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과 마루
구들의 이력과 유형
고구려의 구들은 방의 한편에만 설치하는 쪽구들이었다. 움집의 구들과 상통하는 구조이었다. 그것을 장갱(長坑)이라 불렀다. [구당서]의 장갱이 그것이다.
고구려 이래의 구들이 이웃에 오랜 세월 작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하는데, 북쪽지방에서는 대단히 요긴한 난방시설이어서 세월이 훨씬 흐른 뒤에도 구들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이웃에 있으면서 다투기도 하고 친선을 맺기도 하였던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위에도 구들이 보급되어 관계사(觀鷄寺)에도 구들을 시설하였었다. [수경주(水經注)]에 수록된 이야기이다.
원초의 시기로 부터 고구려를 거쳐 백제와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구들은 실내의 한쪽에 쪽고래를 켜고 아궁이를 시설하여 실내에서 불을 지피도록 된 구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겨울에 지독하게 내려 쌓이는 눈으로 바깥출입이 막혔을 때라도 능히 불을 지필 수 있게 해야한다는 기능적인 문제가 고려된 시설이었다고 해석된다. 이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어서 함경도지방에서 볼 수 있는 여섯 혹은 여덟간 겹집으로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계열의 쪽구들과 오늘의 방 전면을 난방하는 온돌방과의 징검다리로 발해 이후의 구들을 살펴야하는데 고려시대의 것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의 대부분은 조령 원터의 사례를 제외하면 고려시대에도 주류는 쪽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 사람들이 욱실이라 부르는 온돌방의 정착은 조선조에 이르러서야 확고하게 되었던 듯 하다. 물론 결론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유례가 너무 엉성하기 때문이다. 고려의 구들의 출현을 더 기다려 봐야 하겠다.
조선조의 구들 중에 함경, 평안, 황해도의 집에서 방의 반쪽에만 구들을 드린 예가 있다고 한 보고가 있는데 이는 정지를 지칭한 것이다. 오늘의 온돌방처럼 방 전체에 구들시설을 활발하게 시작한 것은 대략 임진왜란 이후가 아니겠는가 한다.
마루의 발전과 구조
마루는 남방의 따뜻한 지방으로 부터 발전하여 북쪽으로 전파되어 구들과 만나게 되었다. 마루는 한옥에 있어서 남방적인 특성으로 주로 여름에 사용하는 공간이 된다.
마루의 종류는 대청(마루), 툇마루, 쪽마루, 뜰마루로 나눌 수 있다. 대청 마루는 집의 중심이면서 모든 동선의 중심이기도 하다. 대청 마루는 향의 기준이 되며 2칸내지 3칸으로 만들어 진다.
툇마루는 아마도 쪽마루,뜰마루와 같이 혼용해 사용되는 폭넓은 개념으로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사실상은 다르다. 툇마루는 툇기둥이 나와있어야 형성되며 툇기둥과 안기둥 사이에 놓이는 폭이 좁은 마루로 처마 안쪽에 위치하여 실내에 속하게 된다.
쪽마루와 뜰마루는 놓이는 위치는 같으나 단지 구조적으로 마루가 기둥에 끼게 되어 고정된 것이 쪽마루,기둥에 고정됨 없이 이동이 자유로운 것이 뜰마루라 각기 부른다.
마루짜임은 장귀틀과 동귀틀은 폭이 큰 부재를 사용하되 네 모서리로만 보내게 되는데 내구성이 좋아 오래 간다. 귀틀맞춤은 장귀틀에 통장부를 만들어 동귀틀에 내다지로 맞추며 이 부분에 마루 동바리 장부 혹은 촉꽂이로 꿰맞춰 귀틀이 꽉 물려있도록 한다. 마루널은 장귀틀에 턱솔로 맞춰지는데 한쪽 끝의 홈턱을 변탕함 없이 마루널을 그냥 옆으로 밀어넣고 마지막 동귀틀을 맞춰 마감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동귀틀을 눕히지 않고 세로로 길게 세워 쓰며 마루면보다 튀어나오도록 동귀틀을 장귀틀에 맞춰넣는다. 장귀틀 장부는 내다지 뺄목으로 빼내고 메뚜기 산지를 끼워 고정시킨다. 혹은 벌림쐐기로 고정시켜서 뺄목을 잘라내기도 하는대 동바리는 장귀틀에 마추어 세우게 된다.
이렇게 장귀틀,동귀틀이 짜이면 그 사이에 두툼한 널판(혹은 청판이라고도 한다)을 끼우게 되는 과정이 남아 있다. 대개 청판은 마주한 두 장귀틀의 파인 홈을 따라 청판은 양팔을 벌리고 쭉쭉 밀려 끼어들어가는데 언제나 맨 마지막 청판은 한팔이 장귀틀 표면에 걸쳐진 채로 마감된다. 이는 청판 보수를 손쉽도록 해준다. 못에 의해 부재들이 고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구조의 짜임에 의해 설치와 보수시에도 간편히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조상의 슬기에 놀라울 뿐이다.
