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눈에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옛날 문헌에 실린 정보를 다시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광화문 문루 담장 안에서 대관(臺官)들이 모여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의논하였으므로 거기를 성상소(城上所)라고 불렀다.
임짐왜란때 경복궁이 불에 탄다. 광화문도 역시 소실되어서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기 이전까지는 대관들이 조촐하게 모일 장소가 없었다. 말하자면 '성상소'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장소가 없어졌다고 해서 대관들의 논의가 중단될 수 없는 노릇이므로 논의는 다른 장소에서 하되 관례에 따라 '조보'(朝報, 승정원에서 임금님이 결정하신 政事와 정원에서 결정된 사항의 내용을 아침마다 관원에게 알려주는 통보)에는 '성상소'의 논의된 일을 실어 통보하였다.
성상소가 광화문 문루의 담장 안쪽이었다는 사실만 아는 이는 광화문이 불탄 이후 그 장소가 어디를 지칭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되나, 관념적인 호칭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그런가 여기게 된다.
광화문 유축(陸築) 위 문루 외곽으로 낮게 쌓은 담장을 지금은 통칭 여담(女墻)이라 부른다.
국립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으로 1960년대 문화재, 특히 목조건축물 중, 보수를 전담하였던 임천(林泉) 선생은 문헌과 현장에서 채록된 건축용어를 정리하여 『용어집』을 국립박물관 총서로 간행한 바 있었다. (지금 그 책을 읽는 이는 임천 선생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김재원 박물관장과 자료를 정리한 윤무병 두 분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는 문루의 바깥둘레의 담장을 '여담'이라고 하였는데 이익 선생은 『성호사설』(제15권 인사문, 성상소 조항)에서 '곡장(曲墻)'이라 하였다.
현대에 통용되는 '곡장'이란 용어는 왕과 왕비 그리고 대군, 공주, 군과 옹주에 한하여 그들 무덤 뒤편에 낮게 쌓는 담장을 일컫는 것으로 되었다.
문루 둘레의 담장과 능묘 뒤편의 낮은 담장은 그 구조가 서로 다르다. 두 담장은 당연히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야 옳다고 한다면 구분해 불러야 하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성호선생의 '곡장'의 지견을 단숨에 무시하긴 어렵다.
이럴 때는 다음의 자료가 나설 때까지 결정을 미루어 두는 것이 좋다고 잠깐 숨을 고르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야 할 까닭 중에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개념적으로 순화되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 볼 필요가 있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여러 가지 낱말을 읽히기 위해 『물명고(物名考)』나 『재물보(才物譜)』와 같은 책을 만들어 각종 현상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정리 기록하여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일단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취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다산 선생은 단순하게 낱말을 정리하기보다는 한발 더 나가 그 단어들이 지니고 있는 내력까지를 규명하려 하였다. 그의 박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의 사례들과 비교해 가면서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런 노력의 일단을 그 분의 명저 중의 하나인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도 볼 수 있다.
木壽는 워낙 글이 짧아 원문을 자유스럽게 읽을 수 없어 김종권(金鍾權) 선생이 역주하신 일지사(一志社) 간행(1979.)의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중 건축과 연관된 용어를 설명하신 대목이 있다.
한 예를 P.215의 제3권 '헌(軒)·청(廳)'에서 들 수 있는데 그 해석의 원문은 이렇다.
軒·廳: 헌(軒 추녀 끝, 초헌)이란 첨우( 宇 *추녀 끝)를 말하는 것이고, 청(*관청, 대청)이란 청사(廳事 *정사를 들어 처리) 하는 집을 말한다. 우리 나라 말에 무릇 잔판(棧板, 복도널)을 편 데를 말루(抹樓 *마루)라 하여 곧 헌(軒)과 청(廳)을 헌과 청을 이에 해당시키는데 이는 잘못이다.
