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6 11:07

굴뚝(조선일보)

조회 수 2383 추천 수 16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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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서 개발 남북으로 확산(우리문화 이웃문화 39 끝)
• 혹한 견디게 설계 둥근 연통 구미서도 발견
• '구들'없는 백제-신라식집 왜로 건너가
• 십장생무늬 장식 경복궁굴뚝 보물 지정
    
구들 들인 온돌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굴뚝이다. 아궁이에 지핀 화기가 내지 않고 잘 타게 하려면 연기를 뽑아내는 기능의 굴뚝이 필수적이다.

고래끝 개자리에 머물던 연기와 화기가 굴뚝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가야 아궁이에서 발생하는 연기와 더운 기운이 고래를 따라 골고루 퍼진다.

기능을 제고한답시고 굴뚝을 높게 만들면 너무 쉽게 열기가 빠져나갈 염려가 있다. 그래서 고래끝 개자리에서 연도를 길게 연장시켜준다. 열기를 그만큼 오래 머물 수 있게 하려는 배려이다.

연도는 집에서 훨씬 떨어진 자리까지 연장되기도 한다. 그 끝에 굴뚝을 세운다. 굴뚝 밑에도 다시 개자리를 판다. 열기가 더 머물 뿐만 아니라, 혹시 역풍이 굴뚝으로 들어와도 차단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격조 높은 굴뚝에서는 머리에 연가를 얹는다. 차단의 기능이 제고될 뿐만 아니라, 그을음이 굴뚝에서 분출되는 일을 억제하기도 한다. 연가는 단간 단층의 기왓골이 있는 기와집형상으로 만든 도제품이다.

굴뚝은 기후여건에 아주 민감하다.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혹한을 견뎌야 하는 지역의 굴뚝은 장대한 형용으로 만들어진다. 기능이 극대화됐다.

남쪽으로 가면서 차츰 위축된다. 고래끝에 구멍만 내어 개굴 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소백산을 넘어서면서는 더욱 쇠미해진다. 심지어는 실내로 들어가 부엌 부뚜막 한 귀퉁이에 자리잡기도 한다. 이런 굴뚝은 화티 의 기능을 겸비한 수화시설이 되기도 하고, 광솔로 불을 켜서 어둠을 밝힐 수 있게 만든 코쿨 의 구실도 하게 한다. 여기의 코쿨은 부엌과 방을 함께 밝힐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굴뚝이 남-서해의 여러 섬을 거치면서 더욱 소략해 지다가 제주도에 이르러서는 굴뚝 그 자체가 없어지고 만다. 굴목 이라 부르는 멍텅구리 벙어리 구들이 되고 만다.

원산지가 고구려인 굴뚝의 남점은 장구한 세월이 소요된다. 18세기나 되어야 제주도살림집에 구들 드린 방이 보편화된다. 백제-가야-신라에는 구들이 없었을 가능성이 짙다. 왜에 건너가 짓고 살던 집의 흔적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구들의 자취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풍토의 여건에서 생겨난 일이기도 하다. 고구려인들이 이주한 지역에서조차 찾아지지 않는다.

풍정은 고구려 이웃나라에서도 구들 들인 방을 개발하지 않았다. 한족들의 집에서는 보기 어렵다. 그들은 맨바닥에 침대처럼 침상을 만들고 거기에서 잔다. 우리와 다른 점이다. 더러 예외는 있다. 북경의 여름 별궁인 신화원(이화원 곤명지가 있는 곳) 왕비침전등에서 구들의 예를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그 건물에 사는 여인은 북방민족이었을 가능성이 짙으므로 한족의 성향과는 다를 수도 있었다.

구들이 없으니 굴뚝 보기가 어렵다. 물론 배기용의 굴뚝은 있다. 대부분 둥근 연통이 지붕 위로 불쑥 솟아오른 형태이다. 더러 벽돌로 지붕 위에 반듯하게 쌓아 올리고, 거기에 둥근 연통을 하나 혹은 여러 개 나란히 설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계열의 굴뚝은 시베리아를 위시하여 북구,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문화회랑 안에 위치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 유형중 내가 본 것으로는 남불의 것과 미국 보스턴시의 하버드대학 인근에서 만난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거의 일률적인 성향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들에 비하면 우리굴뚝은 다양하며, 다분히 개성적이다. 같은 것이 없을 정도이고, 지역의 특성을 무시하기도 했다.

전남 곡성에선 죽담에 빠꼼하게 구멍만 낸 개굴 의 것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 남방인 남해섬에서 남근처럼 기가 승하게 생긴 장대한 굴뚝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담양 소쇄원부근에서는 앉은뱅이굴뚝을 보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정감어린 형상을 하고 있다.

지금은 소속이 달라졌지만, 옛 고구려 강역이었던 곳에 가면 북방지역의 전형적인 굴뚝이 마당에 우뚝 우뚝 서 있다. 고구려 벽돌탑이 남아 있는 심양 석불사 이웃의 마을에서도 그런 굴뚝을 볼 수 있었다. 이는 한족의 집굴뚝과 다르다. 지붕위로 솟은 연통과는 형상이 틀린다. 지붕 위의 유형이 서역이나 문화회랑에 분포되어 있지만, 역시 다르다. 석불사형은 고구려계열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경 자금성에 북방형굴뚝이 있다. 몇번 가보았지만 굴뚝이라고 본 것은 이것뿐인데, 건물벽체에 부착시키며 벽돌로 쌓아 네모진 것을 지붕 위로 솟아오르도록 구조한 것이다.

자금성에 비하면 경복궁굴뚝은 아주 다채롭다. 네모진 굴뚝은 아주 흔한 것이고, 특색을 구비한 굴뚝들도 여러 종류이다. 그중에 자경전 뒤뜰의 십장생무늬 굴뚝(보물810호)과 왕비침전인 교태전 뒷동산, 아미산의 여섯 개 굴뚝은 보물로 지정되었다(보물811호). 굴뚝이 보물로 지정된 예를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만큼 아름다운 굴뚝의 타례는 다시 찾기 어려우므로 가히 독보적인 존재라 찬탄할만하다.

우리문화성향도 이와 같다고 나는 본다. 다른 문화와 어울려 생성-발전하였고, 동양문화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세계문화 형성에 기여하여왔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개성을 돈독히 하는 특성을 살렸다.

이런 점이 우리문화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세계를 다니며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문화회랑의 존재에 유의한 것도 그런 흐름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재를 끝마치면서 터득한 결론이랄 수도 있다. 지적과 편달을 아끼지 않으신 독자들과 연재의 진행과 편집-제작에 참여하여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글=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사진=김대벽 사진작가>

                                                                               발행일 : 1995.12.26  기고자 : 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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