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한옥문화원에서는 아주 즐거운 모임이 있었다. 한옥건축전문인과정 제3기 수료식이 거행되었다. 벌써 2년의 세월을 함께한 사람들이 업을 이루면서 새로운 단계로 진출하기 위한 다짐을 하는 모임이었다. 참석한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수료하는 이들의 치밀한 준비로 아주 뜻깊고 화기 애애하고 즐거운 시간들을 누리며 앞날에 큰 발전이 있기를 축원하는 진한 마음이 가득차서 교실 안은 훈기로 만만하였다.
이제 늘 만나던 세월에 못다한 이야기를 앞으로 어떻게 더 이어갈 것인가를 두고 우리들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1, 2기나 마찬가지로 정보를 나누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갈 길의 모색은 역시 우리들 이야기의 진한 바탕이었다.
木壽는 이들에게 여러가지 자료를 챙겨주어야 할 것이란 생각인데 다들 그 점에 동의하여서 일이 점차 중차대하게 생겼다. 우리 고전古典에서 추릴 수 있는 자료라도 열심히 보급해 주어야겠다는 다짐이 새삼스럽다.
보는 일에서 글자 없는 것을 읽어야 한옥의 공부는 다부진 성과를 얻는다. 집에는 글자가 쓰여져 있지 않아 글로만 터득한 사람들에게는 글자 없는 부분의 이해가 어려운 법이다. 한옥문화원에서는 글자 없이 읽는 방법을 탐구하는 중이다. 그래야 그 분야에서 지식인이 배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글자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기록이 그 실상의 바탕이 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글자를 읽되 글자 없는 것과 함께 읽어야 하며, 글자 없는 것을 보되 글자에서 터득한 바탕이 밑바침 되지 않으면 허공에 뜨고 만다는 점을 木壽는 우리 전문인 과정 학생들에게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것 만으로 자기류의 해석을 하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학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분이 이끄는 모임에서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단社稷壇을 탐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넌즈시 어깨너머로 그 탐구하는 바를 구경하였다.
국사단國社壇과 국직단國稷壇 단의 배치된 형상과 축조된 구조와 주변의 담장과 유門의 존재에 대하여 상당히 치밀하게 탐색을 하면서 그 특색을 다른 구조물과 비교하였다. 건축물 탐구로는 손색 없는 수준이나 욕심 같아서는 여기에서 임금님이 제례祭禮를 받들던 모습까지를 설명되었으면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 때의 생각을 하고 우리 한옥문화원에서는 사직단에서 의례儀禮를 모시던 대요大要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발췌하여 <古典읽기>시간에 강의를 한다. 다행히 법제처에서 1981년도에 <국조오례의>를 한글로 고맙게 번역해 주어서 우리 젊은 이들이 읽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의례의 마련을 사흘 전 부터 시작되고 그 마련은 대단히 복잡하며 치밀하다. 사직단에 부속된 여러 시설들의 존재도 결국 이 의례의 거행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자세한 것은 <社稷署儀軌>를 참조)을 알게되면 지금 남아 있는 구조물만의 탐색으로는 제 구실과 그 존재를 충분히 인식하기 어렵다.
의례를 거행하는 당일에 면복을 입으신 임금님께서 서문 밖에 당도하시면 예의사禮儀使가 정문으로 모시고 들어와 판위版位에 나가 남쪽으로 서 계시도록 한다.
지금의 사직단 정문이라 부르는 보물 177호의 삼문 만이 남아 있으므로 여기의 서문은 어떻게 생긴 문인지 아직은 그 형상을 잘 모르고 있다.
제례는 악공들이 아뢰는 주악과 열문무烈文舞가 추어지는 중에 거행된다. 주악은 순안악 7장이 연주된다.
임금님은 후토씨后土氏 신위神位 앞으로 나아가 서향하고 선다. 향로에 범향하고 폐백을 올린다. 이때 북쪽에서 남향하고 하는 진향進香과 진폐進幣와 반대로 진작進爵과 전작奠爵은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진행한다. 임금님께서는 홀을 잡고 절을 하였다가 일어나 바로 선다.
