伯顔 金大璧선생께서 천당으로 떠나시고 나니 허전한 마음이 가슴을 짖누르고 있다. 1950년대에 처음 만나 보였으니 벌써 50년이 넘은 세월을 모시고 다니며 참 많이도 배웠다.
전국을 누비고 다니시는 분을 따라 이것 저것 보는 동안 새로운 식견을 많이 터득하게 되었는데 伯顔선생님의 교시가 主題가 되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바위文化'라는 주제도 그로 인하여 조성된 것인데 무심히 지나치다 보면 백안선생님은 저만치서 벌써 카메라를 들여대고 계신다.
무엇을 찾으셨는가 싶어 되돌아 가보면 길가의 한 작은 돌을 대상으로 삼으셨다. 처음엔 무심히 보다가 그 어른이 카메라로 들여다 보시는 장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랜다. 멋진 모습을 한 돌의 형상이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천연스러운 돌을 어느분인지 약간의 손질을 해서 저런 모습을 형성시킨 일종의 작품이다. 무심히 지나치면 그저 한덩어리 돌일 뿐이지만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 조상들의 놀라운 안목과 그 식견에 감복을 할 수 밖엔 없다.
더구나 그런 작품을 지나치는 무심한 안목과 달리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기록하시는 이 어른의 식견 또한 나같은 어리뱅이에게는 놀라운 일이 된다.
덕분에 본 바위의 작품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바위문화"란 개념을 설정해 보려는 시도를 감행하게 되었고 몇몇 사진에 담으신 그 유형들을 가벼운 책에 기록하느라 해 보았지만 워낙 초라한 자작의 작은 간행물에 기록한 것이어서 작품으로서의 제 가치를 충분히 선양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인가 아주 큼직한 화면의 사진을 담을 수 있는 책에 수록하여 널리 펴낼 수 있게 되면 아마 보는 분들도 다들 깜짝 놀라고 말 것이라고 예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익산 미륵사 부근 산기슭의 거북바위는 규모가 아주 큰 예이지만 얼른 보면 자연암석일 뿐이어서 마을 분들도 그냥 지나치시다가 백안선생께서 묘한 위치에서 사진에 수록하시는 것을 보고는 "왜 바위를 찍누?"하며 구경 왔다가 비로소 그 바위의 생김이 거북을 닮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고는 <거북바위>로 이름을 부치면서 즐거워 하시는 광경을 보기도 하였다.
본다는 일이 그렇게 주요하다는 점을 백안선생님 모시고 다니며 절실하게 깨닫게 된 일이 여러번 거듭되었다.
외딴 섬 높은 산 산정에서 한 바위를 찍으신다. 무엇을 촬영하시는가 싶어 다가서 보니 천연의 바위인데 마치 그 형상이 바다를 향하고 기어가다가 힐끗 이 쪽을 쳐다 보는 거북이 모양에 흡사하다. 어떻게 저런 바위를 찾으셨을까 싶어 나도 자세히 들여다 보기 시작하고 보니 참으로 놀랍다. 분명히 사람의 손이 갔다. 꽁무니에 해당될 자리에 끝을 살짝 꼬부린 꼬리를 새겼다. 분명히 사람 손이 간 자취이다. 다시 실피니 등의 한 편에 글자를 새겼는데 판독하긴 어렵지만 어떤 의지가 담긴 것은 분명하다.
천연스러운 바위를 어느 어른이 필요한 만큼 손질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 무식한 후배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고 말아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하고 있지만 백안선생님 안목에 따라 그 사진을 널리 공개하고 터득하실 慧眼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아직 그렇게 하지못하고 차일피일 하다가 고만 伯顔公께서 天堂으로 떠나시고 마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려는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호 통재라! 그 어른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기려도 부족한 판에 아직도 그 바위의 성향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이를데 없다.
