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수님이 한옥문화원으로 찾아오셨다. 아주 곱게 생긴 인상 좋은 여교수님이신데 한옥의 <친환경적인 요소>를 알고 싶다고 하신다. 목소리도 나긋나긋 알아듣기 쉽게 말을 하는 분이다. 그런데 참 미안한 일은 木壽는 ‘친환경적’이란 단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한 처지이어서 교수님의 말씀을 다 알아듣지 못하였다. 참 미안한 일이다.
木壽는 요즈음 평창에 자주 간다. 백덕재伯德齋 짓는 현장에 들러 일의 진첩을 살피곤 한다. 백덕재 짓는 뇌운계곡의 곧은골에는 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꽃이 없는 날이 없을 정도로 야생화들이 피고 지는데 그 군락을 이룬 꽃으로 해서 더할 나위 없이 싱그럽고 아름답다. 이런 자연을 교수님이 ‘친환경적’이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싶은데 알기 어렵다.
자연과 친환경적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교수님이 정의하시는 ‘친환경적’에는 천연스러움보다는 인간이 조성하는 인위적인 요소가 다분한 듯이 느껴진다.
한옥은 자연을 무대로 삼고 태어난다. 예로부터 그래왔다. 지금도 대략 그런 기맥을 지니고 탄생한다. 그런데 그런 한옥이 ‘친환경적’이라는 대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 분들의 ‘환경’에는 자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 자연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면서 완성한 집을 지어왔는데 지내고 보니 그런 집들이 이제 신물이 날 정도로 답답해 숨이 막히는데다 집이 사람을 공격한다는 비명까지 들리게 되었으니 한옥이 지닌 자연을 도입해서 숨통 좀 트여보자는 의도가 담긴 것은 아닌지 하는 지레짐작이 앞을 선다.
木壽는 그 교수님에게 엉뚱한 이야기를 하였다. 요즈음 집집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기계식 김칫독을 들먹였다. 그 기계독을 보니 숙성을 하도록 하는 기능과 보관이 가능한 기능이 있어 단추를 누르게 되었더라고 하였더니 그 분도 고개를 주악 거렸다. 써보셨을 터이니 긍정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말씀야, 우리 김치 독에는 누르는 단추가 없는데도 익히고 보관하는 일을 혼자 알아서 다 한단 말씀이지. 김칫독은 천연의 이치에 따른 것이고 기계 김칫독은 환경을 그렇게 되도록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 아니겠느냐 말씀이지,”
여기 기계 김칫독이 ‘친환경적’이라 한다면 우리 재래 김치 독은 천연 그 자체가 아니겠느냐는 견해가 교수님의 ‘환경론’을 이해하는 빌미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그날 그 교수님은 바쁘셔서 대답을 들려주시지 않고 떠나셨는데 木壽 생각으로는 우리 학문하는 분들이 지나치게 서구적인 논리에 몰두하고 그 원리를 무턱대고 우리에게 적응시키려고 시도하는데서 어떤 무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하는 걱정을 하였다.
천연이 위협을 받는 세상에서 천연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환경론>이 대두된 것이라면 천연을 정복해야 한다고 외치던 이들의 또 다른 이론일 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천연을 존중하였고 그 산천에서 정기를 받고 인격을 함양하려 노력해왔다. 그래서 산은 끊임없이, 길을 깨우치고자하는 사람들의 修道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환경의 조성>이기보다는 자연이 공여하는 환경에 인간이 안기는 행위일 것이다.
산을 닮은 집의 지붕을 우리는 도처에서 본다. 자연에서 함양한 아름다움이 내 집에 그대로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 수준에서 보면 <친환경론>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교수님 어떠신지요. 무식한 木壽에게 곤욕만 치르신 것 아닌지 모르겠군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군요. 문자에만 너무 기대지 마시지요. 논리도 좋지만 천연에 나가보시면 천연에는 논리도 글자도 없답니다. 그러니 천상 글자 없이 읽으셔야 하는데 평생을 글자만으로 터득한 이가 글자 없는 곳에 가셔서 얼마나 그 이치를 읽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천연을 알고 싶으시다면 글자에서 벗어나야 진면목과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답니다. 이제 교수님이 새로운 방법론에 주목하실 단계에 이르셨습니다. 서구적인 이론의 굴레를 벗고 우리 산천이 지닌 천연의 이치를 터득할 방도를 찾으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내 것 버리고 남의 것 찾아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지만, 이제부터는 그렇게 해서 터득한 식견으로 남의 것을 떠나 내 것을 볼 수 있는 터전으로 돌아와 바탕을 이룩하는 작업을 해야 비로소 위대한 성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도시 양옥의 ‘친환경적’ 요소의 도입으로 활로를 모색하기 보다는 21세기에 천연스럽게 살 수 있는 방향을 찾아 합리적인 천연으로의 접근법을 탐구하심이 마땅할 듯 하다는 충고를 하고 싶다는 외람된 생각에서 우러나온 짧은 식견입니다.
교수님 어떠신지요. 난삽하고 지루한 글을 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이런 문제를 두고 이제 착실히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한옥문화원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는 아주 좋은 여건을 지니고 있으니 활용해 보시지요. 고마워요. 안녕히.
교수님이 아니셔도 이런 문제에 관심이 계신 분들도 이야기에 동참하였으면 유익할 것 같다. 한옥문화원에서는 9월 12일에 우리 문화의 바탕을 찾을 수 있을만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장소에서 한옥문화인회의 모임을 주선하고 있다.