헌은 원래 높은 수레(高車)의 이름이고, 첨우( 宇)의 끝으로 헌거창계(軒擧 谿 *높이 올라 전망이 좋은것)를 빌어 이름한 것이고, 장랑(長廊 *긴행랑)에 창이 있고 주위로 돌게 된 것 또한 헌이라 한다. <좌사(左思)의 위도부(魏都賦) 주헌중천(周軒中天)이라는 글의 주(註)에도 이와 같이 말하였다> 또 전당(殿堂) 앞의 추녀( )가 특히 일어나고 곡연(曲椽 *굽은 서까래)의 가운데 대들보가 없는 것도 또한 헌(軒)이라고 말한다.
<천자(天子)가 정당(正堂)에 나가지 않고 평대(平臺)에 나가는 것을 임헌(臨軒)이라고 말한다. 이는 한서주(漢書註)에 보인다>
역서(譯書)에는 무릇 넓은 창(廣窓), 짧은 추녀(短 )의 집(室)은 곧 이를 헌(軒)이라 말한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잔판(棧板)이 아닌 것을 헌(軒)이라 한다.
청(廳)은 본래 관부치관(官府治官 *관청, 청사하는 집)의 집(室)인데 한(漢)나라 진(晉)은 다 청(聽, 정사를 듣는다는 뜻)을 만들고, 육조(六朝) 이래로는 청(聽)자에 엄( )자 머리를 더하여 청(廳)자를 만들었는데 후세에 사사로운 집(私室)에 붙은 그 외사(外舍 *바깥채)로, 일을 다스리는 곳 또한 청(廳 *행랑)이라고 이름하였다. <이 문정(李文靖)은 청사의 앞은 겨우 말이 들어감을 용납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서 내사중당(內舍中堂)을 이름하여 대청(大廳)이라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우리가 쓰는 '대청'이 잘못이란 지적도 있다. 가슴이 뜨끔할 일이다.
그런데 木壽는 이 번역된 글만으로는 다산선생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번역한 주(註)의 해석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혼동이 생기기 때문이다.
첫머리에서 헌(軒)을 '추녀 끝'이라 번역하고, 첨우( 宇) 또한 '추녀의 끝'이라고 번역하였다. 자는 중국적인 개념이 「옥사수(屋四垂)」이므로 추녀 없는 맞배집을 고려하면 이 개념은 지붕의 사면 가장자리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말의 '처마'에 해당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용어 개념과 비교해 가면서 이 번역된 글을 한번 음미해 볼 분이 계시다면 시도해 봐주시기를 기대한다.
기왕의 번역이 건축구조를 파악할 기회가 적었던 지식인들의 용어해설에서 출발된 것이라면 건축구조에 식견이 있는 분들의 새로운 해석이 기대될 만 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를 위해 다산선생의 본문을 옮겨보았다.
軒者 宇也 廳者 廳事之屋也. 東語凡棧板所 . 謂之抹樓 仍以軒與廳當之
非矣. 軒本高車之名, 宇之末 軒擧 豁 借名之也, 長廊之有 而周廻者.
亦謂之軒(左思魏都賦, 周軒中天註說如此), 又殿堂前 特起曲椽, 無中梁者
亦謂之軒(天子不御正堂 而御平臺曰臨軒, 見漢書注), 譯書凡廣窓短 之室
卽謂之軒 不必棧板者 爲軒也 ·廳本官府治官之室, 漢晉皆作廳 육조이강
加 作廳, 後世私室 其外舍治事之處 亦得名廳(李文靖廳事前. 僅容旋馬)
今俗內舍中堂 名曰大廳誤.
다산 선생의 건축에 연관된 낱말의 인식은 그 기반이 중국문헌에서 비롯된다. 그 예를 계속되는 항목에서 읽을 수 있다. 역시 김종권 선생의 번역문에 의지한다.