비단 이 바위 뿐만 아니고 압록강가의 고구려의 國東大穴을 비롯한 자료들이 또 있다. 천연과 인간이 합작해서 이룩한 바위문화의 자취만으로도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을 조명할 수 있다면 백안 저 어른이 채록한 자료들을 누군가가 학문으로 정리하면 큰 성과를 얻을 것이다.
이 어른이 더 천수를 누리시면서 국내의 여러 자료들을 더 많이 채록하셨드라면 얼마나 요긴하였을까 싶은 아쉬움이 복받친다.
백안선생은 전문가이니 응당의 사례를 받으시는 일이 옳으나 이런 바위문화 자료 수집은 혼자 자비를 들여 찾아다니며 즐거움을 다하시는 일로 만족하셨다. 결코 쉬운일이 아니셨을 터이나 모시고 다녀 보면 새로운 것을 만나는 일에 몰두하면서 환희 하실 뿐이지 직업 작가로서의 손실에는 거의 괘념하시지 않았다.
건축물도 참 많이 찾아다니셨다. 모시고 다니느라 어느 때는 수십리를 꼬박 걷기도 하였다. 어느 때 자동차를 활용하실 때 이 木壽를 동승시키고 또 전국을 한 바퀴 순방하셨다. 오며 가며 많은 말씀을 나누었다. 대단한 식견을 거침 없이 술회하시면서 木壽를 일깨워 주셨다. 더러 그 내용을 글로 썼다. 그 어른의 안목으로 촬영하신 사진에 걸맞는 설명문을 서술하기도 하였다. 그런 세월이 어느덧 50년이나 되었다.
이제 그 어른은 천당으로 올라가셨고 木壽 혼자 하늘을 처다보며 살게 되었다.
부지런히 그 어른이 들려주신 말씀을 되새기며 한국 땅에 잠재되어 있는 우리 이야기를 찾아내어 정리해 나가야 하게 생겼다. 천당에서도 내려다 보시며 오리무중에 헤매는 길에서 헤어나도록 지시해 주실 것이다.
천당에 계신 우리 伯顔선생님의 그 자상하신 배려가 한 층 더 돈독하시리니 슬픔에만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 발자취 따라 다시 열심히 찾아다니는 작업을 계속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굽어 살펴 주옵소서.
전국을 누비고 다니시는 분을 따라 이것 저것 보는 동안 새로운 식견을 많이 터득하게 되었는데 伯顔선생님의 교시가 主題가 되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바위文化'라는 주제도 그로 인하여 조성된 것인데 무심히 지나치다 보면 백안선생님은 저만치서 벌써 카메라를 들여대고 계신다.
무엇을 찾으셨는가 싶어 되돌아 가보면 길가의 한 작은 돌을 대상으로 삼으셨다. 처음엔 무심히 보다가 그 어른이 카메라로 들여다 보시는 장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랜다. 멋진 모습을 한 돌의 형상이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천연스러운 돌을 어느분인지 약간의 손질을 해서 저런 모습을 형성시킨 일종의 작품이다. 무심히 지나치면 그저 한덩어리 돌일 뿐이지만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 조상들의 놀라운 안목과 그 식견에 감복을 할 수 밖엔 없다.
더구나 그런 작품을 지나치는 무심한 안목과 달리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기록하시는 이 어른의 식견 또한 나같은 어리뱅이에게는 놀라운 일이 된다.
덕분에 본 바위의 작품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바위문화"란 개념을 설정해 보려는 시도를 감행하게 되었고 몇몇 사진에 담으신 그 유형들을 가벼운 책에 기록하느라 해 보았지만 워낙 초라한 자작의 작은 간행물에 기록한 것이어서 작품으로서의 제 가치를 충분히 선양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인가 아주 큼직한 화면의 사진을 담을 수 있는 책에 수록하여 널리 펴낼 수 있게 되면 아마 보는 분들도 다들 깜짝 놀라고 말 것이라고 예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익산 미륵사 부근 산기슭의 거북바위는 규모가 아주 큰 예이지만 얼른 보면 자연암석일 뿐이어서 마을 분들도 그냥 지나치시다가 백안선생께서 묘한 위치에서 사진에 수록하시는 것을 보고는 "왜 바위를 찍누?"하며 구경 왔다가 비로소 그 바위의 생김이 거북을 닮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고는 <거북바위>로 이름을 부치면서 즐거워 하시는 광경을 보기도 하였다.