9월 18일에는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을 빌어 한옥의 천연스러운 빛과 그 조명에 대한 사진자료와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또 탐구하는 모임이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木壽는 요즈음 평창에 자주 간다. 백덕재伯德齋 짓는 현장에 들러 일의 진첩을 살피곤 한다. 백덕재 짓는 뇌운계곡의 곧은골에는 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꽃이 없는 날이 없을 정도로 야생화들이 피고 지는데 그 군락을 이룬 꽃으로 해서 더할 나위 없이 싱그럽고 아름답다. 이런 자연을 교수님이 ‘친환경적’이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싶은데 알기 어렵다.
자연과 친환경적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교수님이 정의하시는 ‘친환경적’에는 천연스러움보다는 인간이 조성하는 인위적인 요소가 다분한 듯이 느껴진다.
한옥은 자연을 무대로 삼고 태어난다. 예로부터 그래왔다. 지금도 대략 그런 기맥을 지니고 탄생한다. 그런데 그런 한옥이 ‘친환경적’이라는 대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 분들의 ‘환경’에는 자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 자연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면서 완성한 집을 지어왔는데 지내고 보니 그런 집들이 이제 신물이 날 정도로 답답해 숨이 막히는데다 집이 사람을 공격한다는 비명까지 들리게 되었으니 한옥이 지닌 자연을 도입해서 숨통 좀 트여보자는 의도가 담긴 것은 아닌지 하는 지레짐작이 앞을 선다.
木壽는 그 교수님에게 엉뚱한 이야기를 하였다. 요즈음 집집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기계식 김칫독을 들먹였다. 그 기계독을 보니 숙성을 하도록 하는 기능과 보관이 가능한 기능이 있어 단추를 누르게 되었더라고 하였더니 그 분도 고개를 주악 거렸다. 써보셨을 터이니 긍정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말씀야, 우리 김치 독에는 누르는 단추가 없는데도 익히고 보관하는 일을 혼자 알아서 다 한단 말씀이지. 김칫독은 천연의 이치에 따른 것이고 기계 김칫독은 환경을 그렇게 되도록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 아니겠느냐 말씀이지,”
여기 기계 김칫독이 ‘친환경적’이라 한다면 우리 재래 김치 독은 천연 그 자체가 아니겠느냐는 견해가 교수님의 ‘환경론’을 이해하는 빌미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그날 그 교수님은 바쁘셔서 대답을 들려주시지 않고 떠나셨는데 木壽 생각으로는 우리 학문하는 분들이 지나치게 서구적인 논리에 몰두하고 그 원리를 무턱대고 우리에게 적응시키려고 시도하는데서 어떤 무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하는 걱정을 하였다.
천연이 위협을 받는 세상에서 천연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환경론>이 대두된 것이라면 천연을 정복해야 한다고 외치던 이들의 또 다른 이론일 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천연을 존중하였고 그 산천에서 정기를 받고 인격을 함양하려 노력해왔다. 그래서 산은 끊임없이, 길을 깨우치고자하는 사람들의 修道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환경의 조성>이기보다는 자연이 공여하는 환경에 인간이 안기는 행위일 것이다.
산을 닮은 집의 지붕을 우리는 도처에서 본다. 자연에서 함양한 아름다움이 내 집에 그대로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 수준에서 보면 <친환경론>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교수님 어떠신지요. 무식한 木壽에게 곤욕만 치르신 것 아닌지 모르겠군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군요. 문자에만 너무 기대지 마시지요. 논리도 좋지만 천연에 나가보시면 천연에는 논리도 글자도 없답니다. 그러니 천상 글자 없이 읽으셔야 하는데 평생을 글자만으로 터득한 이가 글자 없는 곳에 가셔서 얼마나 그 이치를 읽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천연을 알고 싶으시다면 글자에서 벗어나야 진면목과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답니다. 이제 교수님이 새로운 방법론에 주목하실 단계에 이르셨습니다. 서구적인 이론의 굴레를 벗고 우리 산천이 지닌 천연의 이치를 터득할 방도를 찾으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내 것 버리고 남의 것 찾아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지만, 이제부터는 그렇게 해서 터득한 식견으로 남의 것을 떠나 내 것을 볼 수 있는 터전으로 돌아와 바탕을 이룩하는 작업을 해야 비로소 위대한 성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도시 양옥의 ‘친환경적’ 요소의 도입으로 활로를 모색하기 보다는 21세기에 천연스럽게 살 수 있는 방향을 찾아 합리적인 천연으로의 접근법을 탐구하심이 마땅할 듯 하다는 충고를 하고 싶다는 외람된 생각에서 우러나온 짧은 식견입니다.
교수님 어떠신지요. 난삽하고 지루한 글을 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이런 문제를 두고 이제 착실히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한옥문화원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는 아주 좋은 여건을 지니고 있으니 활용해 보시지요. 고마워요. 안녕히.
교수님이 아니셔도 이런 문제에 관심이 계신 분들도 이야기에 동참하였으면 유익할 것 같다. 한옥문화원에서는 9월 12일에 우리 문화의 바탕을 찾을 수 있을만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장소에서 한옥문화인회의 모임을 주선하고 있다.
9월 18일에는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을 빌어 한옥의 천연스러운 빛과 그 조명에 대한 사진자료와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또 탐구하는 모임이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