마루의 전면 기둥을 잇는 장귀틀 앞에 때로 덧대어지는 얇은 널판이 있는데 이를 여모판 또는 여모중방이라 한다. 이는 마루의 속보임을 줄이고 디딤돌에 놓여진 신발들이 마루 밑으로 떨어짐을 방지함에 있다.
흔히 우물마루라면 위에서 말한 장귀틀과 동귀틀 사이에 청판이 깔려 형성되는 것이고, 장마루라면 이 사이를 긴널판이 장마루 방향으로 놓이는 것을 말한다.
초기에는 마루로만 형성된 건물이 있어서 한옥의 구들과 조합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모양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락집
다락집은 나무를 의지해서 만든 오두막 집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생나무 가지를 상투 엮어 내부공간에 나뭇대기들을 걸쳐대 바닥을 만들어 사다리를 놓고 오르내린 것을 마루의 원초형으로 볼 수가 있다.
경(京)
곡식의 낟알을 저장하는 창고로 그 기능상 습기가 차면 상하기 쉬워 건조한 상태로 보관이 용이하다. 그 구조는 사방네기둥을 세우고 기둥 중턱쯤에 나무바닥을 만들어 땅으로부터 띄워놓는데 앞서 말한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의 피해를 막기 위함이다. 설치되는 장소는 집 부근에 두어 경계가 쉬우며 주위에 나무가 있어 드리우고 있는 곳과 지붕 밑은 당연히 벗어나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중으로부터 낙하되는 짐승이나 곤충류 따위로부터 공격을 미연에 막을 수 있을 뿐더러 통풍의 원활함도 꾀하기 쉽기 때문이다.
내루(內樓)
다락집이 집의 한 칸에 만들어지는 경우 이것을 내루라 부른다.
내루는 보통 사랑채에 구성되며 그 집에서 제일 경관이 잘 바라다보이는 자리에 설치된다. 그것은 집에 따라 평면의 유형이 바뀌게도 만드는데 주인의 명운(命運)과 경관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풍수적인 요소가 깔려 있다.
양청(凉廳)
왕조실록 등에서 보이는 것으로 궁궐과 같은 규모 있는 건물내에 피서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둔 마루방 또는 대청이라 여겨진다.
정자(亭子)
이규보의 사륜정기에 보면 '사방이 탁 트이고 높게 만든 것이 정자이다.'라고 하고는 이와 비슷한 구조인 사와 누와는 구별하고 있다.
구들의 이력과 유형
고구려의 구들은 방의 한편에만 설치하는 쪽구들이었다. 움집의 구들과 상통하는 구조이었다. 그것을 장갱(長坑)이라 불렀다. [구당서]의 장갱이 그것이다.
고구려 이래의 구들이 이웃에 오랜 세월 작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하는데, 북쪽지방에서는 대단히 요긴한 난방시설이어서 세월이 훨씬 흐른 뒤에도 구들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이웃에 있으면서 다투기도 하고 친선을 맺기도 하였던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위에도 구들이 보급되어 관계사(觀鷄寺)에도 구들을 시설하였었다. [수경주(水經注)]에 수록된 이야기이다.
원초의 시기로 부터 고구려를 거쳐 백제와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구들은 실내의 한쪽에 쪽고래를 켜고 아궁이를 시설하여 실내에서 불을 지피도록 된 구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겨울에 지독하게 내려 쌓이는 눈으로 바깥출입이 막혔을 때라도 능히 불을 지필 수 있게 해야한다는 기능적인 문제가 고려된 시설이었다고 해석된다. 이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어서 함경도지방에서 볼 수 있는 여섯 혹은 여덟간 겹집으로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계열의 쪽구들과 오늘의 방 전면을 난방하는 온돌방과의 징검다리로 발해 이후의 구들을 살펴야하는데 고려시대의 것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의 대부분은 조령 원터의 사례를 제외하면 고려시대에도 주류는 쪽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 사람들이 욱실이라 부르는 온돌방의 정착은 조선조에 이르러서야 확고하게 되었던 듯 하다. 물론 결론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유례가 너무 엉성하기 때문이다. 고려의 구들의 출현을 더 기다려 봐야 하겠다.
조선조의 구들 중에 함경, 평안, 황해도의 집에서 방의 반쪽에만 구들을 드린 예가 있다고 한 보고가 있는데 이는 정지를 지칭한 것이다. 오늘의 온돌방처럼 방 전체에 구들시설을 활발하게 시작한 것은 대략 임진왜란 이후가 아니겠는가 한다.
마루의 발전과 구조
마루는 남방의 따뜻한 지방으로 부터 발전하여 북쪽으로 전파되어 구들과 만나게 되었다. 마루는 한옥에 있어서 남방적인 특성으로 주로 여름에 사용하는 공간이 된다.