斜廊: 사랑(斜廊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집)이란 집 곁에 가로 지은 문간방(橫 )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잘못 번역하여 바깥집(외사)으로, 일을 보살펴 처리(廳事)하는 집을 사랑(斜廊)이라고 말한다. <옛날 풍속에는 안집(內舍)은 넓고 크고, 바깥집(外舍)은 낮고 작으며, 다른 낭무(廊 *행랑, 문간방)가 없으므로 중국 사랑의 이름을 모칭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는 바깥집(外舍)이 더욱 넓고 크므로 사랑(斜廊)이란 이름은 더욱 합당하지 않다.> 그리고 托樑:탁량(탁량 *기둥 위에 돌려 얹은 나무)을 잘못 옮겨 도리(徒里)라 하고 <托樑의 음은 「토량」이다.> 斗拱:두공(斗拱 *들보 위에 세운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을 잘못 옮겨 대공(大共)이라 하고(斗拱의 음은 '투궁'이다.) 推 : 퇴창(推 *밀어서 여는 창문)을 잘못 옮겨 도이창(刀伊窓)이라 하고,<推 의 음은 '튀촹'이다> 薄縫:박봉(薄縫 *박궁, 박공, 마루 머리나 합각 머리에 붙인 널)을 잘못 옮겨 박궁(朴宮)이라 하고<薄縫의 음은 '보붕'이다> 洞:항동( 洞 *굴뚝, 아궁이에 불을 떼어 연기가 방고래를 지나 빠져나가게 만든 장치)을 잘못 옮겨 굴독(窟禿 *굴뚝)이라 하고< 洞의 음은 '캉둥'인데 우리 나라 말은 이를 고래(高來)라 말하고, 돌( *굴뚝)을 굴독(窟禿)이라 한다> 廊:청랑( 廊 *뒷간)을 잘못 옮겨 정랑(精朗)이라 한다. <청랑의 음은 '칭랑'이다>
이런 건축 이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것 같다. 논의와 토론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역시 참고를 위해 다산선생의 원문을 옮겨본다.
斜廊者 堂側橫 也 東人誤譯 今以外舍廳事之室 謂之斜廊(古俗內舍宏大 外
舍低小 無異廊 故冒中國斜廊之名 今俗外舍 益宏大 斜廊之名 尤不合矣)
托樑誤飜爲徒里(托樑音 토량). 斗拱誤飜爲大共(斗拱音 투궁). 推 誤飜爲刀
伊窓(推 音 뒤촹). 薄縫誤飜爲朴宮(薄縫音 보봉). 洞誤飜爲窟禿( 洞音
장둥, 東言謂之高來 而以 爲窟禿). 廊誤飜爲精朗( 廊音 칭랑).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광화문 문루 담장 안에서 대관(臺官)들이 모여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의논하였으므로 거기를 성상소(城上所)라고 불렀다.
임짐왜란때 경복궁이 불에 탄다. 광화문도 역시 소실되어서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기 이전까지는 대관들이 조촐하게 모일 장소가 없었다. 말하자면 '성상소'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장소가 없어졌다고 해서 대관들의 논의가 중단될 수 없는 노릇이므로 논의는 다른 장소에서 하되 관례에 따라 '조보'(朝報, 승정원에서 임금님이 결정하신 政事와 정원에서 결정된 사항의 내용을 아침마다 관원에게 알려주는 통보)에는 '성상소'의 논의된 일을 실어 통보하였다.
성상소가 광화문 문루의 담장 안쪽이었다는 사실만 아는 이는 광화문이 불탄 이후 그 장소가 어디를 지칭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되나, 관념적인 호칭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그런가 여기게 된다.
광화문 유축(陸築) 위 문루 외곽으로 낮게 쌓은 담장을 지금은 통칭 여담(女墻)이라 부른다.
국립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으로 1960년대 문화재, 특히 목조건축물 중, 보수를 전담하였던 임천(林泉) 선생은 문헌과 현장에서 채록된 건축용어를 정리하여 『용어집』을 국립박물관 총서로 간행한 바 있었다. (지금 그 책을 읽는 이는 임천 선생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김재원 박물관장과 자료를 정리한 윤무병 두 분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는 문루의 바깥둘레의 담장을 '여담'이라고 하였는데 이익 선생은 『성호사설』(제15권 인사문, 성상소 조항)에서 '곡장(曲墻)'이라 하였다.
현대에 통용되는 '곡장'이란 용어는 왕과 왕비 그리고 대군, 공주, 군과 옹주에 한하여 그들 무덤 뒤편에 낮게 쌓는 담장을 일컫는 것으로 되었다.
