 건축사학자들은 대공 이라 부르는데 대공은 상부부재를 떠받치는 구조물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대공은 이렇게도 쓰이지만 고구려 고분인 천왕지신총에서는 천장을 떠받치는 구조물로 설치되어 있다. 앞뒤 기둥 위로 걸친 들보 위에 이 소슬합장 자형 부재를 얹어 종도리를 받게한 구성인데 이와 똑같은 기능으로 구조되고 형태가 동일한 것이 일본 법륭사 금당 일곽의 회랑 들보 위에도 있다. 들보와 소슬합장의 대공이 천왕지신총과 똑같게 만들어진 것이다.

9-10-11호 측면벽 감실 지붕 용마루에도 화염무늬가 있고 새가 있고 치미가 있다. 이들은 고구려 벽화의 표현법과 분명하게 동일하다. 운강석굴 일부에 다른 지역에서 찾기 어려운 장엄의 표현이 있고 그것이 고구려의 성향과 똑같다는 사실에 나는 주목한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가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의 석굴들은 적지 않게 보고 다녔다. 혹시나 해서 다른 지역의 벽화들을 탐색해 보았다. 오늘 현재로 나는 아직 고구려와 운강석굴 말고는 이에 유사한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탐색이 더 진행되어야 결론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이나 현재의 내 심경으로는 고구려 벽화와 운강석굴의 해당자료는 같은 계열의 문화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무리가 없으리란 생각이다. 고구려 승려나 그 계열의 인물이 그 굴 개척에 관여하였다고 나는 아직 말하려 하지 않는다. 좀 더 두고 무르익기를 고대하고 있다. 석굴사원은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고 석굴의 규명은 고구려 벽화가 지닌 성정을 탐색하는 또하나의 문법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함께 갖도록 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석굴을 찾아다니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우리의 문화회랑내에 있는 석굴들을 다시 또 찾아다녀야겠다는 작심이다.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발행일 : 1995.11.14  기고자 : 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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