예의사는 임금님 모시고 국직단國稷壇 단으로 가서 향을 올리고 폐백을 드리는데 그 방식은 앞과 마찬가지로 한다.
예의사는 전하를 모시고 북쪽 계단을 통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이어 제물을 진배進排한 이후 여러 절차를 또 거행한다.
결국 사직단의 조영은 이런 제례를 거행하기에 알맞도록 조성된 것이지 그 규격이나 아름다움의 추구를 위한 시설물이 아니었음이 자명하다.
건축을 글자 없이 읽을 때 그 형상에만 집착하면 그 쓰임을 무시하거나 하는 수가 생기나 용도에 따라 완성된 건축물이라면 반드시 필요에 의하여 형성되었을 것이므로 이런 의례의 절차를 먼저 이해하여야 그 해석에 무리가 없게 된다.
그러니 글자 없이 배우는 대상이라 해도 그 근본을 익히 알아야 하는 것이므로 한옥문화원생들은 이 의궤를 밑바탕으로 하고 구조물을 설정하되 그 설정에서 어떤 추구가 있었는지를 살피는 안목을 키우는데 주력하고 있다.
사직단의 같은 유문이라도 홍살문의 너비와 높이의 비례가 적정하였을 때 근엄해 보이는 법이다. 그런 비례법이 과연 어떻게 이행되었는지는 글로 기록된 바가 전혀 없으므로 글자 없이 읽는 수 밖에 없는데 이 글자 없는 유규가 현존하는 기본 구조물이므로 그것들의 조영기법과 법식에 주목하고 그들이 지닌 가치를 파악하는데 우리들의 학문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한옥문화원 수강생과 수료생들은 바야흐로 이 글자 없는 학문, 우선 그 학문적 방법론부터 정립해 나가야 하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서구식 방법론으로는 감당되기 어려우므로 새로운 우리의 방법론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므로 그 새로운 학문을 木壽는 민학民學이란 방법론으로 수립해 나갔으면 하고 있다. 앞으로 이 문제는 우리들이 다 함께 충분히 논의 하였으면 싶다.
이제 늘 만나던 세월에 못다한 이야기를 앞으로 어떻게 더 이어갈 것인가를 두고 우리들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1, 2기나 마찬가지로 정보를 나누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갈 길의 모색은 역시 우리들 이야기의 진한 바탕이었다.
木壽는 이들에게 여러가지 자료를 챙겨주어야 할 것이란 생각인데 다들 그 점에 동의하여서 일이 점차 중차대하게 생겼다. 우리 고전古典에서 추릴 수 있는 자료라도 열심히 보급해 주어야겠다는 다짐이 새삼스럽다.
보는 일에서 글자 없는 것을 읽어야 한옥의 공부는 다부진 성과를 얻는다. 집에는 글자가 쓰여져 있지 않아 글로만 터득한 사람들에게는 글자 없는 부분의 이해가 어려운 법이다. 한옥문화원에서는 글자 없이 읽는 방법을 탐구하는 중이다. 그래야 그 분야에서 지식인이 배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글자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기록이 그 실상의 바탕이 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글자를 읽되 글자 없는 것과 함께 읽어야 하며, 글자 없는 것을 보되 글자에서 터득한 바탕이 밑바침 되지 않으면 허공에 뜨고 만다는 점을 木壽는 우리 전문인 과정 학생들에게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것 만으로 자기류의 해석을 하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학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분이 이끄는 모임에서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단社稷壇을 탐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넌즈시 어깨너머로 그 탐구하는 바를 구경하였다.