문루 둘레의 담장과 능묘 뒤편의 낮은 담장은 그 구조가 서로 다르다. 두 담장은 당연히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야 옳다고 한다면 구분해 불러야 하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성호선생의 '곡장'의 지견을 단숨에 무시하긴 어렵다.
이럴 때는 다음의 자료가 나설 때까지 결정을 미루어 두는 것이 좋다고 잠깐 숨을 고르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야 할 까닭 중에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개념적으로 순화되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 볼 필요가 있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여러 가지 낱말을 읽히기 위해 『물명고(物名考)』나 『재물보(才物譜)』와 같은 책을 만들어 각종 현상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정리 기록하여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일단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취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다산 선생은 단순하게 낱말을 정리하기보다는 한발 더 나가 그 단어들이 지니고 있는 내력까지를 규명하려 하였다. 그의 박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의 사례들과 비교해 가면서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런 노력의 일단을 그 분의 명저 중의 하나인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도 볼 수 있다.
木壽는 워낙 글이 짧아 원문을 자유스럽게 읽을 수 없어 김종권(金鍾權) 선생이 역주하신 일지사(一志社) 간행(1979.)의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중 건축과 연관된 용어를 설명하신 대목이 있다.
한 예를 P.215의 제3권 '헌(軒)·청(廳)'에서 들 수 있는데 그 해석의 원문은 이렇다.
軒·廳: 헌(軒 추녀 끝, 초헌)이란 첨우( 宇 *추녀 끝)를 말하는 것이고, 청(*관청, 대청)이란 청사(廳事 *정사를 들어 처리) 하는 집을 말한다. 우리 나라 말에 무릇 잔판(棧板, 복도널)을 편 데를 말루(抹樓 *마루)라 하여 곧 헌(軒)과 청(廳)을 헌과 청을 이에 해당시키는데 이는 잘못이다.
헌은 원래 높은 수레(高車)의 이름이고, 첨우( 宇)의 끝으로 헌거창계(軒擧 谿 *높이 올라 전망이 좋은것)를 빌어 이름한 것이고, 장랑(長廊 *긴행랑)에 창이 있고 주위로 돌게 된 것 또한 헌이라 한다. <좌사(左思)의 위도부(魏都賦) 주헌중천(周軒中天)이라는 글의 주(註)에도 이와 같이 말하였다> 또 전당(殿堂) 앞의 추녀( )가 특히 일어나고 곡연(曲椽 *굽은 서까래)의 가운데 대들보가 없는 것도 또한 헌(軒)이라고 말한다.
<천자(天子)가 정당(正堂)에 나가지 않고 평대(平臺)에 나가는 것을 임헌(臨軒)이라고 말한다. 이는 한서주(漢書註)에 보인다>
역서(譯書)에는 무릇 넓은 창(廣窓), 짧은 추녀(短 )의 집(室)은 곧 이를 헌(軒)이라 말한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잔판(棧板)이 아닌 것을 헌(軒)이라 한다.
청(廳)은 본래 관부치관(官府治官 *관청, 청사하는 집)의 집(室)인데 한(漢)나라 진(晉)은 다 청(聽, 정사를 듣는다는 뜻)을 만들고, 육조(六朝) 이래로는 청(聽)자에 엄( )자 머리를 더하여 청(廳)자를 만들었는데 후세에 사사로운 집(私室)에 붙은 그 외사(外舍 *바깥채)로, 일을 다스리는 곳 또한 청(廳 *행랑)이라고 이름하였다. <이 문정(李文靖)은 청사의 앞은 겨우 말이 들어감을 용납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서 내사중당(內舍中堂)을 이름하여 대청(大廳)이라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우리가 쓰는 '대청'이 잘못이란 지적도 있다. 가슴이 뜨끔할 일이다.
그런데 木壽는 이 번역된 글만으로는 다산선생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번역한 주(註)의 해석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혼동이 생기기 때문이다.
첫머리에서 헌(軒)을 '추녀 끝'이라 번역하고, 첨우( 宇) 또한 '추녀의 끝'이라고 번역하였다. 자는 중국적인 개념이 「옥사수(屋四垂)」이므로 추녀 없는 맞배집을 고려하면 이 개념은 지붕의 사면 가장자리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말의 '처마'에 해당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용어 개념과 비교해 가면서 이 번역된 글을 한번 음미해 볼 분이 계시다면 시도해 봐주시기를 기대한다.
