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박물관의 한국실
지난번 얘기의 계속입니다. 현재의 한국실 안내서의 글을 계속하죠.
그 시대에 또한 한반도 북부에 중국 한족의 거주지가 여러 곳 생겨났다. 한국은 처음 4분되어 있었으나, 삼국시대(기원전 57~서기 668년) 동안 한반도의 남부 중앙지역에 있던 가야는 남동부의 신라에 합병되었다. 북부에는 고구려가, 남서부에는 백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고구려의 고분은 계단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를 하고 있으며, 고분 내에는 중국한나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벽화로 장식된 묘실들이 있다. 백제는 바다를 통해 중국남부와 접촉했으며, 백제 예술가와 공예가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불교미술 발달에 기여하였다.
가야와 신라의 극적인 장례용 경질 토기들은 샤마니즘적인 장례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고분에서는 화려한 금관, 벨트, 신발, 귀걸이, 그릇 등이 발굴되었다. 그들 유물에 새겨진 장식은 중앙아시아의 스키타- 시베리아 초원문화에서 유래한 기원을 암시할 수도 있다.
서기 668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의 수도 경주는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도시설계를 기초로 했다.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에 따라, 중국의 관료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또한 많은 신라인들이 중국과 변방지역으로 여행했다. 엄격한 계층사회였던 통일신라의 사회구조는 고려왕조(918~1392)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절들이 부유해졌다. 이 시대에는 또한 불교의 장엄함을 나타내는 그림, 채색 사본, 조각, 청자 등과 같은 많은 훌륭한 예술품들이 생산되었다.
불경 제작은 공덕을 쌓는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11세기에는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기원 하에, 불경 전부를 8만개가 넘는 수공 목판으로 찍어 인쇄했다. 경전을 빨리 효율적으로 인쇄하고자 하는 열망은 13세기 초반에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왕조(1392~1910)는 불교를 탄압하고 엄격한 유교를 숭상하였다. 15세기에는 과학, 기술, 문화가 융성했으나 16세기말 여러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입으로 문화유산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많은 도공들이 불모로 잡혀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회복되자마자 다시 중국 청 왕조를 시작한 만주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18세기는 다시 평안의 시대가 도래했고, 그것은 그 시대의 예술에 잘 반영되었다.
이 안내문을 읽은 어떤 분이 몹시 불쾌하다는 반응이네요. 한국인들의 보편적인 상식과 어긋나는 점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다시 써야한다는 울분입니다.
이 글은 모르긴 해도 한국 실을 담당한 학예사가 썼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는 연세대학에 유학 와서 한국어의 연수를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그가 우리 역사를 잘못 인식하였다면 우리나라에서 읽은 역사책에 그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어떤 내용이 실려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하는 걱정이 앞서네요. 설마 그럴 리가 있느냐고 추궁하시면서 상부의 누군가가 그런 글을 교정봐주었을 것 아니냐고 하셨는데요, 그런 제도 까지는 제가 알 도리 없지만 한국말을 모르는 상급자들이 읽을 영어로 쓰인 멋진 책을 공급해 주신 적은 있었는지요.
서구인들은 대부분 우리 사람이 아닌 남의 나라 학자들이 서술한 글을 통하여 우리를 아는 일이 고작이라 하면서 우리 교민들은 나라에서 하루 속히 그런 자료를 풍부하게 공급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구요. 답답해 죽겠다는 거예요.
비단 이 일이 영국박물관에 국한 된 일이 아니라면 우리도 이제 자원봉사에라도 나서서 외국인들이 읽을만한 문화관계 서적을 충실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지 하는 생각을 다시 하여 보았습니다.
11월 8일에 한국실을 개관하면서 안내 책자를 다시 만드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전시 내용이 바뀌었으니 좀더 충실한 글이 실리지 않을까 하는 점을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마침 런던의 한국대사관 황영락 공보관이 보낸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교포 신문에 보도된 한옥 '사랑방'에 관한 기사입니다. 아꼈다가 다음 차례에 소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