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에 임실의 운암저수지 호반의 대도대한에 가서 8각원당의 준공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국내 유일한 목조건축이 탄생하였다. 다들 명품이 세상에 나왔다고들 즐거워 하였다. 각분야의 국내 최고수준의 장인들이 힘을 합펴 완성한 작품이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들었다.
오늘은 낮에 삼각산 심곡암深谷庵에 가서 새로 경영할 다락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왔고, 저녁에는 <조선의 정궁>, <석굴암>, <불국사>(며칠 있으면 간행됨)에 이어 다시 책을 만들 <돌짐승들>이라는 네번째 책의 편집은 위한 사진 자료를 검토하고 들어왔다. 이제 부터 조희환 도편수의 1주기 기년추도특집의 원고를 써야 하지만 3일에 일본에 갔다가 며칠 머물게 될 것이므로 그안에 고구려 이야기가 소홀할듯 해서 제41화로 또 고구려 이야기를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전에 집안시의 국내성을 살피며 다닐 때 잘 남겨져 있는 성벽의 일부를 본 적이 있었다. 값싼 아파트 짓는 틈사이에 남아 있는 무너진 초라한 성벽 말고 통구 강가의 한 집안 텃밭 가에 우뚝 서있는 성벽이 듬직하였다. 주인에게 흥정을 해서 돈을 주고 다 자란 옥수수를 베어내고 보니 성벽의 전모가 들어났다. 준 돈은 적지 않았지만 도무지 아깝지 않았다. 밑둥으로 부터 상부에 이르도록 비교적 잘 남아 있어서 그 위로 타朶만 있다면 당시의 모습 전반을 볼 수 있겠다. 그러니 거의 원형을 보았다고 해도 좋을만 하여 우리 일행들은 작약하였는데 중극식 성벽쌓기에서는 볼 수 없는 축성의 기법을 유감 없이 발휘하여서 이것이야말로 고구려 전형적인 성벽이구나 하는 감탄에 모두를 환호를 올리며 즐거워 하였다.
그날 우리는 더위를 무릅쓰고 환도산성엘 올라갔었다. 해발 700m가 넘는 능선에 따라 축조되어 있는 산성의 일부 성벽은 아직도 싱신한 젊음을 지니고 있어 지금이라도 실용될 수 있을만 하였다. 이끼가 낀 성벽의 2천년에 이르는 나이를 손꼽아 가며 성벽을 더듬어 보니 돌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잘 지키며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강인함이 놀랍다. 그것이 고구려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성에서 침략자들과 맞써 항쟁하였을 우리 선조들의 모습과 이 성을 축조하는 노력을 통하여 감지할 수 있을터이어서 우리들이 쓰다듬는 손길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젔던지 바위틈에 숨어 있던 작은 벌레가 얼른 손등 위로 기어올랐다. 고구려 때도 이런 벌레가 살았던 것일까.
내가 다니며 본 중국식 성벽과는 이 성벽은 다르다. 국내성과 함께 고구려적인 특성을 지녔어서 국내에 잘 보존되고 있는 온달산성의 고구려적인 축성법과 유사할지언정 중국식 성벽과는 다르다. 이런 석성의 축조법을 두고 중국학자들도 지금까지는 고구려적인 특성을 인정해 왔었다. 이제 이들을 중국문화의 한 자취라고 말을 바꾸려면 절대로 쉽지 않을 터인데 그들은 장차 고구려 축성 기법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억지로 한족의 문물에 속한다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식 성벽 축조법의 한 특징은 <퇴물림법>이라는 방식을 쓰는데 있다. 만리장성의 축조법 등에서는 보기 어려운 기법이다.
만리장성의 서편 끝부분, 가욕관에 가서 보니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축土築이었다. 지역적인 특성에 따른 축조로 보이는데 이것도 한족의 축성법이라 하기엔 곤란한 지역적인 특성이 절절하였다. 비록 만리장성의 한 지맥이긴 하지만 그 성벽은 한족이 쌓은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주민들이 자기식데로 축성한 것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토성은 한족의 만리장성이라기 보다는 그 지역의 토성에 해당한다. 단지 위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만리장성 전체가 한족들에 의하여 조축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의 한 증거가 된다. 그러니 이는 한족의 문화가 아니다. 만리장성이 그정도인데 하물며 고구려 특성의 축성기법을 한민족의 문화라고 누군가가 우기려 한다면 그것은 억지일 뿐이지 온당한 견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러분들이 직접 고구려의 성벽을 보고 국내의 고구려 성벽을 살피면서 검증을 한 후에 이 문제를 명백히 밝혀 나가는 일에 참여한다면 보람을 얻게 될 것이다. 중국에 가서 직접 보고 느끼면서 이런 이야기에 끼어들어야 참 맛이 나게 마련이다. 가서 살펴보시라구요.