기왕의 번역이 건축구조를 파악할 기회가 적었던 지식인들의 용어해설에서 출발된 것이라면 건축구조에 식견이 있는 분들의 새로운 해석이 기대될 만 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를 위해 다산선생의 본문을 옮겨보았다.
軒者 宇也 廳者 廳事之屋也. 東語凡棧板所 . 謂之抹樓 仍以軒與廳當之
非矣. 軒本高車之名, 宇之末 軒擧 豁 借名之也, 長廊之有 而周廻者.
亦謂之軒(左思魏都賦, 周軒中天註說如此), 又殿堂前 特起曲椽, 無中梁者
亦謂之軒(天子不御正堂 而御平臺曰臨軒, 見漢書注), 譯書凡廣窓短 之室
卽謂之軒 不必棧板者 爲軒也 ·廳本官府治官之室, 漢晉皆作廳 육조이강
加 作廳, 後世私室 其外舍治事之處 亦得名廳(李文靖廳事前. 僅容旋馬)
今俗內舍中堂 名曰大廳誤.
다산 선생의 건축에 연관된 낱말의 인식은 그 기반이 중국문헌에서 비롯된다. 그 예를 계속되는 항목에서 읽을 수 있다. 역시 김종권 선생의 번역문에 의지한다.
斜廊: 사랑(斜廊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집)이란 집 곁에 가로 지은 문간방(橫 )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잘못 번역하여 바깥집(외사)으로, 일을 보살펴 처리(廳事)하는 집을 사랑(斜廊)이라고 말한다. <옛날 풍속에는 안집(內舍)은 넓고 크고, 바깥집(外舍)은 낮고 작으며, 다른 낭무(廊 *행랑, 문간방)가 없으므로 중국 사랑의 이름을 모칭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는 바깥집(外舍)이 더욱 넓고 크므로 사랑(斜廊)이란 이름은 더욱 합당하지 않다.> 그리고 托樑:탁량(탁량 *기둥 위에 돌려 얹은 나무)을 잘못 옮겨 도리(徒里)라 하고 <托樑의 음은 「토량」이다.> 斗拱:두공(斗拱 *들보 위에 세운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을 잘못 옮겨 대공(大共)이라 하고(斗拱의 음은 '투궁'이다.) 推 : 퇴창(推 *밀어서 여는 창문)을 잘못 옮겨 도이창(刀伊窓)이라 하고,<推 의 음은 '튀촹'이다> 薄縫:박봉(薄縫 *박궁, 박공, 마루 머리나 합각 머리에 붙인 널)을 잘못 옮겨 박궁(朴宮)이라 하고<薄縫의 음은 '보붕'이다> 洞:항동( 洞 *굴뚝, 아궁이에 불을 떼어 연기가 방고래를 지나 빠져나가게 만든 장치)을 잘못 옮겨 굴독(窟禿 *굴뚝)이라 하고< 洞의 음은 '캉둥'인데 우리 나라 말은 이를 고래(高來)라 말하고, 돌( *굴뚝)을 굴독(窟禿)이라 한다> 廊:청랑( 廊 *뒷간)을 잘못 옮겨 정랑(精朗)이라 한다. <청랑의 음은 '칭랑'이다>
이런 건축 이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것 같다. 논의와 토론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역시 참고를 위해 다산선생의 원문을 옮겨본다.
斜廊者 堂側橫 也 東人誤譯 今以外舍廳事之室 謂之斜廊(古俗內舍宏大 外
舍低小 無異廊 故冒中國斜廊之名 今俗外舍 益宏大 斜廊之名 尤不合矣)
托樑誤飜爲徒里(托樑音 토량). 斗拱誤飜爲大共(斗拱音 투궁). 推 誤飜爲刀
伊窓(推 音 뒤촹). 薄縫誤飜爲朴宮(薄縫音 보봉). 洞誤飜爲窟禿( 洞音
장둥, 東言謂之高來 而以 爲窟禿). 廊誤飜爲精朗( 廊音 칭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