마루의 종류는 대청(마루), 툇마루, 쪽마루, 뜰마루로 나눌 수 있다. 대청 마루는 집의 중심이면서 모든 동선의 중심이기도 하다. 대청 마루는 향의 기준이 되며 2칸내지 3칸으로 만들어 진다.
툇마루는 아마도 쪽마루,뜰마루와 같이 혼용해 사용되는 폭넓은 개념으로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사실상은 다르다. 툇마루는 툇기둥이 나와있어야 형성되며 툇기둥과 안기둥 사이에 놓이는 폭이 좁은 마루로 처마 안쪽에 위치하여 실내에 속하게 된다.
쪽마루와 뜰마루는 놓이는 위치는 같으나 단지 구조적으로 마루가 기둥에 끼게 되어 고정된 것이 쪽마루,기둥에 고정됨 없이 이동이 자유로운 것이 뜰마루라 각기 부른다.
마루짜임은 장귀틀과 동귀틀은 폭이 큰 부재를 사용하되 네 모서리로만 보내게 되는데 내구성이 좋아 오래 간다. 귀틀맞춤은 장귀틀에 통장부를 만들어 동귀틀에 내다지로 맞추며 이 부분에 마루 동바리 장부 혹은 촉꽂이로 꿰맞춰 귀틀이 꽉 물려있도록 한다. 마루널은 장귀틀에 턱솔로 맞춰지는데 한쪽 끝의 홈턱을 변탕함 없이 마루널을 그냥 옆으로 밀어넣고 마지막 동귀틀을 맞춰 마감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동귀틀을 눕히지 않고 세로로 길게 세워 쓰며 마루면보다 튀어나오도록 동귀틀을 장귀틀에 맞춰넣는다. 장귀틀 장부는 내다지 뺄목으로 빼내고 메뚜기 산지를 끼워 고정시킨다. 혹은 벌림쐐기로 고정시켜서 뺄목을 잘라내기도 하는대 동바리는 장귀틀에 마추어 세우게 된다.
이렇게 장귀틀,동귀틀이 짜이면 그 사이에 두툼한 널판(혹은 청판이라고도 한다)을 끼우게 되는 과정이 남아 있다. 대개 청판은 마주한 두 장귀틀의 파인 홈을 따라 청판은 양팔을 벌리고 쭉쭉 밀려 끼어들어가는데 언제나 맨 마지막 청판은 한팔이 장귀틀 표면에 걸쳐진 채로 마감된다. 이는 청판 보수를 손쉽도록 해준다. 못에 의해 부재들이 고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구조의 짜임에 의해 설치와 보수시에도 간편히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조상의 슬기에 놀라울 뿐이다.
마루의 전면 기둥을 잇는 장귀틀 앞에 때로 덧대어지는 얇은 널판이 있는데 이를 여모판 또는 여모중방이라 한다. 이는 마루의 속보임을 줄이고 디딤돌에 놓여진 신발들이 마루 밑으로 떨어짐을 방지함에 있다.
흔히 우물마루라면 위에서 말한 장귀틀과 동귀틀 사이에 청판이 깔려 형성되는 것이고, 장마루라면 이 사이를 긴널판이 장마루 방향으로 놓이는 것을 말한다.
초기에는 마루로만 형성된 건물이 있어서 한옥의 구들과 조합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모양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락집
다락집은 나무를 의지해서 만든 오두막 집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생나무 가지를 상투 엮어 내부공간에 나뭇대기들을 걸쳐대 바닥을 만들어 사다리를 놓고 오르내린 것을 마루의 원초형으로 볼 수가 있다.
경(京)
곡식의 낟알을 저장하는 창고로 그 기능상 습기가 차면 상하기 쉬워 건조한 상태로 보관이 용이하다. 그 구조는 사방네기둥을 세우고 기둥 중턱쯤에 나무바닥을 만들어 땅으로부터 띄워놓는데 앞서 말한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의 피해를 막기 위함이다. 설치되는 장소는 집 부근에 두어 경계가 쉬우며 주위에 나무가 있어 드리우고 있는 곳과 지붕 밑은 당연히 벗어나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중으로부터 낙하되는 짐승이나 곤충류 따위로부터 공격을 미연에 막을 수 있을 뿐더러 통풍의 원활함도 꾀하기 쉽기 때문이다.
내루(內樓)
다락집이 집의 한 칸에 만들어지는 경우 이것을 내루라 부른다.
내루는 보통 사랑채에 구성되며 그 집에서 제일 경관이 잘 바라다보이는 자리에 설치된다. 그것은 집에 따라 평면의 유형이 바뀌게도 만드는데 주인의 명운(命運)과 경관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풍수적인 요소가 깔려 있다.
양청(凉廳)
왕조실록 등에서 보이는 것으로 궁궐과 같은 규모 있는 건물내에 피서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둔 마루방 또는 대청이라 여겨진다.
정자(亭子)
이규보의 사륜정기에 보면 '사방이 탁 트이고 높게 만든 것이 정자이다.'라고 하고는 이와 비슷한 구조인 사와 누와는 구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