오늘은 낮에 삼각산 심곡암深谷庵에 가서 새로 경영할 다락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왔고, 저녁에는 <조선의 정궁>, <석굴암>, <불국사>(며칠 있으면 간행됨)에 이어 다시 책을 만들 <돌짐승들>이라는 네번째 책의 편집은 위한 사진 자료를 검토하고 들어왔다. 이제 부터 조희환 도편수의 1주기 기년추도특집의 원고를 써야 하지만 3일에 일본에 갔다가 며칠 머물게 될 것이므로 그안에 고구려 이야기가 소홀할듯 해서 제41화로 또 고구려 이야기를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전에 집안시의 국내성을 살피며 다닐 때 잘 남겨져 있는 성벽의 일부를 본 적이 있었다. 값싼 아파트 짓는 틈사이에 남아 있는 무너진 초라한 성벽 말고 통구 강가의 한 집안 텃밭 가에 우뚝 서있는 성벽이 듬직하였다. 주인에게 흥정을 해서 돈을 주고 다 자란 옥수수를 베어내고 보니 성벽의 전모가 들어났다. 준 돈은 적지 않았지만 도무지 아깝지 않았다. 밑둥으로 부터 상부에 이르도록 비교적 잘 남아 있어서 그 위로 타朶만 있다면 당시의 모습 전반을 볼 수 있겠다. 그러니 거의 원형을 보았다고 해도 좋을만 하여 우리 일행들은 작약하였는데 중극식 성벽쌓기에서는 볼 수 없는 축성의 기법을 유감 없이 발휘하여서 이것이야말로 고구려 전형적인 성벽이구나 하는 감탄에 모두를 환호를 올리며 즐거워 하였다.
그날 우리는 더위를 무릅쓰고 환도산성엘 올라갔었다. 해발 700m가 넘는 능선에 따라 축조되어 있는 산성의 일부 성벽은 아직도 싱신한 젊음을 지니고 있어 지금이라도 실용될 수 있을만 하였다. 이끼가 낀 성벽의 2천년에 이르는 나이를 손꼽아 가며 성벽을 더듬어 보니 돌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잘 지키며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강인함이 놀랍다. 그것이 고구려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성에서 침략자들과 맞써 항쟁하였을 우리 선조들의 모습과 이 성을 축조하는 노력을 통하여 감지할 수 있을터이어서 우리들이 쓰다듬는 손길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젔던지 바위틈에 숨어 있던 작은 벌레가 얼른 손등 위로 기어올랐다. 고구려 때도 이런 벌레가 살았던 것일까.
내가 다니며 본 중국식 성벽과는 이 성벽은 다르다. 국내성과 함께 고구려적인 특성을 지녔어서 국내에 잘 보존되고 있는 온달산성의 고구려적인 축성법과 유사할지언정 중국식 성벽과는 다르다. 이런 석성의 축조법을 두고 중국학자들도 지금까지는 고구려적인 특성을 인정해 왔었다. 이제 이들을 중국문화의 한 자취라고 말을 바꾸려면 절대로 쉽지 않을 터인데 그들은 장차 고구려 축성 기법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억지로 한족의 문물에 속한다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식 성벽 축조법의 한 특징은 <퇴물림법>이라는 방식을 쓰는데 있다. 만리장성의 축조법 등에서는 보기 어려운 기법이다.
만리장성의 서편 끝부분, 가욕관에 가서 보니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축土築이었다. 지역적인 특성에 따른 축조로 보이는데 이것도 한족의 축성법이라 하기엔 곤란한 지역적인 특성이 절절하였다. 비록 만리장성의 한 지맥이긴 하지만 그 성벽은 한족이 쌓은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주민들이 자기식데로 축성한 것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토성은 한족의 만리장성이라기 보다는 그 지역의 토성에 해당한다. 단지 위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만리장성 전체가 한족들에 의하여 조축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의 한 증거가 된다. 그러니 이는 한족의 문화가 아니다. 만리장성이 그정도인데 하물며 고구려 특성의 축성기법을 한민족의 문화라고 누군가가 우기려 한다면 그것은 억지일 뿐이지 온당한 견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러분들이 직접 고구려의 성벽을 보고 국내의 고구려 성벽을 살피면서 검증을 한 후에 이 문제를 명백히 밝혀 나가는 일에 참여한다면 보람을 얻게 될 것이다. 중국에 가서 직접 보고 느끼면서 이런 이야기에 끼어들어야 참 맛이 나게 마련이다. 가서 살펴보시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