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正念주지스님을 비롯하여 부주지과 종무실의 여러 대덕들과 크고 작은 낙산사 일을 맡아서 진행하는 여러 대중들이 모두 한결같이 불탄 낙산사 重建에 몸과 마음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뒤늦게나마 그 대열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렇긴 해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직 익숙하지 못해서 하루 종일 경내를 맴돌면서 하나하나 익히느라 몰두하고 있다.
얼마 전에 김대벽사진가께서 다녀가셨다.
불에 탄 안타까운 자취를 사진에 담으시면서 종일 애를 쓰시더니 관음을 모셨던 圓通寶殿 자리 뒷산자락에서 따라다니고 있는 木壽를 뒤돌아 보시더니, "참 놀랍다. 옛 어른들이 집터를 정하시면서 背山臨水한 터를 애써 고르려 하였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군 그래"하시면서 원통보전 뒤편으로는 산봉우리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신다. 그리고는 木壽를 인도해서 원통전의 동해쪽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가신다.
"저것 보십시오. 저 골짜기 안의 큰 법당(寶陀殿)은 불에 타지 않았단 말입니다. 여기 높은 뒷편 봉우리에 불길이 번졌을 때 골짜기의 찬 바람이 더워진 공기 쪽으로 휘몰아 들었을 터인즉 불길이 법당이 있는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좌우로 퍼지며 회오리첬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해수관음상 있는편의 언덕 위의 나무들이 불에 타게 되었을 것이란 판단이시다.
"집터 잡으시면서 背山臨水한 터전을 터전을 제일로 치시던 우리 선조들의 식견이 놀랍지 않은가 말씀야" 하신다.
역시 경험이란 실질적이다. 이론만으로 배울 때는 무슨 소리인지 잘 터득이 되지 않아 아리송 하였었는데 그 말씀 듣고 보니 무릎을 치면서 감탄할 정도로 사태가 확연하게 이해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어른들이 空論으로 地勢論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인식"에서 출발하였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제, 이번에 촬영한 사진은 두고두고 그 실제론을 설파할 때 아주 요긴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만 하니 낙산사의 허락을 얻으면 그 사진을 활용할 수 있게 될것이다.
우리가 안목을 갖춘 분의 實見을 통한 실제적인 식견이 지닌 터득과 知見을 존중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實相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못한 삶의 입에 발린소리만으로는 진실을 切感하기 어려우나 이렇게 눈앞에 전개되어 있는 實際가 바탕이 되면 우리는 분명하게 터득할 수 있게 된다.
역시 눈밝은 큰 분을 모시고 다닌다는 행운을 이렇게 만긱할 수 있고나 싶어 그날 나는 상당히 흥분을 하였고 그렇다면 접근해올 불길을 앞으로 어떻게 제어해야 하느냐가 원통보전이 지닌 큰 과제가 되겟구나 싶은 큰 숙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木壽는 좀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경복궁 앞에 해태를 조각하여 石像이 멀리 관악산을 응시하도록 한 것은 관악산이 지닌 불기(火氣)를 억제시켜 한양성을 넘보지 못하게 한다는데 목적을 두었던 것이니 여기에도 불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화기를 억제하는 瑞獸像을 만들어 지키고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先人들의 지혜로 해서 그 이후로 한양성에 큰 불의 재앙이 없었다면 그것을 단순한 迷信이 하면서 방정을 떨지 말고 그 의도를 답습하여 새로운 시도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생각이다. 옛날 절에도 지킴이가 있었다. 우리문화를 전수받은 일본의 古代寺刹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고마이누高麗犬>의 존재나 佛國寺 多寶塔에 앉아 있는 石獅子像등도 볼 수 있으니 지금 그런 벽사상의 지킴이를 만든다고 해서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라면 낙산사 큰스님들께 의견을 말씀드려 보면 어떨까 싶어 역시 궁리 중이다.
원통전 뒤편 능선에 화방벽火防壁을 든든하게 쌓아주면 좋을 것이다. 木壽가 느끼기에는 설악산이 지닌 火氣가 襄陽땅을 엄습해 온 역사기록이 여러번 눈에 뜨이고 있고 2005년도 낙산사의 화재도 그런 불기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면 이 방화시설은 어쩌면 낙산사로는 급선무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가고 할 만 하다.
낙산어 어구에는 홍예문으로 완성된 城門이 있다. 이 문 좌우로 성벽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정상이라면 그 성벽은 화방벽의 구실을 톡톡히 하여 왔을법 하다. 언제 성벽이 사라졌는지를 木壽는 알지 못하지만 아직도 능선에 성벽의 자취가 있는 점으로 보아 근래에도 具存되어 있었을법 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시 쌓는 일이 합당한 일이 되며 그로 인하여 화방벽이 생겨 애써 중건한 낙산사의 여러 건물들을 후대에 이르기 까지 지속된다면 그것 또한 즐거움이 될것이란 생각도 해보고 있는데 낙산사를 애정으로 후원하고 계신 당국의 여러 어른들은 어찌 여기시려는지 모르겠다.
낙산사에 얼마나 머물지는 알 수 없지만 낙산사를 공부하는 시각에 충족을 느낄만큼 성숙되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도 낙산사 경내를 이리저리 헤메며 다닌다.