본다는 일이 그렇게 주요하다는 점을 백안선생님 모시고 다니며 절실하게 깨닫게 된 일이 여러번 거듭되었다.
외딴 섬 높은 산 산정에서 한 바위를 찍으신다. 무엇을 촬영하시는가 싶어 다가서 보니 천연의 바위인데 마치 그 형상이 바다를 향하고 기어가다가 힐끗 이 쪽을 쳐다 보는 거북이 모양에 흡사하다. 어떻게 저런 바위를 찾으셨을까 싶어 나도 자세히 들여다 보기 시작하고 보니 참으로 놀랍다. 분명히 사람의 손이 갔다. 꽁무니에 해당될 자리에 끝을 살짝 꼬부린 꼬리를 새겼다. 분명히 사람 손이 간 자취이다. 다시 실피니 등의 한 편에 글자를 새겼는데 판독하긴 어렵지만 어떤 의지가 담긴 것은 분명하다.
천연스러운 바위를 어느 어른이 필요한 만큼 손질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 무식한 후배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고 말아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하고 있지만 백안선생님 안목에 따라 그 사진을 널리 공개하고 터득하실 慧眼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아직 그렇게 하지못하고 차일피일 하다가 고만 伯顔公께서 天堂으로 떠나시고 마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려는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호 통재라! 그 어른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기려도 부족한 판에 아직도 그 바위의 성향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이를데 없다.
비단 이 바위 뿐만 아니고 압록강가의 고구려의 國東大穴을 비롯한 자료들이 또 있다. 천연과 인간이 합작해서 이룩한 바위문화의 자취만으로도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을 조명할 수 있다면 백안 저 어른이 채록한 자료들을 누군가가 학문으로 정리하면 큰 성과를 얻을 것이다.
이 어른이 더 천수를 누리시면서 국내의 여러 자료들을 더 많이 채록하셨드라면 얼마나 요긴하였을까 싶은 아쉬움이 복받친다.
백안선생은 전문가이니 응당의 사례를 받으시는 일이 옳으나 이런 바위문화 자료 수집은 혼자 자비를 들여 찾아다니며 즐거움을 다하시는 일로 만족하셨다. 결코 쉬운일이 아니셨을 터이나 모시고 다녀 보면 새로운 것을 만나는 일에 몰두하면서 환희 하실 뿐이지 직업 작가로서의 손실에는 거의 괘념하시지 않았다.
건축물도 참 많이 찾아다니셨다. 모시고 다니느라 어느 때는 수십리를 꼬박 걷기도 하였다. 어느 때 자동차를 활용하실 때 이 木壽를 동승시키고 또 전국을 한 바퀴 순방하셨다. 오며 가며 많은 말씀을 나누었다. 대단한 식견을 거침 없이 술회하시면서 木壽를 일깨워 주셨다. 더러 그 내용을 글로 썼다. 그 어른의 안목으로 촬영하신 사진에 걸맞는 설명문을 서술하기도 하였다. 그런 세월이 어느덧 50년이나 되었다.
이제 그 어른은 천당으로 올라가셨고 木壽 혼자 하늘을 처다보며 살게 되었다.
부지런히 그 어른이 들려주신 말씀을 되새기며 한국 땅에 잠재되어 있는 우리 이야기를 찾아내어 정리해 나가야 하게 생겼다. 천당에서도 내려다 보시며 오리무중에 헤매는 길에서 헤어나도록 지시해 주실 것이다.
천당에 계신 우리 伯顔선생님의 그 자상하신 배려가 한 층 더 돈독하시리니 슬픔에만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 발자취 따라 다시 열심히 찾아다니는 작업을 계속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굽어 살펴 주옵소서.