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壽의 이야기 사랑방 제38화

by 신영훈 posted Nov 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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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대한 관점과 인식이 우리와 어떻게 다르냐를 가늠하는 일은 여러 모로 시도해 볼 수 있다.
[고구려 건국이후 중원의 왕조와 시종 전쟁 혹은 화평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왕망은 고구려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下句麗'라고 욕을 보이기도 하였다. 東漢o인 AD 32년에 고구려는 사절을 파견하여 한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였다.]
이는 고구려와 한족 국가와는 처음부터 다른 위치에 있음을 말해 주는 사례에 속한다. 같은 민족으로 역사의 맥락을 지녔다면 다투지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사절을 파견하는 번거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외교적인 국가간의 일을 미묘하게 한족 중심의 사관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그런 예의 한가지.
[동진 성제 함감7년(341)에 전연의 모용 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듬해도 환도성을 공격하였는데 고구려가 크게 패하였다. 북귀시대에는 고구려가 매년 사신을 파견하였다. 북위는 이후로 내정에 간섭하여 임금 책봉에도 관여하였다.]
우리는 북위는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와 이웃한 지역의 朝卑족이 세운 나라임을 알고 있다. 북방 민족인 선비족이 고구려의 후원을 얻어 중원을 적복하고 한족들을 다스렸다. 그것이 북위정권이다 . 그러니 두 나라는 친밀라게 지낼 수 밖에 없었다고 봐야 옳다. 이른바 중국역사에 북방민족들이 중원에 진출하여 나라를 세우고 한족을 다스린 사례가 여러번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면 이른바 중국 역사는 북방민족의 역사라고 봐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더러 용납될 수 있게된다. 오히려 중국역사라는 줄거리를 자세히 파헤쳐 바로 세우면 그 흐름에 북방민족의 노력이 호대하였음을 증명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킨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