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재雲峴의 관천대觀天臺
운현궁의 북방,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현대 사옥 앞마당에 서 있는 네모반듯하게 높이 쌍아 올린 석대石臺는 북부北部 광화방廣化坊 구름재雲峴에 자리 잡은 서운관(書雲觀, 觀象監, 현대의 기상대)에 시설되었던 구조물로 관천대觀天臺, 소간의대小簡儀臺, 일영대日影臺로 불리우던 시설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관상감 터에 휘문학교徽文學校가 설립되자 이 관천대는 학교마당 끝에 위치하면서 담장 사이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행이 관천대가 마당 끝 낭떠러지에 자리 잡았으니 망정이지 마당 가운데에 있었다면 아마도 자취를 잃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현대가 사옥을 새로 지으면서 휘문고등학교를 인수하였고 그 터전을 신작로 대행길의 높이로 깎아내리면서 관천대는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되게 되었다. 그래도 아주 없애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게 해 준 故 정주영
鄭周永 회장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목수木壽는 그 때 이 관천대를 해체하는 작업에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자격으로 잠시 관여 한 바 있어서 이 석조물의 구조된 상태의 일부를 보게 되었고, 부분 부분을 흑백사진에 담아 보기도 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 보니 그 사진 상태가 나빠 잘 인식하기엔 너무 부족한 정도이나 그래도 참고 자료가 될까 싶어 이렇게 잠시 소개해 두려 한다.
조선조에서는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편에 대간의대大簡儀臺를 설치하고 천문天文과 기상氣象을 관측하였다. 조선왕조는 왕립중앙천문기상대인 서운관을 설립하고 구름재에 터전을 잡아 전문 관측기구를 설치할 소간의대小簡儀臺를 시설하였다. 이 일은 고구려가 관천을 시작한 이래로 신라의 첨성대瞻星臺와 고려의 첨성대에 이은 계승이었다.
높이 3.46m의 관천대는 잘 다듬은 돌로 반듯하게 쌓고 상부에 돌난간을 설치하여 외곽을 정리하고 그 안통에 천문의기天文儀器를 설비하였다. 현재는 오르고 내리던 층계가 없어진 상태이어서 원형을 다 볼 수 있는 형상이 아니나 다행히 창경궁에 그 원형을 남긴 같은 구조물이 존재하고 있어서 원형탐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관천대의 본격적인 시설인 경복궁의 대간의대는 세종 15년(1433)에 축조가 시작되었는데 경회루 북쪽에 직사각형의 석조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 6m, 직사각형의 긴 쪽이 약 10m, 좁은 면이 7m 가량이었고 그 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세종 14년부터 대대적으로 제작을 시작한 천문의기들을 설비하였다. 그 대간의대에 비하여 관상감의 천문대는 규모가 작은 소간의대로 시설되었다.
대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 혼상渾象, 규표圭表,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비되고 대의 서편에 거대한 규모의 규표는 구리로 만든 높이가 40척(약 8.24m)에 이르는데 거기에 청석靑石을 부착시키고 눈금을 그어 동표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하며 24절기를 계산해 내었다. 세종 20년(1438) 3월부터 서운관이 주관하면서 매일 밤마다 5명씩 입직入直하면서 관측을 전담하였다. 이 관천대는 동양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으로 정평을 얻었다.
일단의 공부할 거리를 제시했으니 관심을 깊은 공부로 연계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현대사옥앞에 있는 관천대와 창경궁내에 있는 관천대를 찾아 서로를 비교하고 서로에게서 없어진 부분들을 보충하여 탐구한다면 더 없는 공부가 될 것이다.
운현궁의 북방,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현대 사옥 앞마당에 서 있는 네모반듯하게 높이 쌍아 올린 석대石臺는 북부北部 광화방廣化坊 구름재雲峴에 자리 잡은 서운관(書雲觀, 觀象監, 현대의 기상대)에 시설되었던 구조물로 관천대觀天臺, 소간의대小簡儀臺, 일영대日影臺로 불리우던 시설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관상감 터에 휘문학교徽文學校가 설립되자 이 관천대는 학교마당 끝에 위치하면서 담장 사이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행이 관천대가 마당 끝 낭떠러지에 자리 잡았으니 망정이지 마당 가운데에 있었다면 아마도 자취를 잃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현대가 사옥을 새로 지으면서 휘문고등학교를 인수하였고 그 터전을 신작로 대행길의 높이로 깎아내리면서 관천대는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되게 되었다. 그래도 아주 없애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게 해 준 故 정주영
鄭周永 회장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목수木壽는 그 때 이 관천대를 해체하는 작업에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자격으로 잠시 관여 한 바 있어서 이 석조물의 구조된 상태의 일부를 보게 되었고, 부분 부분을 흑백사진에 담아 보기도 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 보니 그 사진 상태가 나빠 잘 인식하기엔 너무 부족한 정도이나 그래도 참고 자료가 될까 싶어 이렇게 잠시 소개해 두려 한다.
조선조에서는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편에 대간의대大簡儀臺를 설치하고 천문天文과 기상氣象을 관측하였다. 조선왕조는 왕립중앙천문기상대인 서운관을 설립하고 구름재에 터전을 잡아 전문 관측기구를 설치할 소간의대小簡儀臺를 시설하였다. 이 일은 고구려가 관천을 시작한 이래로 신라의 첨성대瞻星臺와 고려의 첨성대에 이은 계승이었다.
높이 3.46m의 관천대는 잘 다듬은 돌로 반듯하게 쌓고 상부에 돌난간을 설치하여 외곽을 정리하고 그 안통에 천문의기天文儀器를 설비하였다. 현재는 오르고 내리던 층계가 없어진 상태이어서 원형을 다 볼 수 있는 형상이 아니나 다행히 창경궁에 그 원형을 남긴 같은 구조물이 존재하고 있어서 원형탐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관천대의 본격적인 시설인 경복궁의 대간의대는 세종 15년(1433)에 축조가 시작되었는데 경회루 북쪽에 직사각형의 석조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 6m, 직사각형의 긴 쪽이 약 10m, 좁은 면이 7m 가량이었고 그 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세종 14년부터 대대적으로 제작을 시작한 천문의기들을 설비하였다. 그 대간의대에 비하여 관상감의 천문대는 규모가 작은 소간의대로 시설되었다.
대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 혼상渾象, 규표圭表,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비되고 대의 서편에 거대한 규모의 규표는 구리로 만든 높이가 40척(약 8.24m)에 이르는데 거기에 청석靑石을 부착시키고 눈금을 그어 동표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하며 24절기를 계산해 내었다. 세종 20년(1438) 3월부터 서운관이 주관하면서 매일 밤마다 5명씩 입직入直하면서 관측을 전담하였다. 이 관천대는 동양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으로 정평을 얻었다.
일단의 공부할 거리를 제시했으니 관심을 깊은 공부로 연계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현대사옥앞에 있는 관천대와 창경궁내에 있는 관천대를 찾아 서로를 비교하고 서로에게서 없어진 부분들을 보충하여 탐구한다면 더 없는 공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