다니며 만나는 분 마다 반갑게 인사를 하며 아는 척 해준다. 참 고맙고 즐거운 일이다.
얼마 전에 김대벽사진가께서 다녀가셨다.
불에 탄 안타까운 자취를 사진에 담으시면서 종일 애를 쓰시더니 관음을 모셨던 圓通寶殿 자리 뒷산자락에서 따라다니고 있는 木壽를 뒤돌아 보시더니, "참 놀랍다. 옛 어른들이 집터를 정하시면서 背山臨水한 터를 애써 고르려 하였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군 그래"하시면서 원통보전 뒤편으로는 산봉우리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신다. 그리고는 木壽를 인도해서 원통전의 동해쪽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가신다.
"저것 보십시오. 저 골짜기 안의 큰 법당(寶陀殿)은 불에 타지 않았단 말입니다. 여기 높은 뒷편 봉우리에 불길이 번졌을 때 골짜기의 찬 바람이 더워진 공기 쪽으로 휘몰아 들었을 터인즉 불길이 법당이 있는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좌우로 퍼지며 회오리첬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해수관음상 있는편의 언덕 위의 나무들이 불에 타게 되었을 것이란 판단이시다.
"집터 잡으시면서 背山臨水한 터전을 터전을 제일로 치시던 우리 선조들의 식견이 놀랍지 않은가 말씀야" 하신다.
역시 경험이란 실질적이다. 이론만으로 배울 때는 무슨 소리인지 잘 터득이 되지 않아 아리송 하였었는데 그 말씀 듣고 보니 무릎을 치면서 감탄할 정도로 사태가 확연하게 이해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어른들이 空論으로 地勢論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인식"에서 출발하였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제, 이번에 촬영한 사진은 두고두고 그 실제론을 설파할 때 아주 요긴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만 하니 낙산사의 허락을 얻으면 그 사진을 활용할 수 있게 될것이다.
우리가 안목을 갖춘 분의 實見을 통한 실제적인 식견이 지닌 터득과 知見을 존중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實相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못한 삶의 입에 발린소리만으로는 진실을 切感하기 어려우나 이렇게 눈앞에 전개되어 있는 實際가 바탕이 되면 우리는 분명하게 터득할 수 있게 된다.
역시 눈밝은 큰 분을 모시고 다닌다는 행운을 이렇게 만긱할 수 있고나 싶어 그날 나는 상당히 흥분을 하였고 그렇다면 접근해올 불길을 앞으로 어떻게 제어해야 하느냐가 원통보전이 지닌 큰 과제가 되겟구나 싶은 큰 숙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木壽는 좀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경복궁 앞에 해태를 조각하여 石像이 멀리 관악산을 응시하도록 한 것은 관악산이 지닌 불기(火氣)를 억제시켜 한양성을 넘보지 못하게 한다는데 목적을 두었던 것이니 여기에도 불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화기를 억제하는 瑞獸像을 만들어 지키고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先人들의 지혜로 해서 그 이후로 한양성에 큰 불의 재앙이 없었다면 그것을 단순한 迷信이 하면서 방정을 떨지 말고 그 의도를 답습하여 새로운 시도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생각이다. 옛날 절에도 지킴이가 있었다. 우리문화를 전수받은 일본의 古代寺刹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고마이누高麗犬>의 존재나 佛國寺 多寶塔에 앉아 있는 石獅子像등도 볼 수 있으니 지금 그런 벽사상의 지킴이를 만든다고 해서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라면 낙산사 큰스님들께 의견을 말씀드려 보면 어떨까 싶어 역시 궁리 중이다.
원통전 뒤편 능선에 화방벽火防壁을 든든하게 쌓아주면 좋을 것이다. 木壽가 느끼기에는 설악산이 지닌 火氣가 襄陽땅을 엄습해 온 역사기록이 여러번 눈에 뜨이고 있고 2005년도 낙산사의 화재도 그런 불기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면 이 방화시설은 어쩌면 낙산사로는 급선무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가고 할 만 하다.
낙산어 어구에는 홍예문으로 완성된 城門이 있다. 이 문 좌우로 성벽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정상이라면 그 성벽은 화방벽의 구실을 톡톡히 하여 왔을법 하다. 언제 성벽이 사라졌는지를 木壽는 알지 못하지만 아직도 능선에 성벽의 자취가 있는 점으로 보아 근래에도 具存되어 있었을법 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시 쌓는 일이 합당한 일이 되며 그로 인하여 화방벽이 생겨 애써 중건한 낙산사의 여러 건물들을 후대에 이르기 까지 지속된다면 그것 또한 즐거움이 될것이란 생각도 해보고 있는데 낙산사를 애정으로 후원하고 계신 당국의 여러 어른들은 어찌 여기시려는지 모르겠다.
낙산사에 얼마나 머물지는 알 수 없지만 낙산사를 공부하는 시각에 충족을 느낄만큼 성숙되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도 낙산사 경내를 이리저리 헤메며 다닌다.
다니며 만나는 분 마다 반갑게 인사를 하며 아는 척 해준다. 참 고맙고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