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에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고 있다. 낙산사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인데 <三國遺事>의 의상義湘대사의 史料에서 낙산사 관음굴觀音崛에 상주하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이야기가 매우 신비롭고 흥미로운데 관세음보살께서 山의 정상에 대나무 한 쌍을 용출湧出시키면서 그 자리에 법당을 지으라고 하셨다는 데서 우리는 한 건축물이 탄생한 연기緣起를 발견하게 된다. 이 법당의 건설로 洛山寺가 개창開創을 본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개산開山하는 절의 시작에 비하여 낙산사는 관음보살에 의하여 창건 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만 하여서 역시 흥미를 유발한다.
굴산사파의 비조鼻祖인 범일조사梵日祖師는 낙산사에서 정취正趣보살을 친견하고 正趣殿을 지어 모셨다 한다. 이들의 설화로 보아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산의 정상에, 정취전이 그 앞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두 전각은 지세에 따라 건좌손향乾坐巽向의 좌향에 따라 포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地勢로 보아 달리 방도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음도 정취도 보살상이면 어떤 분인지 如來를 모셨을 터인데 낙산사에 연관된 기록 중에는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비로자나불, 등 어느 분도 거론되어 있지 않다. 절에 본존불이 아니 계시고 보살들만 봉안된 다른 예가 더 있는지 나로서는 알기 어려우나 우리의 보편적인 상식의 범위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찾아가는 절의 법당에는 여래상을 중심에, 그 좌우에 補處로 보살상을 排設하는 일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관심거리는 낙산사와 조선왕실과의 인연 관계이다. 이성계 태조 이래 낙산사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世祖는 굉대宏大하게 낙산사를 중창하였다고 世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창불사를 學悅이라는 스님이 주도하였다.
낙산사와 이성계 태조 집안과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가은 내용으로 기록하였다.
태조의 아버님이신 桓祖의 先代이신 度祖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인데 도조의 아버님이신 翼祖께서 원하시는 아드님의 출생을 고대하였으나 세월만 흐르고 있었다.
함흥지방에 사시던 이 분들은 동해안 낙산사 이야기를 듣고 계셨나 보다. 익조는 부인과 더불어 낙산사에 가서 아들 점지해 주시기를 관음전에 빈다.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서 틀림없이 귀한 아들을 얻을 터이니 그 아이 이름을 ‘善來’라 지으라 하고는 사라진다. 곧 태기가 있어 순산하니 정말 아들인지라 그 이름을 ‘선래’ 짓고 애지중지 하니 그가 곧 度祖이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낙산사가 조선왕조의 出於之地라 할 만 하다고도 할 수 있게 된다. 그 고마움의 보답으로 왕실에서 낙산사를 중창하고 봄 가을에 齋를 올리는 恒規를 정할 만 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역대 임금님 중에도 世祖는 아주 열성이었음을 世祖實錄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세조는 낙산사에서 舍利가 나누어지는 分舍利의 이적을 목격한다. 동행한 大官들도 그 이적을 陳賀드리니 임금님은 죄수들을 赦免하라는 특명을 내려 慶賀한다.
세조는 금강산에 가서도 여러 가지 이적을 경험하고 수행한 백관들의 진심어린 陳賀를 받는다. 그 세조는 倭에서 온 사신 편에 일본국왕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부처에게 귀의할 것을 권유한다. 물론 이 편지의 내용도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大義를 흔히 배불정책으로 일관한 시대처럼 말하려는 경향의 학자들의 글을 우리는 더러 읽는다. 그렇다면 세조의 성향은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 것인가? 아리송하다.
조선왕조를 억불정책을 일관하여 불교를 맹렬히 탄압한 듯이 말하는 글을 읽으면서 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그 많은 사찰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가 아리송해 진다. 억불정책을 그렇게 철저하게 구사하였다면 조선조에 사찰이 남아 있을 수 없을 터인데 현존하는 국보사찰이라 世稱되는 절들의 대부분은 조선시대에 개창되었거나 그 수명을 부지해온 사찰들이다. 억불정책의 내용과 그 한계가 어떠하였는지를 나 같은 사람은 잘 알기 어려우나 나처럼 건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오늘에 새로 들어선 절 보다는 조선왕조를 겪어온 사찰이 월등히 많았고 지금도 그 자세를 당당히 견지하고 있음을 눈여겨보는 입장에서는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어 지금 다시 왕조실록을 뒤져기며 實錄에 登載된 사찰의 이름들을 정리해 보고 있다. 이 작업이 언제 마무리 지을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하다는 마음을 다지고 있다. 누가 함께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큰 도움이 되겠다. 혹시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서로 의견을 나누며 그 깊이를 돈독히 하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