국사단國社壇과 국직단國稷壇 단의 배치된 형상과 축조된 구조와 주변의 담장과 유門의 존재에 대하여 상당히 치밀하게 탐색을 하면서 그 특색을 다른 구조물과 비교하였다. 건축물 탐구로는 손색 없는 수준이나 욕심 같아서는 여기에서 임금님이 제례祭禮를 받들던 모습까지를 설명되었으면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 때의 생각을 하고 우리 한옥문화원에서는 사직단에서 의례儀禮를 모시던 대요大要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발췌하여 <古典읽기>시간에 강의를 한다. 다행히 법제처에서 1981년도에 <국조오례의>를 한글로 고맙게 번역해 주어서 우리 젊은 이들이 읽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의례의 마련을 사흘 전 부터 시작되고 그 마련은 대단히 복잡하며 치밀하다. 사직단에 부속된 여러 시설들의 존재도 결국 이 의례의 거행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자세한 것은 <社稷署儀軌>를 참조)을 알게되면 지금 남아 있는 구조물만의 탐색으로는 제 구실과 그 존재를 충분히 인식하기 어렵다.
의례를 거행하는 당일에 면복을 입으신 임금님께서 서문 밖에 당도하시면 예의사禮儀使가 정문으로 모시고 들어와 판위版位에 나가 남쪽으로 서 계시도록 한다.
지금의 사직단 정문이라 부르는 보물 177호의 삼문 만이 남아 있으므로 여기의 서문은 어떻게 생긴 문인지 아직은 그 형상을 잘 모르고 있다.
소개된 그림에는 사직단 정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
임금님이 들어가 서 계시던 판위의 위치도 |
제례는 악공들이 아뢰는 주악과 열문무烈文舞가 추어지는 중에 거행된다. 주악은 순안악 7장이 연주된다.
임금님은 후토씨后土氏 신위神位 앞으로 나아가 서향하고 선다. 향로에 범향하고 폐백을 올린다. 이때 북쪽에서 남향하고 하는 진향進香과 진폐進幣와 반대로 진작進爵과 전작奠爵은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진행한다. 임금님께서는 홀을 잡고 절을 하였다가 일어나 바로 선다.
예의사는 임금님 모시고 국직단國稷壇 단으로 가서 향을 올리고 폐백을 드리는데 그 방식은 앞과 마찬가지로 한다.
예의사는 전하를 모시고 북쪽 계단을 통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이어 제물을 진배進排한 이후 여러 절차를 또 거행한다.
결국 사직단의 조영은 이런 제례를 거행하기에 알맞도록 조성된 것이지 그 규격이나 아름다움의 추구를 위한 시설물이 아니었음이 자명하다.
건축을 글자 없이 읽을 때 그 형상에만 집착하면 그 쓰임을 무시하거나 하는 수가 생기나 용도에 따라 완성된 건축물이라면 반드시 필요에 의하여 형성되었을 것이므로 이런 의례의 절차를 먼저 이해하여야 그 해석에 무리가 없게 된다.
그러니 글자 없이 배우는 대상이라 해도 그 근본을 익히 알아야 하는 것이므로 한옥문화원생들은 이 의궤를 밑바탕으로 하고 구조물을 설정하되 그 설정에서 어떤 추구가 있었는지를 살피는 안목을 키우는데 주력하고 있다.
사직단의 같은 유문이라도 홍살문의 너비와 높이의 비례가 적정하였을 때 근엄해 보이는 법이다. 그런 비례법이 과연 어떻게 이행되었는지는 글로 기록된 바가 전혀 없으므로 글자 없이 읽는 수 밖에 없는데 이 글자 없는 유규가 현존하는 기본 구조물이므로 그것들의 조영기법과 법식에 주목하고 그들이 지닌 가치를 파악하는데 우리들의 학문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한옥문화원 수강생과 수료생들은 바야흐로 이 글자 없는 학문, 우선 그 학문적 방법론부터 정립해 나가야 하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서구식 방법론으로는 감당되기 어려우므로 새로운 우리의 방법론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므로 그 새로운 학문을 木壽는 민학民學이란 방법론으로 수립해 나갔으면 하고 있다. 앞으로 이 문제는 우리들이 다 함께 충분히 논의 하였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