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서 오사카 난바難波역에 가서 高野山으로 가는 南海電車를 타고 가면 2시간 반이 더 걸려 極樂橋역에 당도하고 여기서 크레인이 끌어 올리는 索道전차를 타고 급한 경사를 오르면 해발 1200메터의 정상에 당도한다. 역에서 800원을 주고 종일 타고 다닐 수 있는 버스표를 사고 버스에 올랐다. 약 3km 떨어진 곳이 있는 奧院으로 갔다.
무수한 묘탑들이 즐비한 곳이다. 전국에서 여기 까지 와서 묘를 쓴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묘표석에 각 지역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영산을 찾아온 무리들이다.
고야산은 이름 그대로 높은 들인데 정말 그렇다. 해발이 그렇게 높은 산에 이렇게 넓은 터전이 열려 있다니 놀랍다. 이 자리를 오늘의 도시처럼 만들게 한 장본인은 眞言宗파를 대성하게 근본을 마련한 弘法대사라고 한다.
고야산은 백제 사람들이 663년 이후에 임시수도를 창설하였던 오미近江의 진산인 比叡山과 쌍벽을 이루는 영산 중의 영산인데 비예산에는 정상에 延曆寺를 창건하여 천태종의 종파의 본산을 이룩한 반면에 고야산에는 金剛峰寺가 넓은 터전을 차지하고 있고 주변에 수 많은 암자들이 있어서 산엔 온통 불교의 꽃이 만발하였다고 할 정도이다.
눈에 보이는대로 살피며 무작정 걷기로 하였다. 오원을 떠나 약 3km의 반대편에 위치한 곳으로 가서 마을로 들어서는 里門이라고 할, 우리로 치면 山門인 一柱門격인 大門을 구경하였다. 정면 5간 측면 2간의 2층의 重門이다. 높직하고 장대하다. 아마 우리도 삼국시대 이래 고려 때까지는 이런 장대한 문이 절의 산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일주문은 임진왜란 이후로 절의 경제상태가 극도로 나빠졌을 때 세우기 시작한 축소형이라고 느껴지는데 다른 나라 사원의 산문들도 규모가 도저한 것이 보통이다.
날이 제법 쌀쌀해서 손끝이 시려 올라오나 어디 들어가 어한 하기도 어렵다. 하도 눈에 보이는 것이 많아 이리저리 살피는 중에 벌써 금강봉사에 당도하였다. 경내 규모가 넓어서 가람배치의 정연한 규모를 찾기는 어렵겠다. 처음부터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경영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유분방해서 오히려 구애받는 기분을 떨쳤다고도 할 수 있는데 경내에 동탑과 서탑이 있는데 규모도 다르고 위치한 높낮이도 달라 당초에 좌우로 대칭 시켰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서탑은 목탑인데 동탑은 새로 중건하여 말쑥하며 규모도 크고 높직한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상하 2중의 기단이 장중한데 서탑은 옛 모습을 그냥 지녔고 규모도 작고 아담하다. 두 탑은 2층의 다보탑형으로 조성되어 있어 여느 탑만 보아오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일본식의 이런 유형의 다보탑은 상당히 많은 유례를 남기고 있고 한번 자세히 보고 싶었던 차라 이리저리 열심히 보고 있는데 한 늙스구레한 영감이 옆에 와서 자꾸 말을 건다. 자기가 설명을 해보겠다는 의도인가 싶어 귀를 기울이려 하였더니, 당신 이리저리 살피는 것이 전문가다우니 자기에게 이 탑의 특성을 설명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춥긴 하고 벌써 해는 뉘엇거리는데 한가한 소리 듣고 있자니 속이 틀려서 그렇지 않아도 점심 거른 배가 쪼록인 판이라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역으로 나갈 차를 기다리며 시간표를 보니 한참이나 있어야 버스가 온다고 해서 가깝게 서 있는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가자고 하였더니 산의 외곽지대를 한바퀴 돈다. 가깝게 가는 길을 두고 한바퀴 도니 부아가 나는데 요금은 엄청나게 뛰어오르고 있다. 속이 상해 차창을 내다보니 저만큼 만학천봉이 발아래 깔린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이 산이 얼마나 높고 고고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수업료를 내지 않았다면 해발 1200메이터의 고산의 의젓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고 말았을 것이다.
급경사를 내려가는 삭도를 타고 앉아 무엇이던 수업료를 내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구나 하는 점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택시 값에 버스표 사고도 걸어다녔으니 그 돈하며, 모두 어쭙지 못한 처신으로 낭비한
것 같지만 이렇게 돌이켜 보니 그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이 상기된다.
속세는 이미 어두워 있었고 나라에 돌아와 밤중에야 식은 밥을 한 술 떠서 허기를 면하였는데 지난번 우리 한옥문화원 탐구 팀의 분들이 갖다 준 반찬이 힘을 모두어 주어서 그 날도 늦게 까지 책을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