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壽의 이야기사랑방 제 71화

by 신영훈 posted May 2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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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다양하여 읽는 재미가 아주 각별한데 더러 건축 이야기도 들려 주셔서 우리들 공부에 도움이 된다.
이 시기의 실학자들의 지견이 다 그렇지만 중국의 여러 전적들에 실려 있는 내용을 알맞게 인용하면서 우리와 비교하기도 한다.
성호 이익선생님의 <성호사설>의 ‘축도築堵’라는 항목도 이야기 전개가 그와 유사하다. (전에나 마찬가지로 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국역총서의 번역본을 읽었음)

축도
(전략)옛날에는 집 짓는 것을 집을 쌓는다(築室)고 하였는데 쌓는다는 것은 담벼락을 가리킨다.
(중략) 옛적에는 집 사방 벽을 만들 때 반드시 목판을 가지고 거기에다 흙을 얹어 견고하게 쌓아 주위를 완전히 다진 뒤에 반반하게 깎기 때문에 시경詩經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 * - 이 글의 내용은 우리가 흙담을 칠 때 앞뒤로 거푸집을 세우고 그 안에 흙을 집어넣으며 단단히 방아 찧어 견고하게 하고, 흙이 마른 후에 거푸집을 떼어 내었다가 다시 그 위로 거푸집을 올려 설치하고 계속해서 흙을 다지면 높은 벽체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말하는 것인데 여러분이 안동의 하회마을에 가서 보는 토병土塀이라는 담장이 이 방식으로 완성한 토담이다. 시경에서 이렇게 말하였다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축도
(위의 전략하였던 부분)옛날에는 집을 짓는 것을 집을 쌓는다(築室)고 하였는데 쌓는다는 것은 담과 벽을 가르킨다. 시경의 면綿장에 “하여금 집을 세우도록 하니 그 노(繩)가 곧거늘 목판을 묶어 상하로 연결하니 지어진 종묘가 엄정하도다”라 하였고 또 “쌓기를 쉴 새 없이 하고 울퉁불퉁한 곳 깎기를 단단히 하여 백도百堵가 다 쌓여지니 너무 기뻐 북 치기를 멈출 수 없네”라고 하였다.

- * - 이 글을 읽고 어떻게 종묘가 엄정하게 이룩되었는지를 갈피잡지 못하여서 내 생각대로의 해석조차 시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성호선생의 해설로 거푸집으로 토담 쌓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면 어느 정도 수긍은 가나 ‘목판을 묶어 상하로 연결하니’에서 ‘노가 곧거니’는 전혀 알아듣기 어렵다.
‘울퉁불퉁한 것을 깎기를 단단히 하여 백도가 다 쌓이니’는 거푸집의 키를 높이는 일에서 아랫단에 쌓은 흙 위에 거푸집을 설치하므로 아랫 단 보다 위가 그만큼 좁아져서 여러 번 거듭하고 나면 하단 보다 상단이 안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담벽락의 높이가 완성되었을 때 그 표면을 깎아 아래 위를 같은 면으로 정리함을 말하는 듯 하다.      
성호선생님 글은 계속된다.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명나라 사람 동월이 지은 책)에 “가난한 집 벽에는 대로 엮어 새끼로 완전히 하고 진흙덩이로 메운다”하였고 자주自註에 ‘가시나무 등속으로 세로로 세우고는 엮지 아니하고 짚 새끼로써 매는데 새끼로 매어 그물눈 같은 곳을 진흙덩이로 메운다. 왕도王都에서는 전부 진흙으로 발랐다.’ 하였으니 아마 지금 풍속과는 같지 않았던 것이다.

- * - 가난한 집 벽을 칠 때 중깃 드리고 외 엮어 초벽을 바르는 일이 조선조 기법이었다.  ‘가시나무 등속을 세우고.........’의 기법은 아직 잘 모르겠으나 당시를 말하는 기록이니 우리에게 그런 기법이 있었음을 추가해서 보충해야 할 것이다. 이 방법이라면 현대 아파트 실내 시멘트벽 안쪽으로 진흙 바르는데 아주 유용하겠다. 오늘 좋은 정보를 얻었다.
현대인들이 ‘복원한다’고 하면서 외를 새끼로 엮지 않고 못을 박아 고정시키고 있다. 조선조에 없던 일이다. 조선에 없던 일을 하는 노릇이 복원이라면 우리로서는 알기 어렵다.
시대 흐름에 따라 기법도 이렇게 변하고 있음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성호선생님 덕분에 좋은 공부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