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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멘트제거등 원형복원-「석조예술 연구원」설립도 시급
•  유라시아대륙 '석각예술의 진수'
•  석가,10대제자와 동천....해돋는 토함산에 정좌
•  유네스코선정 세계의 문화유산 순례 창간특집
•  경주 석굴암

뒤늦게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새롭게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경주 토함산 석굴암은 「화강암 예술의 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대표적인 석조예술의 결정(결정)이다. 한 미술사학자는 이런 표현으로 석굴암을 예찬하고 있다.

『세계의 어느 것과도 석굴암은 바꿀 수 없다. 셰익스피어나 괴테와도 바꿀 수 없다. 또 아잔타 석굴이나 막고굴(막고굴), 운강(운강), 룡문(용문), 천룡산(천룡산)석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석굴과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석굴들은 실로 경주 석굴암을 위하여 존재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무비(절대무비)이다. 』(강우방국립중앙박물관학예연구실장·「미술자료」제56호)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석불사). 굴이 아닌 석실금당(석실금당=석조법당)이다. 바위를 파서 만든 것이 아니라 돌로 쌓아 축조한 석조건축이다.

석굴암은 규모처럼 작은 법당이 아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는 우주다. 석굴암에는 석가여래 본존상과 모두 39체의 부조상이 있었다. 성도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삼계의 불구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조상은 37체. 감실의 2체는 일제가 빼내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불교의 삼계는 현세인 욕계(욕계)와 천상의 색계(색계), 무색계(무색계)를 말한다. 석굴암 전실과 통로에는 팔부중(팔부중)과 금강력사(금강역사), 사천왕(사천왕)의 욕계가 펼쳐지고 주실의 벽에는 범천(범천), 제석천(제석천), 보살(보살), 아라한(아라한)의 색계, 중앙에는 정각(정각)한 여래의 무색계가 자리하고 있다.

석굴암이 창건된 때는 통일신라 경덕왕 15년(751). 창건자는 김대성이고 표훈대사가 주석했다. 석굴암의 축조술과 불상조각이 으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 한국인들이 세계문화재로 석굴암을 설명할 때 세계성을 빼놓으면 안된다. 석굴암의 불상조각들은 강우방실장의 지적처럼 유라시아 석각예술(stone carving)의 최종 목표와 다름없는 성과인 까닭이다.

불상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곳은 인도의 서북부 간다라 지방이다. 간다라는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서기전 356∼323)의 동방원정으로 유라시아의 서와 인도의 동이 만나 꽃피운 인도-그리스 예술의 중심지. 그리스 풍의 불교미술이 꽃피운 동-서 예술의 융합지다. 1세기에 발현한 불상조각기술은 곧 석가모니가 직접 설법했던 갠지스 강 유역 마투라 지방으로 전파됐고 이어 해로와 륙로로 퍼져나간다. 해로로 실론과 동남아로 전파되고 육로로는 서역에서 실크로드와 스키타이의 초원의 길을 탄다. 불상의 북동진로는 인도 벵골지방, 타크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천산남로인 코탄, 미란과 천산북로의 키질, 쿠챠, 투루판을 거쳐 북방유목민족의 초원의 길로 이어져 북중국과 고구려에 닿는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한 때는 후한시대인 1세기께. 그러나 불교를 선호한 민족은 한족이 아니라 북방의 호족(호족)들이다. 4세기 초, 오호십육구시대 북방 호족들에 의해 활발하게 불상이 제작된다. 불교와 불상조각은 오호십육국을 통일한 선비족의 북위(386∼534)를 거쳐 수, 당시대에 번성한다.

5세기 후반까지 북위시대의 불상에는 서역이나 간다라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중국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 가운데 하나인 돈황도 한족보다는 북방민족들이 더 많이 지배했던 곳이다. 돈황에 석불사원인 천불동이 건축되기 시작한 때는 366년부터(브리태니커 월드 엔사이클로페디아)다. 357년 축조 연도를 밝혀주는 고구려 고분보다 늦다.

석굴암 조각이 유라시아 석조예술을 종합한 화강암 예술의 결정이란 사실은 석굴암 그 자체가 증언하고 있다. 정각한 석가가 10대 제자를 거느리고 토함산 해맞이 골로 동천(동천), 정좌하기까지를 신라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본존불을 모시고 있는 불상들이 말하고 있다. 사천왕상의 갑옷이나 십대제자의 신발을 보면 부처의 동천을 알 수 있다. 샌들을 신은 제자가 사막의 길로 안내하고 가죽신을 신은 제자가 초원의 길로 모셔온 부처를 신라인들이 맞아 유라시아 대륙 최동단 신라의 동악 토함산 해맞이 골에 화강암으로 영원한 집을 지어 안치한 것이다. 신라인들은 영원한 불국토를 조성하려고 석굴암을 지어 석가세존을 모시고 39체의 석상을 화강암에 새긴 것이다.

신라인들은 가장 강한 돌인 화강암으로 불상을 깎고 그 화강암으로 사원을 건축했다. 그것이 바로 유라시아의 불교 전래 길과 석각 예술을 종합한 석굴암이다.

세계 문화재가 된 석굴암, 오늘의 한국인들은 국보의 단계를 넘어선 석굴암을 이제 어떻게 보존해야 할까.

1963년부터 2년 동안 석굴암보수 현장감독관이었던 신영훈문화재전문위원은 『일제가 석굴암의 돔에 덮어 씌운 시멘트를 벗겨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말한다. 화강암을 덮고 있는 시멘트의 폐해는 잘알려진 일. 그래서 인공으로 강제, 기계로 습도를 조절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시멘트는 화강암을 그대로 두지 않고 조금씩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석굴암의 원상 회복. 1913년 일제가 석굴암을 중수할 때 비도(비도)와 석굴원실의 중간에 있는 두 석주 윗부분에 아치형의 량석(양석)을 가로질러 놓았다. 어떤 의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양석으로 광배의 온전한 모습을 석굴암 전실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참배자들과 부처의 두광을 차단한 것이다. 이제 석굴암에는 불교와 석조예술을 연구하는 세계 각국의 학자들이나 관광객들이 몰릴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비한 시설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유라시아 석각예술 자료관」 같은 전시관과 국제적인 「석조 예술 연구원」의 설립운영이다. 찾아오는 이들이 보고 합리적으로 느끼고 연구하도록 해야 석굴암은 명실상부한 세계문화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석굴암과 불국사,팔만대장경각과 해인사,종묘등 3건의 세계문화재를 갖고있다. 지난해 12월 8일 독일 베를린에서열린 제1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는 이들 한국문화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정식 등록됐다. 우리 문화재가 국가의 경계를 넘어 인류공동의 세계문화재로 격상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창간 76주년을맞아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재의 현황과 우리 문화재의 세계화를 겨냥한 「세계문화유산」을 주간 연재한다. 국내편은 서희건부국장이 맡고 해외편은 문화재전문 프리랜서 삼윤씨(45)가 지난12월부터 현장을 돌며 취재중이다.

                                                                                  발행일 : 1996.03.06  기고자 : 서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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